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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전쟁하는 한국미술

2011-06-16


유구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국의 근현대사.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1919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유신정권과 민주화항쟁의 긴 동굴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근현대는 유난히도 어둠과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의 미술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었으며 예술가들은 어떻게 저항하였는가? 이 특집은 일제강점기 이후 바람 잘 날 없던 한국의 근현대사 중에서 투쟁과 전쟁, 항거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한국미술의 발단에 중첩시키는 기사이다. 한국의 미술계는 어두운 근현대사에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어떤 형식으로 저항하였으며 한국 미술은 이에 어떤 방식으로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한다.

기획, 진행 | 월간 퍼블릭아트 조숙현 기자


3·1 운동 이후 한국미술의 반향_저항미술의 부재

한국 근현대사의 저항의 역사는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역사적인 저항운동, 3·1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사실상 실패로 막을 내렸고, 이에 문화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더 큰 저항 세력을 만드는 것 보다는 해외에서 새로운 문물을 익혀 근대화로 나아가야겠다는 의식이 더 강했다. 이러한 사회 지식인층의 분위기 속에서 야망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서구 문화를 익혔다. 이 때 유입된 사상 중 하나가 바로 예술 지상주의이다.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사조인 모더니즘 미술과 예술지상주의의 확산은 예술인의 자유와 순수미술론을 낳았는데,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현실도피에 가까웠다. 당시의 미술계는 철저하게 탈정치성향을 나타냈으며, 이것은 1930년대를 전후해 저항미술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를 활동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대구 출신의 이인성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미술을 익힌 그는 17세 되던 해인 1929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입선하여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35년까지 머물면서 성공적인 작가 생활을 유지했다. 그가 주로 발표한 그림들은 서구적인 방식으로 내부를 꾸민 가정 집, 전원의 평화로운 풍경 등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에서 저항이나 반발감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정치적인 성향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당시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집단과 등용문은 1918년 결성된 서화협회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개설된 조선미술전람회였는데, 당시 미술사회를 이끌던 두 개의 주축이었다. 서화협회는 당시 일본과 서양을 비롯해 물 밀 듯이 밀려오는 신미술의 유입에 주체성을 가지고 전통예술을 고수하며 새로운 미술을 정립하고자 한 민간미술인의 자발적 대응책이었다. 서화협회는 1936년 재정적인 압박과 일제의 외압 등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그 주도적 의의는 한국미술역사의 자랑으로 남아있다. 한편 조선미전은 반대로 일본 미의식의 이식을 강하게 요구했다. 예술가의 미술작품 중에서 저항의식이 감지된 예는 김진우의 <죽석도> 나 이상범의 <이순신 장군 상> 등이 유일하다. 한편 1920년대부터 주요 언론은 비평을 생산해내기 시작하고 미술 전문 잡지들이 출판되어 미술이 전문적인 분야라는 인식이 생성되었으나 미술비평의 대부분은 인상비평에 그쳤다. 사회적 문화적 탄압이 거칠어 예술이 제 목소리를 자신 있게 내지는 못하였으나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고 언론 매체와의 관계를 성립하는 등 한국 미술이 토대와 구색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1920년대 이후 광복 이전_프로미술과 친일미술파가 대립한 격동의 시기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은 시각예술 분야뿐만이 아니라 문학, 음악, 대중문화 등을 총 망라하는 집단이었고, 무정부주의와 러시아 급진적 혁명주의의 성격을 표방했다. 카프는 “예술의 무기로부터 무기의 예술에!”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부르주아적인 서양화가 아닌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포스터, 삽화, 신문만화 등을 이끌었다.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목표로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형식은 노동자와 농민을 타깃으로 삼아 이해하기 쉽고 간결해야 한다는 것이 이 운동의 골자였다. 이 때 카프 미술운동을 이끌었던 주축은 김복진과 안석영이었다. 김복진이 1926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신흥미술과 그 표적’이라는 칼럼에서는 새로운 조형예술의 부상을 예고하고 있다. 한편 김복진은 조선 최초로 민족주의 미술, 민중미술론을 제창한 미술평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1923년「상공업과 예술의 융화점」이라는 글에서 “예술은 결코 예술을 위하는 예술이 아니고 민중을 위하는 예술, 우리 민족을 위하는 예술”이라고 제창했는데, 이것은 1920년대 예술 지상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이상춘의 <질소비료공장> 은「조선일보」에 연재되던 이북명의 삽화로 실린 판화를 발표하며 당시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폭로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그 의의는 창대하였으나 끝내 주류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카프는 1931년 이후 극심해지는 일제의 탄압과 단속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35년 해산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잡지, 신문의 문화 비평, 삽화, 판화, 만화, 연극 무대장치 등 예술을 실생활로 끌어들인 귀중한 사례를 남겼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는 중일전쟁 이후 친일 미술파가 판을 쳤다. 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고, 1941년에는 조선미술가협회라는 친일미술단체가 발족됐다. 많은 미술가들이 창씨개명을 했고 일본어로 미술비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의 작품은 노골적으로 일본의 정책을 찬양하거나 응원하는 기조를 띠었다. 그러나 이에 맞서 침묵과 비협조로 일제에 저항한 미술가들도 적지 않았다. 1942년 평양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길진섭은 황폐화된 농촌과 인민들의 피폐한 생활을 회색조의 그림으로 그려 친일파에 정면으로 대항했고, 일본의 자유미술과협회전 회원이었던 김환기는 1941년 협회를 탈퇴한 이후에 친일미술 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전람회를 개최했던 신미술가협회의 활동 또한 주목할 만한데, 조선미전을 거부한 재야작가 이쾌대, 이중섭, 문학수, 진환, 최재덕 등으로 구성되었다. 신미술가협회는 조선의 향토 소재를 주로 작품의 소재로 차용했다.


