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29
‘좋은 만화’, ‘작가주의 만화’, ‘언더그라운드 만화’ 또는 ‘독립만화’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대안만화는, 쉽게 ‘돈 안 되는 만화’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이들이 출판만화업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 한국 출판만화업계는 웹툰, 그래픽노블, 일본만화로 나뉜다. 웹툰이라고 해봤자 두 거대 포탈사이트의 만화 일변도이며, 출판사 산하의 만화전문 출판사가 해외에서 수입해온 그래픽노블과 대안만화 그리고 일본 대중만화다. 계산된 시장성의 논리와 상업성에서 벗어난 이들은 어떻게 생겨나, 어떤 활동을 보이다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섰을까. 국내외 대안만화 대표 출판사와 잡지, 그리고 그들이 만화계에 끼친 영향을 살펴봤다.
글│이정헌 기자
기사제공│퍼블릭아트
미술시장과 비슷하게 출판만화시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북미권, 일본, 프랑스 등이 90년대부터 최근까지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루빨리 만화가 매체의 전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을 타고 변태해내지 못한다면, 지금의 위기는 끝이 없을 거란 전망도 속속 나온다. 이런 와중에 ‘대안만화’로 불리는 전위적인 만화계의 한 성향이 출판이라는 전(前)시대적 미디어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만화계에 힘을 불어 넣고 있다. 이미 ‘대안’이라는 명칭에서 그 이류를 찾을 수 있다. 미디어비평가이자 만화평론가 김낙호는, “대안은 대중의 반정립이다. 대안만화는 대중만화가 지닌 ‘작품 제작 방식, 스타일 등 코드화가 정립한 장르에 대한 선입견’을 타파하는 방책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대안이라기보다 그저 ‘좋은 만화’라서 인기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최근 소수를 위한 대안만화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해석이다.
작가 스스로 생산하고 출판하는 만화를 총칭하는 대안만화는, 어지럽던 1960년대 미국과 일본에서 처음 나타났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이나 무정부주의, 인권해방운동 등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만화는 기존 대중만화에서 금기, 금칙을 스스럼없이 범하며 지속적으로 이슈를 생산했다. 쉽게, 하지 말라는 건 다 했다. 베트남 전쟁이 종결되며 식은 이 열기는 80년대에 다시금 살아났으나 늘 오버그라운드로는 떠오르지 못한 채 근근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최근 국내 대형출판사가 만화전문 출판사를 만들어 펴내는 아트 슈피겔만, 대니얼 클로즈, 마르잔 샤트라피 등의 작품이 바로 대안만화의 전형이다. 뒤늦게라도 ‘좋은 만화’가 쉬지 않고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대안만화에 출판만화업계 시장이 반응하고 있으며,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런 대안만화 출판 붐과 더불어 2000년대 초반 자취를 감췄던 국내 대안만화 동인들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가로」, 일본 문화예술 전반에 영향을 끼치다
“재미없는 만화는 만화가 아니다.”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가 남긴 말이다. 그가 한창 활동했던 60~70년대에는 그의 영향을 적잖이 받은 이들이 속속 등장했고, 모두가 대여용 만화(대본만화)를 필두로 대중성이라는 일련의 흐름에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그러한 획일화된 장르의 속성을 거꾸로 치고 들어간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전설의 「가로」지의 작가들이다. 대본만화를 출판하던 청림당이 만든 이 잡지에는 당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작품만이 연재되었다. 「가로」지는 1959년부터 당대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파격적인 일련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대본만화와 대립되는 지점에 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대중성만을 지향하던 만화계의 판도를 뒤집어엎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예술 전 장르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쓰게 요시하루는 야인 기질이 다분한 작가였음에도 데즈카 오사무와 더불어 ‘신’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가로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을 두 가지로 이야기하자면, ‘극화체(만화에서의 리얼리즘을 추구할 목적으로 고안된 작화법)’와 사소설이라는 문학 장르를 만화에 녹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극화체의 창시자 다쓰미 요시히로, 쓰게 요시하루 등 당대의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작가들은 「가로」를 통해 만화사에 길이 남는 작가가 됐다. 이들의 영향은 일본만화계뿐 아니라 문학과 공연, 영화 분야에 고루 영향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일본이 ‘망가 제국’을 만드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금기를 깬 미국의 대안만화「헤비메탈」
