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8
예술이 포용하는 범위가 너무 커져 버렸다. 그것이 무엇이든 돈이 된다면,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예술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길 좋아한다. 자동차, 화장품, 패션, 가구, 심지어 가전제품까지… 예술이란 단어의 과용을 넘어선 이 같은 남발은 자칫 예술 자체에 대한 피로감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는 예술품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와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전제를 과소평가하거나, 예술의 역할을 표피적인 장식 즈음으로 여기는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대다수 아트 콜라보레이션이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식의 장식미학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보면 예술과 타 장르(이하 디자인으로 통칭)와의 결합은 어쩌면 물과 기름처럼 처음부터 쉽게 섞이지 않는 경계선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네온사인이 가득한 고급스럽고 화려한 쇼핑타운이 지배하는 현실 속 창작자들의 욕망은 그 경계선을 하루에도 수십 번 넘어버리며 창의적인 ‘탈옥’을 시도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디자이너의 영역을, 디자이너들은 예술가들의 영역을 탐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 | 이대형 Hzone 대표
기획, 진행 | 월간 퍼블릭아트 이혜린 기자
올겨울 크리스마스에 맞춰 ‘미지의 영역’에 대한 한 예술가의 도발이 성공을 거둘지 시험대에 오른다.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
미술시장의 냉각기가 수년간 지속하면서 많은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품이 굳이 갤러리, 옥션, 아트페어를 통해 유통되어야만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작품 팔기가 어렵다 보니, 아트 컨설팅, 미디어 파사드, 가구 디자인, 조명 디자인, 에디션 작품 등 판로를 다각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는 작가의 정체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 터부시했지만, 이제는 장르를 초월한 유연한 접근 태도 자체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디자이너의 전유물이었던 책자, 달력, 노트, 공간 디자인, 라이트 디자인에 예술가들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가미되며 디자인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이 지속성을 가지고 하나의 브랜드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가장 쉽게 벌어지고 있는 아트 콜라보레이션은 디자인과 예술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기 색깔을 유지한 채 서로의 영역에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과 조각가 박승모가 한 번은 패션쇼를 통해, 그리고 다음번에는 미술관 전시를 통해 서로의 작품을 병치시키거나, 넵스 마스터피스(Nefs Masterpiece) KLPGA 경기 때 예술가들의 작품이 골프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경우다. 단순히 문맥만 바꿔줬을 뿐인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전략은 전형적인 현대미술의 방법론이다.
예술 영역으로 진입하는 디자이너의 숫자와 속도는 예술가들의 그것보다 훨씬 빠르고 조직적이다. 상품시장과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 홍보, 마케팅 등 다양한 능력을 겸비한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움직임을, 이미 세상은 예술로 보기 시작했다. 론 아라드(Ron Arad)의 디자인 뮤지엄 홀론((Design Museum Holon),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Vitra Design Museum) 등 디자인만을 전문적으로 컬렉션하는 미술관이 세계각지에 생겨나고 있고, 프랭크 게리((Frank Gehry), 마크 뉴슨((Marc Newson) 같은 건축가, 디자이너의 원본 작품이 세계적인 옥션 하우스에서 예술작품을 제치고 기록적인 낙찰가를 만들어 내는 사건이 이제 더는 뉴스거리가 못된다. 얼마 전 현대카드 MoMA 큐레이터 방한 프로그램으로 한국을 찾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선임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의 디자인 전시
순수한 미학적 가치 이외에 기능과 목적을 담아내야 하는 디자인이 순수예술이 점령했던 미술관의 문턱을 넘게 된 것은 예술의 아방가르드 정신이 그랬듯이 디자인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는 외연을 넓혀왔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오브제보다 그 오브제가 소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디자인의 영역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디자인의 진화와 다양화의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그런 면에서 예술가의 독창성을 디자이너가 습득해서가 아니라 미술관, 갤러리, 옥션 등 미술제도권에서 디자인 고유의 진화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더 옳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적인 미술관들의 디자인 컬렉션 방향이나 전시 기획 아이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험적인 디자인 컬렉션으로 유명한 뉴욕 MoMA의 파올라 안토넬리는 새로운 디자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높은 관심을 보였다. 포커스의 중심이 된 디자이너들은 공통적으로 기존 디자인, 건축에 대한 고정된 정의를 부정하거나 해체하길 좋아한다. 기후, 인구변화, 소비패턴, 환경오염 등의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데이터 비주얼라이제이션(랜덤웍스), SNS와 소통하는 건축구조물(양수인), 우스꽝스러운 애니메이션 캐릭터(스틱키 몬스터 랩), 컴퓨터 유저 인터페이스(양민하), 오픈 소스 인공위성 프로젝트(송호준) 등 물리적인 오브제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디자인의 영역으로 해석하고 있는 좋은 예이다. 마치 개념주의 예술작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다루기 시작한 것인데, 다른 점은 미학적 가치 이외에도 특정 문제 해결을 위한 기능적 측면과 사회적 가치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디자인이 예술작품이 되는 예는 비단 미래지향적인 창의성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20년대 만들어진 던힐 나미키 만년필 세트(Dunhill Namiki 12개)가 영국 본햄스 11월 경매에서 추정가 100,000~150,000파운드(한화 2억~3억)에 나와 ‘펜이 검보다 강하다’는 말을 실감케 했고, 주디스 라이버(Judith Leiber)의 에르메스 다이아몬드 벌킨백은 12월 헤리티지 옥션에 추정가 80,000~90,000달러(한화 9,000만 원~1억)에 나올 예정이다. 고가 브랜드와 결합한 스타 디자이너의 작품 역시 소비자들의 열망과 한정품 전략 등을 통해 예술품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소장가치’를 획득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 자신이 평소에 좋아했던 것들을 수집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남들이 별로 가지고 있지 않을 것들 그래서 나만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 것들을 수집한다. 예술작품이 누렸던 컬렉션, 미술관, 옥션, 아트페어란 기회의 땅에 디자인이 빠르게 조직적으로 넘어오고 있는 것은 그동안 사람들과의 소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디자인이란 예술작품의 겉모습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디자인 기본기에 충실하게 사람들에게 새로운 상호작용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이어야 한다. 현대예술작품들이 걸어온 치열한 전시, 비평, 시장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디자인 역시 이제 예술작품과의 경쟁이 아닌 디자인 안에서의 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예술가와 차별화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작업에 임해야 할까? 미식축구 경기를 떠올려보자. 디자이너의 행동철학은 미식축구의 공격라인과 닮았다. 공을 배분하고 운반하는 쿼터백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궂은일이다. 이렇듯 터치다운 선까지 운반해야 할 공이 바로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콘텐츠이다. 온갖 난관과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창의적으로 뛰어야 하는지 상상해 보자. 고정된 목표물에 다다르기 위해 얼마나 역동적인 변수를 예상하고 방어해나가야 하는지 각오해야 한다. 성공한 디자이너는 이처럼 콘텐츠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콘텐츠가 움직이는 동선을 읽어내고 창조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화려한 표피가 아닌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새로운 동선을 쉼 없이 창조해 냈을 때, 디자인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
글쓴이 이대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