광복 이후_한국전쟁과 민족미술의 태동

1945년 꿈같은 광복이 찾아오면서 잠시 한반도는 활기를 띠는 듯 보였으나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남한은 미군정의 체제아래 놓이게 되었다. 미군정의 문화억압정책은 폭력적이고 몰상식했다. 미군정은 1947년 미국문화연구소(USIA: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를 설치하면서 박물관이나 미술관 건물을 점령하고 문화 보호정책을 펼치는 시혜를 베푸는 한편 덕수궁미술관을 군정청 사무실로 사용하고 댄스파티 장소로 활용하는 위선적인 정책을 벌였다. 이에 미술계는 백색테러로 대응했다. 1947년 3월 조선미술동맹 3·1 기념미술전람회가 열리는 화신화랑에 반공세력의 테러가 일어났고, 5월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축하하는 이동순회전람회가 열렸던 7월 대전 전시장에는 60여 명의 테러단이 난입해 38점의 작품을 파괴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에 아무런 조취도 취하지 않았다. 미군정의 눈에는 이런 테러에 관여할 관심도, 힘도 없었다.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조선미술의 통일적 신건설’을 목표로 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조직됐다. 김주경, 정현웅, 길진섭, 윤희순 등으로 구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는 연합군 환영행렬에 사용할 초상화, 깃발, 국기를 제작하고 예술강좌를 열었다. 이 조직은 광복 이후 가장 발 빠르게 처신한 미술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가장 큰 과제였던 일제잔재청산에 대해서 미술계의 움직임은 소극적이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출범 당시 친일미술인을 배제한 사례가 유일한 잔재청산 행동이었다.


윤희순은 1947년 1월 문화옹호 남조선문화인예술가 궐기대회에서 ‘미술활동의 자유’를 보고하고 남조선 문화옹호 공동위원회를 결성하여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관심은 오로지 친미 우익세력을 양성하고 나머지는 배척하는 데 있었다. 미군정은 1948년 4월 자신들과 이승만 일파의 한 사람인 고희동에게 제1회 서울시문화상을 주었고 6월에는 서울시예술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같은 해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김만형과 유진명과 같은 미술인은 가차 없이 체포하기도 했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가장 성황을 이룬 미술 장르 중 하나는 기념조각으로, 항일투쟁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애국선열 기념 동상조각이 활발히 진행됐다. 진해, 충무, 부산에 각각 윤효중, 김경승, 김경승이 세운 <충무공 동상> 과 차근호의 <을지문덕상> 등이 대표적인 동상으로 해방 이후의 민족주의 건립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미술장르였다.


1980년대_민중미술의 역사 시작

1980년 5월 18일 전두환 정권의 지휘 아래 광주 시민들에게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력 진압사태가 벌어지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 저항미술의 근현대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단초를 제공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민중미술이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젊은 작가들이 ‘현실과 발언’이라는 모임을 창립하면서 본격적인 서막이 시작된다. 현실과 발언은 미술의 주체와 객체 모두를 민중으로 설정하고 예술이 사회에 적극적인 발언대로 작용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자연스럽게 리얼리즘의 장르와 기법이 발달했다. 민중미술의 구체적인 작업성과는 1982년 이후 각종 전시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당시 민중미술은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사명감과 같은 존재로 다가와 한국의 젊은 미술 사조를 장악했다. 1985년에는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되어 서울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이라는 독자 전시공간이 마련되기도 했다. 강요배, 김호석, 박불똥, 손장섭, 손상기, 신학철, 안창홍, 오경환, 오윤, 임옥상, 전수천, 정복수, 홍성담 등이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했으며,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 15년 전> 을 통해 주류 제도권에 편입하기도 하였으나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민중미술의 본 의미를 상실한 ‘민중미술 장례식’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민중미술이 근현대사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활기찬 미술의 사회 참여 운동이라는 데에는 의의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으로 민중미술의 허점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예술이 지나치게 노골적인 정치노선에 종속됨에 따라 미적 자율성과 예술적 특수성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근원이 되는 욕망은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변혁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로 이런 욕망은 미술 제작의 주객이 전도된 상태를 야기해 작품 제작에 있어 질적 빈곤을 초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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