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23
작가에게서 건네받은 자료를 보고 작가가 도시를 그리고 건물을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전부터 짬짬이 보아왔던 그림을 이번 기회에 재확인한 것. 그림에는 도시가 있고 건물이 그려져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도시는 무미건조하고 무표정하고 익명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도시 뒤에 숨은 작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는 보이는 도시 속에 보이지 않는 자기를 밀어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작가로부터 도시로 건너간 지옥 같은 우울이 보이고, 치명적일 만큼 유혹적인 고독이 보였다. 그 도시에는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는 도시를 흥건하게 했고, 흥건하게 고인 물거울 위로 도시를 반영하고 작가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도시는 건물과 그림자로 분절되고, 덩달아 작가 또한 실체와 비실체로(비가시적인 실체 이를테면 우울과 고독으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건물보다 그림자가 더 크게 보이고, 실체보다 비실체가 더 살갑게 와 닿았다. 그렇게 작가가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림자였고 비실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도시를 그리는 것은 다름 아닌 도시를 시로 옮겨 적는 일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때로 말장난을 했고, 그 말장난을 통해서 도시의 숨은 뜻이 더 잘 드러나게 했고, 도시에 밀어 넣은 자신이 더 잘 드러나게 했다. 작가와 처음 만났을 때 건물에 자기를 이입시키는 방식, 그래서 어떤 성격을 내포하고 내뿜는 도시를 그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주문했었다. 그리고 그 주문이 우문이었음을 알겠다.
글 | 고충환 미술평론가
자료제공 | 교동 아트스튜디오
이여운은 사람을 통해서보다는 도시의 구조며 건물의 형태를 통해서 도시를 더 잘 파악하는 편이다. 아마도 시종 도시의 구조며 건물의 형태를 그려온 작가의 이력과도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습득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도시의 구조며 건물의 형태를 파악하다보면 도시는 저절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그 파악은 특별할 것이 없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일이 정작 작가에게는 당연치가 않고, 그 당연하지 않음이 작가의 작업을 특별하게 한다. 즉 작가가 파악하고 싶은 도시는 도시의 구조며 건물의 형태가 아니다. 도시의 구조며 건물의 형태가 암시하는 비가시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도시의 정서나 욕망을 파악하고 싶은 것이다. 작가가 도시를 파악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도시의 표면을 뚫고 그 이면을 읽는 일이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헤집어 그 행간을 읽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도시의 도시다움을 오롯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도시의 표면은 다만 이런 이면읽기와 행간읽기를 위한 구실이며 관문에 지나지가 않는다.
작가가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전주 교동은 한옥들이 군집을 이룬 한옥마을이다. 정연한 바둑판 형태를 띠고 있는 길이나 구조가 한옥마을이 계획적으로 조성된 것임을 말해준다. 전통적인 한옥마을이면서도 이처럼 잘 정비된 구조가 진열장을 연상시킨다. 교동을 벗어나면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해 온 도시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를테면 금암로터리의 오거리 같은. 이방인에게 이 교차로는 곤혹스럽다. 이를테면 어느 신호를 보고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 교차로는 슬로우시티를 슬로건으로 내건 전주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산업화의 와중에서 뒤쳐진 전주가 선택할 수 있었던 방편이 바로 이런 전통의 상품화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 한옥과 일본식 적산가옥, 그리고 한옥형태의 현대식 건물들이 혼재해 있는, 마치 시간과 시간이 겹겹이 중첩된 채 멈춰 선 것 같은, 그렇게 멈춰 선 욕망 위로 도시가 또 다른 욕망을 꿈꾸고 있는 것 같은 친근하면서도 낯선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고 작가는 전주에 대한 인상을 적고 있다.
팍스캐피털리즘의 제일원칙은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의 물화 또는 물신화이다. 그 물신화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물질의 표면 위로 밀어 올려 져야 하고, 상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자연이 상품화되고, 관광이 상품화되고, 문화가 상품화되고, 전통이 상품화되고, 사진 찍는 행위가 상품화된다. 특히 사진이 보편화된 이후 사람들의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사진이 기억력을 대신해주기(대신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관광지에서 사람들은 연신 사진 찍기에 바쁜데, 자기가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보는 것이며,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기념하는 것이다. 그렇게 국토 전체가 기념비적인 장소가 된다. 그래서 상품적 가치가 없는, 기념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장소를 위한 장소는 없다. 하다못해 산간오지의 영화촬영지마저 기념을 위한 구실이 된다. 전주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공공연하게 비판적이지는 않지만(도시에 대한 작가의 시각은 비판보다는 정서를 향한다), 아마도 이처럼 전통과 자본주의의 욕망, 전통과 상품화의 욕망 사이 어디쯤엔가 어중간하게 멈춰 선 것 같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멈춰선 시간에 주목했을 듯싶다.
그래서 주제도 Timeless City 곧 시간이 멈춘 도시이다. 사실 시간이 멈춘 도시는 유독 근작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데, 이를테면 전작에서의 박제된 시간, 멈춰선 시간, 어떤 시간과 같은 소주제가 도시 그림에 부쳐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간은 공간과 함께 작가의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키워드일지도 모른다. 공간은 도시를 그리면서 저절로 획득되는 것이지만 시간은 이와는 좀 다르다. 마치 도시로부터 시간을 소거하고 박제화한 것 같은, 초시간적 공간 속에다 도시를 세팅해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더러 텅 빈 것 같고, 허상을 보는 것 같은 의외의 인상은 바로 이렇듯 멈춰선 시간 혹은 부재하는 시간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재하는 시간의 여백 속에 작가가 대신 밀어 넣어진다. 말하자면 멈춰선 시간, 박제된 시간, 소거된 시간, 부재하는 시간은 다름 아닌 작가가 정적인 도시와 오롯하게 만나지는 순간인 것이며, 그래서 오로지 작가의 시간만이 흐르는 순간일 수 있다.
최근 수년 내에 주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소위 도시회화로 범주화할 만한 의미 있는 경향이 확인된다. 시종 도시를 그려온 이여운의 경우 역시 그렇다. 작가는 우선, 누구든 알만한 건물들을 그린다. 이를테면 객사길, 영화의 거리, 전주 향교 명륜당, 금암로터리, 째보선창,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 삼원한약방, 천주교의 성지인 전동성당과 사제관 같은. 그 자체가 작품의 제목으로 부쳐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실재하는 도시며 건물들을 채집하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도시의 아카이브를 겨냥한다.
아카이브는 객관성을 지향한다. 작가는 알만한 그리고 실재하는 도시며 건물들을 그려 이런 객관성을 견지한다. 그러면서도 일종의 우중도시라는 가상의 상황(심리적 상황?)을 매개로 도시 속에 자기를 밀어 넣어 주관화한다. 그 자체로는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도시를 일종의 내면풍경으로 전유한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우중도시에서의 비는 도시 위로 내리는 비라기보다는 사실은 작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비다. 작가가 도시에 밀어 넣은 비며, 작가가 도시에서 캐낸(발굴해낸) 비다. 이처럼 도시를 매개로 객관과 주관이 팽팽하고 느슨하게 맞서고 스미고 혼성되는 것에서 고유의 긴장감이 유발되고, 그 긴장감이 작가의 그림의 개성을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