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12
지난 5월 4일부터 7일까지 맨하탄의 이스트 강과 할렘 강 사이에 위치한 랜댈스 아일랜드(Randall's Island)가 북적북적했다. 프리즈 아트페어가 이 외로운 섬에 둥지를 튼 덕분이다. 9년간 영국 런던에서 개최돼 왔던 프리즈의 뉴욕 프랜차이즈가 그 데뷔전을 치른 것. 페리에, 셔틀버스 등의 운행비가 포함된 명분으로 40불의 입장료를 제시한 행사의 티켓은 온라인으로 선행구매만 가능했다. 무슨 꿍꿍이고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주려는 걸까. 페리에 올라탄 사람들의 얼굴에서 궁금증과 기대가 적절히 섞인 긴장감을 읽었다. 5월의 뉴욕 날씨는 또 어찌나 가슴 벅차게 좋은지. 하늘은 끝 모르고 높고, 봄볕은 찬란하게 부서졌다. 랜댈스 아일랜드 정박장에 내려 진한 녹음위에 길게 뻗은 새하얀 건물을 바라보자니 눈이 시릴 정도였다.
글│이나연 미국통신원
기사제공│퍼블릭아트
브룩클린의 건축회사 SO-IL이 뉴욕 프리즈를 위해 디자인한 건물은 비닐하우스 모양의 단순한 가건물이다. 건축가의 말을 빌면, “커다란 텐트가 되는 것을 너머 하나의 아이콘이 되기 위한 도전”을 감행했단다. 텐트처럼 다섯 개의 모서리가 건물 전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채광의 효율성 덕에 실내는 자연광을 측면 유리와 천장으로 부터 직간접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전체 공간의 분위기가 화사해졌다. 기존 뉴욕의 아트페어들이 아모리나 항구건물에서 열린 탓에 특유의 무겁고 축축한 분위기가 아쉬웠다면, 프리즈는 건물이 분위기 조성에 플러스알파가 돼 준 셈이다. 게다가 넉넉한 공간 구성으로 통로 이동을 여유롭게 만들어 감상의 효율성을 높였다. 넉넉한 수의 깨끗한 화장실을 준비하고 로베르타 피자나 팻 레디쉬 카페 등 유명한 레스토랑을 유치함으로써 완성도를 쌓아갔다.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처럼 쾌적함을 제공하는 데 주력한 듯했다. 그러니까, “지갑을 열 수 있는 최상의 상황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의 자세랄까.
공간이 아무리 훌륭하다 한들 결국 아트페어의 핵심은 출품작과 갤러리들의 수준, 여타 프로그램의 내용일 것이다. 제아무리 외양을 치장했다 한들 작품과 프로그램이 저열하다면 칭찬받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프리즈는 온갖 요소요소에 세심한 관심을 쏟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결국 만장일치에 가까운 여론으로 “성공적”이란 단어로 수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선별된 180여 개의 갤러리들은 크게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됐다. 기존의 유명 갤러리들이 다수 포함된 보통 아트페어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프레임’과 ‘포커스’ 부분을 추가한 것이다. 프레임 섹션은 생긴지 6년 이내의 신생 갤러리에게 장소를 제공한 행사다. 작가들의 개인전 형식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포커스는 2001년 이후에 생긴 갤러리들에게 최대 세 명의 작가들을 소개할 수 있게 기획했다.
신진 갤러리 육성을 위한 기획 외에도 다수의 프로젝트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트페어를 단지 컬렉터들만을 위한 행사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가 읽히는 적극적인 태도의 이벤트들이다. 예를 들면 뉴욕의 작가들인 존 에이언(John Ahearn)과 리고베르토 토레스(Rigoberto Torres)가 협업하여 관객들이 얼굴을 석고모형으로 떠 채색하는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에이언이 1979년 최초로 브롱스 시민들의 얼굴을 뜬 조각을 선보였던 것을 재현하는 자리였다. 관객 참여와 미술사적 의의, 뉴욕이라는 지역성을 모두 반영하는 영리한 기획이었다. 이 외에도 7명의 작가들이 큐레이터 세실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의 지휘 하에 건물 안팎에서 다양한 프로젝트 형식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프리즈 토크에서는 모마, 휘트니, 메트로폴리탄의 디렉터들을 섭외해 패널의 지역성-지역성 중에선 정말 특별하고 유별난-을 적극적으로 과시했다.
