2012-10-12
인간은 지구상에 발을 처음 내딛었을 때부터, 허락되지 않은, 실현될 수 없어 보이는 목표와 가치를 불나방처럼 욕망하던 존재다. 그 가운데 특히 비행(flight)과 비상(aviation)에 대한 욕망은 인간사의 공통적인 욕망의 리스트 중 일부로 자리했으며, 근대기가 태동하던 무렵 드디어 그 목표는 실현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의 몸뚱이가 아닌 기계장치의 몸을 빌릴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비행과 비상을 욕망하는 인간의 원초적 집착은 작가 루카 부볼리의 작품세계에 크고 작은 대륙처럼 자리하는 연작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비행과 비상 그 자체를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 보다 이 두 가지가 상징하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을 실현시키고 싶어 하고 원하는 인간의 생태에 주목한다. 작가는 이들이 상징하는 인간의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이상에서 돌출된 이념적인 실패작들을 그러모아 완벽에 대한 추구를 와해시킨 불안정한 상태를 추출하는 것이다.
글│진정윤 기자
사진제공│갤러리 현대
기사제공│퍼블릭아트 10월호
애니메이션, 아티스트 북, 조각, 회화, 드로잉 등 다양한 시각예술언어를 구현하는 작가는 크게 'Not a Super Hero', 'Flying-Practical Drawing', 'Meta-Futurism'의 세가지 연작들을 선보여 왔다. 그 중 'Not a Super Hero'는 1992년부터 시작된 시리즈로, 작가가 어렸을 적부터 즐겨보던 마블과 DC 코믹스로 대표는 미국의 슈퍼히어로 코믹스 물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Not a Super Hero'의 세계관은 기존의 대중매체들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이 보여줬던 완벽한 외형과 내면, 영웅주의와는 거리가 먼, 연약하고 가녀린 인간의 실체 그대로를 영웅의 위치로 떠민 것이다.
이 시리즈에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 ‘Dr. Logos’는 철사와 스티로폼 등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위태로운 모습의 히어로, 죄책감의 제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The Lord of Guilt’는 비닐봉지와 와이어, 사탕껍질의 몸체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들을 시중에 판매되는 액션피규어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의 앙상한 피규어로 구현하거나 플립북, 아티스트북 형태의 만화책이나 일일이 손으로 그려낸 단편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다. 가장 보통의 모습을 한 영웅들은 현대인의 고정관념 속에 자리한 완벽한 영웅들의 모습, 사회가 요구하며 인간이 갈망하는 완벽성을 비틀어 완벽하기를 실패한, 불완전성에 대한 미학을 기념비적으로 담아냈다.
그 뒤를 이은 연작인
‘미래주의를 넘어서서‘ 라는 뜻의
사실, 이탈리아인인 그가 ‘미래주의’미학을 작품에 차용한다는 것은, 독일인 작가가 나치의 제3제국이 선보였던 리얼리즘 스타일을 사용한다거나 일본계 작가가 제국주의색이 만연한 작품을 선보이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미래주의를 작품의 소재로 택하였을까. 어째서 작가는 파시스트의 유물을 다시금 현대의 미술계로 불러들인 것일까? 그리고 그는 미래주의의 무엇에 매료되었던 것인가? 작가는 한 시대의 민족적 영웅이 되기를 꾀하며, 힘과 기계문명을 숭배했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고만 미래주의자들의 실패기에 포커스를 맞췄다. 젊고 완벽한, 그리고 강인한 사회를 꿈꾸던 미래주의자들이 선보였던 다양한 트로피들 배너와 프로퍼간다 포스터들은 작가에 의해 패러디되어 불규칙적이고 불완전한 형태의 조형물과 평면작업들로 구성된 '트로피'와 ‘프로퍼간다 포스터’, ‘배너’의 하위그룹들로 나눠진다.
영화적 비현실이 실제로 돌출되듯, 지지대의 도움을 받아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속도와 움직임을 따라 형상화한 형형색색의 구조물들과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구호. 어딘지 투박하고 유기적인 2차원적 요소들이 한 군데에 ?집결하여 만들어진 조각들은 정교하지만 외부의 충격에 쉽사리 망가지는 연약한 팝업북 처럼 돋아나있다. 이전의 연작들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허황된 꿈과 희망, 그리고 이상을 아이러니한 시점으로 내비춘다. 미래주의의 하위 장르인 에어로페인팅(Aeropainting)에서 볼 수 있는 요소들도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앞서 이전 연작들에서 언급한 바 있는 비상과 비행의 이미지, 날아오르는 사람을 벡터화한 형상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작가가 과거에 선보였던 연작들과
루카 부볼리는 과거의 유물로 부터 구상된 이상적인 미래의 부스러기들을 그러모아 현대라는 거대한 거푸집으로 구워낸 실패한 이상의 도자기들을 유머러스하게 선보인다. 한 시대를 이끌고자 했으나 결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려 미래주의의 잔상이나 절대로 성취될 수 없는 목표를 한 없이 바라보는 인간의 심리. 그 결과물들은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깊이 있게 강단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작가의 손에 의해 발랄하게 변주된다. 루카 부볼리의 작업세계에서 ‘필연적인 실패’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각각의 연작들은 이를테면, 이카루스의 화려한 비상 보다는 그 추락에 중점을 두고 이를 연속적으로 촬영하는 시각적인 기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유일무이한 시선을 매개로 기록되어지는 그 모든 허무한 이상들에 대한 서사는 이루어질 리 없는 꿈을 꾸는 것이 운명인,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택한 그 말도 안 되는 모험에 대한 유쾌한 캐리커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