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17
구두와 블라우스를 고르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주식투자, 예절, 투표, 재난상황에서의 행동방식까지 모든 삶은 무의식적 세계라는 강력한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 위기에 닥쳤을 때 생존과 죽음을 결정하고, 일상과 시장을 움직이는 것엔 의식적 뇌 못지않게 숨겨진 뇌가 작용한다. 작가 홍경택의 작품에도 이러한 룰이 적용된다. 그는 내밀한 무의식의 세계를 읽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코드를 배치해 놓고, 거기에 정확하게 계획되어진 서사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놀라운 의식의 세계를, 미술로 재현하는 것이다.
홍경택이 구사하는 아주 특별한 소재들은 마치 존 그리샴의 소설처럼 긴박감 넘치게 전개되면서도 말콤 글래드웰처럼 지혜로 번뜩인다. 이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아이콘화’ 되는 것은, 작가에겐 득일까 아니면 독일까? 대중들이 기억하는 강한 이미지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표식이지만 동시에 미리 규정되는 선입견이기도 하다. 작가 홍경택은 지난 2007년 아트마켓을 뒤흔든 작품 덕분에, 대중들의 뇌리에 각양각색의 분사되는 연필 이미지와 정확하게 이퀄을 이룬다. 사람들은 그를 알록달록한 색으로 컬렉터의 마음을 휘어잡은, 능력 있는 아티스트쯤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홍경택이 구사하는 여러 줄거리와 다양한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각기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멀티 플레이어 아티스트이다.
글 |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팀장 정일주
사진제공 | 홍경택
누구는 홍경택의
<연필>
그림을 제일 높게 치고, 또 누군가는
<훵케스트라>
시리즈를 가장 쿨하다고 평가하지만 작가에게 있어 각각의 시리즈는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그는 최근 낯선 화면의 'POWER, CORRUPTION & LIES'와 'MASTER & SLAVE'를 선보였는데 이 또한 깊이 들어가면
<훵케스트라>
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들로, 팝음악에서 글귀를 따온 것이다. 그리고 그 글귀에 맞는 이미지를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하여 표현했다. 그는 ‘POWER’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단어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는데, “I GOT THE POWER!”라고 외치며 시작하는 한 뮤직비디오의 도입부를 잊히지 않는 시퀀스로 꼽는다. 그처럼 차갑고 에로틱하며, 파괴적이고 충동적인 외침이 작가에겐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요체인 권력이나 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작가 홍경택은 누구도 권력에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권력을 쥔 자가 있으면 억눌린 자가 생겨나고, 모든 관계가 권력관계로 변질되기 쉽다는 점 등에 문제의식을 맞춰 작품을 완성하고 있다.
훵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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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팝아트’를 큰 범주로 재해석한 국립현대미술관 'Popland'전(2010.11.12-2011.2.20)에 그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곡에서 차용한
<레퀴엠 1>
이란 작품도 선보였다. 화면 안에는 근대 대륙탐험에나 쓰였을 법한 범선과 세계대전 당시의 군인, 그리고 시대를 알 수 없는 기계의 이미지들이 뒤엉켜 있다. 또 스피커를 집적해서 만든 배경에서는 여러 가지 부호와 구조물들이 뚫고 나와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레퀴엠>
일종의 전쟁 모뉴먼트를 형상화한 화면은 다양한 잔상을 이끌어 낸다. 작품은 전쟁의 이미지와 유희적 이미지를 함께 병치함으로써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인 폭력성과 전쟁, 그리고 죽음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스팀 펑크와 사이버 펑크 등 영화 혹은 만화에 사로잡히는 작가는,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하며 미래적인 디자인으로 가득 차있는 버추얼 리얼리티를 자신의 작품에 고스란히 대입한다. 그의 작품은 일종에 거대 로봇의 변형인 것이다. 연필, 책, 선인장 등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적인 사물들을 집적하여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고, 화면을 가득 메운 사물들로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공감각적 차원을 넘나드는 그의 그림을 이런 다양한 이론들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연필>
과
<훵케스트라>
시리즈로 일약 스타작가로 발돋움하고도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고 있다. 이처럼 성격이 다른 여러 가지의 작품을 진행하는 것은 작가 스스로의 요구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작업에 대한 왕성한 욕구를 지녔으며, 한 가지 작업을 하다 실증 난 부분들이나 부족한 부분들을 다른 작업을 하면서 채워나가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중심을 잡아 나가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작업이 지나치게 길어질 경우 그 작품의 의미가 어느 사이 휘발되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함을 캐치한 작가에게 변화라는 것은 당연한 전제가 된 것이다. 그에게 변화와 새로운 시도는 부담과 흥분을 동시에 안고 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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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
그는 작품을 만들기 전, 전체적인 줄거리를 짠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그를 ‘스토리텔러’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흥미로운 주제가 정해지면 스토리를 만들어가면서 작업을 진행하는데, 그것은 작업의 몰입을 도우며 전체 작품에게 일관성을 지니게 한다. 그러다 간혹 그는 줄거리와 전혀 연관이 없는 것들을 나열하기도 한다. 지나치게 생경한 어떤 것을 그려 넣는 게 아니라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그 조합의 타당성을 감지할 수 있는 요소를 삽입하는 것이다. 그래야 보는 사람도 뜬금없이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내러티브를 다시 뭉개 버림으로써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홍경택 회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랄 수 있다.
그는 앞으로 오래전에 구상해 놓았던 작업들을 실행할 계획이다.
<심판관들>
(가제)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의 시리즈는 기계들을 추상화 혹은 인격화하는 것이다. 메시아가 기계의 형태로 재림한다는 가정을 바탕에 깔고 묵시론 적인 관점에서 표현해 볼 참이라고. 그는 최종적으로 이 작품들을 선보이는 시점을 2년 후로 잡고, 현재 절대적으로 몰입하고 있다.
심판관들>
작가 홍경택은 1968년 생으로 경원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팝 음악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독특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그는 한국미술계의 대표주자, 스타작가로 꼽히고 있다. 지난 2007년 홍콩 크리스티 아시아 컨템포러리 경매에서 작품
<연필 1>
이 추정가의 열 배가 넘는 7억 7000만원에 낙찰, 유명세를 치렀으며 2008년 5월
<서재 ⅱ>
는 6억 3000만원에 낙찰되었다. 2000년 문예진흥원 인사미술공간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2005년에 네 번째 개인전을 아르코미술관에서 선보이며 작가로서 입지를 확보한 그는 지난해 11월 두산뉴욕갤러리에서 10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강렬한 색감을 통해 팝음악과 같은 대중적 감수성에 볼거리와 현란함이 가미된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서재>
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