본 아트페어에는 가고시안이나 데이빗 즈워너 등 콧대 높은 갤러리들이 다른 갤러리와 비슷한 규모의 부스로 참여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가고시안은 오히려 다른 부스보다 적은 면적이었는데, 루돌프 스팅겔(Rudolf Stingel)의 작품만을 효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페르시안 카펫의 문양을 은색과 자주색을 사용해 구성한 평면 회화는 신비로운 화면을 연출하는데, 첫날에 솔드아웃됐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데이빗 즈워너는 미니멀리즘 거장들의 작품을 다수 들고 나왔다. 한국 갤러리로는 국제와 현대가 참가했다. 국제가 김홍석, 이우환, 양혜규, 김수자, 마이클 주, 캔디다 호퍼(Candida Hofer), 제니 홀저(Jenny Holzer) 등을 대표작가로 소개했다. 현대가 강익중, 이우환, 정광영, 이수경, 이승택, 제이슨 마틴(Jason Martin)등을 선보였다. 외국 갤러리들이 들고 나온 한국 작가도 눈에 들어왔다. 뉴욕 제임스 코헨에서 바이런 킴의
<제유법(synedoche)>
(1992-98)을 작품이 가장 두드러지는 복도 쪽에 배치했다. 런던의 윌킨슨에서 김성환의
<진흙 개기 드로잉 1(temper clay drawing 1)>
(2011) 넉 점을 소개했다. 작가의 스승인 조안 조나스(Joan Jonas)의 드로잉과 나란히 진열했다.
진흙>
제유법(synedoche)>
흔히 재미없는 행사에 김빠진 콜라라는 표현을 쓴다면, 이번 프리즈의 뉴욕 데뷔전은 탄산이 톡톡 튀는 시원한 콜라에 라임까지 쭉 짜 넣어 상큼함이 배가됐다고 쓰고 싶다. 혀를 얼얼하게 만들만큼 자극을 주고, 뒤에 남는 라임 맛이 청량한 뒤끝을 더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트페어치고 드물게 좋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일견 완벽해 보이는 행사에도 음지는 있었던 모양이다. 뉴욕프리즈 주관단체가 랜댈스 지역의 노동조합원들을 고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월가 점령대의 항의가 있던 것. 월가 점령데모대에 소속된 하위 그룹인 박물관점령 시위대(Occupy Museum)는 예술의 상업화에 항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위대로 대부분 예술가들로 구성돼있다. 이 점령대는 이미 지난 3월에 뉴욕프리즈의 공식후원사인 뉴욕 도이치은행 본사 앞에서 시위를 벌인 바도 있다. 글쎄. 이 부분에 대해선
<뉴욕타임즈>
의 홀랜드 카터가 기사에 마지막 노트로 남인 촌평을 그대로 인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뉴욕 프리즈의 입장 티켓은 오직 온라인으로만 구입가능하다. 컴퓨터로 접근하지 않는 누군가의 입장을 쉽게 제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제지대상은 단지 소수의 뉴요커만은 아니다. 페어를 보고 난 뒤 밖으로 나와, 나는 가난하고 미친 자들과 범죄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원해서든 아니든, 한때 랜댈스 아일랜드를 집이라 부르던 사람들. 그들의 영혼은 텐트의 커다랗고 하얀 애벌레를, 월스트리트의 수트들을, 소위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사거나 팔지 않으면 어떻게도 개입할 수 없는 것들을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을 것이었다.” 부연하자면, 랜댈스 아일랜드는 한때 정신병원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고, 범죄의 온상이었다. 주거주민들은 뉴욕의 하층민들 중에서도 최하계층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뉴욕타임즈>
글쓴이 이나연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교육대학원 재학 중에, 미술 전문지 에디터 생활을 시작했다. 작가 생활이나 미술 교육보다는, 미술에 관한 글쓰기가 재미있어 유학행. 현재 스쿨오브비주얼아트에서 미술비평 석사과정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