보수적인, 즉 점잖고 귀여운 아동만화, 교육만화, 히어로물이 득세한 70년대 미국. 어느 날 비키니 차림의 육감적인 여전사가 나타나 외계인들의 목을 사정없이 쳐내는 식의 성인만화가 등장해 대흥행을 이끌었다. 「헤비메탈」은 지난 달 세상을 떠난 서양만화계의 또 다른 신, 장 지로드(필명:뫼비우스)가 프랑스에서 만든 「메탈위르랑(Metal Hurlant)」의 미국판으로 시작됐다. 「메탈위르랑」은 1980년에 폐간됐으며, 「헤비메탈」은 아직까지 발행되고 있다. 1976년, 몇몇 작가가 동인 성격으로 모여 만든 잡지로, 80년대 문학에서 사이버펑크 유행 조류를 같이 타고, 특히 SF영화계, SF문학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뫼비우스, 엥키 비랄, 리차드 코벤, 루이스 로요, H.R.기거, 토드 멕퍼레인, 밀로 마나라, 사이먼 비즐리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거장 중에 헤비메탈을 거쳐 가지 않은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당시 이들이 보여줬던 파격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대중만화의 정형화된 코드와 맞닿아 있다. 이는 이들이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이야기다. 미국에는 「헤비메탈」 이외에도 만화라는 장르의 표현한계를 실험하고자 했던 「잽(ZAP)」「로우(RAW)」 등의 만화잡지도 있었다. 이 잡지에 연재했던 로버트 R. 크럼 등의 작가들은, 당시엔 대중적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아트 슈피겔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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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단숨에 인지도를 획득,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거절당한 작가들의 연합, 「아소시아시옹」
지금은 어딜 가나 인정받는 프랑스의 만화가 킬로페, 루이스 트롱다임, 에드몽 보두엥 등은 1990년에도 여전히 만화계에 있었다. 젊었던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출판사에서 번번히 거절당하자 한데 뭉쳐 ‘아소시아시옹(L’Association)’을 결성한다. 처음엔 출판사라기보다 말 그대로 ‘연합’의 성격이었다. ‘거절당한 만화가들의 연합.’ 프랑스 만화계는 70년대 미국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이는 이내 프랑스 고유의 스타일로 변형됐다. 하드커버에 얄팍한 ‘앨범만화’도 여기서 탄생됐는데, 아소시아시옹은 이러한 프랑스 만화의 고유방식, 편견을 깨는 독특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였으며, 또 다른 프랑스 만화를 집대성 해내기에 이른다. 이들은 처녀작을 내더라도, 베테랑 만화가의 작품이라도 동일한 원고료를 지급하는 등 양질의 만화를 선보이고자 획기적인 방식을 취해갔다. 이에 따라 후원자, 팬층이 삽시간에 엄청나게 불어나면서(처음 2년간 200명의 후원자에서 다음 몇 년이 흘렀을 땐 이의 10배가 되어 있었다) 기존에 파리의 한 카페에서 진행했던 강연, 교육프로그램 등을 못 여는 수준이 됐을 즈음, 이들을 벤치마킹한 대안만화 출판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결국 현재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아트라빌」, 「아킬오스」, 「라 페티에르」등의 ‘자식’을 낳았다. 전 세계적으로 대안만화 출판사 및 작가층이 가장 두꺼운 곳은 아무래도 프랑스다. 이건 버림받은 다섯 명의 만화가들이 쌓은 위대한 유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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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오버그라운드! 「새만화책」 「살북」 「쾅」 「사이언스 코믹스」
한국에는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일부 출판사 혹은 개인사업자에 의해 당대에 ‘똘끼’ 충만한 젊은 만화가들을 모아 연재만화지를 냈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세종대학교 등의 학생들과 기성 만화가이나 비주류를 자처하며 파격적인 만화를 내놓기 시작한다. 예로는 「파마헤드」, 「야후매니아」 등이 있었는데, 결국 돈이 되지 않았기에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폐간됐다. 현재 당시 작가들은 대부분 40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현재 ‘뽀로로’를 만든 장본인도 있고,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 된 이도 있으며, 영영 만화계와 결별한 이들도 있다. 대부분은 만화 판을 빠져 나갔고, ‘대안만화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의 연령층은 높아지고, 얄팍해졌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시금 이들과 20-30대의 작가들이 일어서고 있다.
‘새만화책’은 2002년 출발해 현재 10년째인 대표 대안만화 출판사이다. 「새만화책」이라는 계간 만화지를 출판하며 출발한 이 출판사는 현재 국제적인 네트워크까지 쌓으며 희귀한 대안만화를 국내에 소개하거나, 국내작가를 해외에 소개하면서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로버트 크럼, ‘제이슨’ 등 해외 유명 만화가들의 단행본을 지속적으로 펴내기도 한다. 장르는 매우 다양하다. 현재까지는 총 80여권을 펴냈다. 지난 4월 25일부터 29일까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리는 ‘플래닛망가’ 컨퍼런스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여해 한국의 대안만화와 만화 교육행사 및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새만화책」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만화가들은 2010년부터 저들끼리 모여 살북이라는 비정기 만화지를 펴내고 있다. 김성희, 김수박, 유창운, 앙꼬, 마영신, 홍연식, 공사원 등의 만화가가 모든 걸 알아서 한다는 콘셉트다. 500부 가량을 펴내 홍익대 근처의 ‘한양문고’나 ‘북새통문고’ 같은 만화 전문서점에 뿌리는 게 전부. 점차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이들은,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리는 게 전부다. 때론 매우 개인적 감성이 두드러지나, 이내 현재의 정치적 맥락과 긴밀히 맞닿거나 하며 호소력 짙은 작품을 선보인다.
‘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선후배로 동인 만화 집단으로, 웹진을 펴내고 있다. 최근에는 선후배 관계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작가들을 끌어들여 정기적으로 작품을 연재하고 있으며, 성향은 전반적으로 감상적이나, 많은 인원만큼 스타일이 상당하다는 게 장점. 웹진형태로 10호까지 나왔으며, 조만간 한 권의 근사한 책으로 출판된다. http://www.quang.co.kr
만화,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이승환, 강철영, 심대섭이 만든 ‘사이언스 코믹스.’ 이들은 30대 초반으로 모두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나 일주일에 한 번 씩 모여 만화에 대한 ‘과학적인 실험’을 감행한다. 본인들은 그저 ‘게임과 SF소설을 좋아하는 만화애호가들의 취미생활’ 정도로 여기지만, 꽤나 독특하고 흥미로운 구석을 많이 가진 작품을 연신 선보인다. 이들은 ‘사이비 과학자’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터무니없지만 더없이 급진적인 연구를 지속하고 있으며, 조만간 이 ‘연구집’이 나올 예정이다. http://www.scomic.net
“대안만화는 이제 주류가 되었다”
김대중 ‘새만화책’ 공동발행인 인터뷰
“좋은 만화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2002년에 설립된 '새만화책'은 한국 대안만화의 명맥을 10년째 이어가고 있는 출판사이다. 현재까지 출판한 만화는 80여 편. 좋은 만화란 무엇인지, 어떻게 활동 중인지 묻기 위해 서울 개포동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갔다. 경제적 여건으로 충북 제천의 폐교로 사무실을 옮겼다 올해 봄, 다시 서울로 온 김대중, 조경숙 공동발행인은 4월 25일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개최된 대안만화 컨퍼런스 준비로 한창 분주했다.
만화지
<새만화책>
이 6권을 마지막으로 출판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단행본 작업에만 전념하시는 건가요?
새만화책>
이 역시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커요. 절대 만만하지 않아요. 지속적인 출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가장 아쉬운 부분이지만, 다시 힘을 내려고 하고 있어요. 비정기 만화지로 탈바꿈을 하려 시도 중입니다.
작가 섭외부터, 편집, 제작, 유통까지 전부 두 분이 하시는 건가요?
독립출판이라 불리는 형식과 유사하다고 보면 돼요. ‘모두 우리가 알아서 한다’랄까요. 출판 비용은 모두 저와 조경숙(새만화책 공동발행인) 선생님이 직접 일거리를 받은 자비로 출판합니다. 보시다시피. (웃음) 해외 대안만화 출판사와의 교류 말고는 없어요.
국내외 작가 모두 직접 선정하는데, 간혹 직접 출판을 원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지만, 웹툰이나 일본만화 성향 작품을 들고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느낌이 맞는 작가 찾기가 힘들지요. 편집은 스캔한 원고의 티끌 지우는 작업까지 모두 조경숙 선생님과 제가 합니다. 유통의 경우는 최근 출판 산업이 힘들어지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요. 10년 전만 해도 소규모 서점엔 직접 찾아가 유통을 했는데, 지금은 남아난 서점이 없거든요.
포괄적인 질문이지만, 대안만화라는 장르는 현재 어떤 모습인지 설명해주세요.
대안만화는 만화계의 주류가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주류입니다. 대안이 아니게 된 셈이랄까요. 상대적으로 거대한 규모의 출판사는 해외에서 라이센스를 사와서 파는 형식을 취합니다. 이러한 경향의 한계는 분명 빠른 시간 안에 찾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대안만화로 불리는 장르들이 만화출판업계의 블루칩이 된 셈인데, 이것이 마냥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시기가 대안만화의 정체성을 다시금 고민해야 될 때가 아닌지 싶습니다. 매체의 성격부터 다루고 있는 스타일의 문제들까지 많은 것들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 문제점은 어떻게 돌파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센 녀석이 나와야 합니다. 진짜 ‘하드코어’한 작품이요. 그리고 작가가 작품 제작 이외에 출판의 구조나 장기적인 계획 등에 신경 써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큰 출판사들이 외국의 ‘대안만화’ 라이센스를 손쉽게 사와 국내에 소개하는 차원으론 아무런 인프라를 생산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과 연관 지어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도 새롭게 생각해야합니다. 「가로」지가 그랬듯이 출판사는 죽고, 작가만 살아남아서는 더 발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앞으로 ‘새만화책’은 어떻게 운영됩니까?
‘좋은 만화책을 더 많이 낸다.’ 이게 전부입니다.(웃음) 새만화책을 비롯 의식 있는 작가들이 지난 10여 년간 열심히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를테면 작가 레지던스, 국제 교류(소개) 프로그램, 1대1 작가 육성 프로그램인 ‘새 이야기 학교’ 등을요. 이런 형식을 계속해서 유지할 예정입니다. 이제 슬슬 뿌린 씨앗의 성과물을 거둘 시점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