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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소녀는 울지 않는다

2008-10-07


10월의 시작과 함께, 당신이 꼭 기억해야 할 두 아티스트의 전시가 시작됐다. 김정욱과 홍인숙. 각각 오랜만의 개인전을 연 두 작가는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아있는 소녀를 그려내고 있다.

에디터 이상현 (shlee@jungle.co.kr)


김정욱展
2008. 10. 02 ~ 2008. 11. 02
갤러리 스케이프 www.skape.co.kr
서울 종로구 가회동 72-1번지
02. 747. 4675


세상을 보여주는 얼굴 (글 박영택)

무척 ‘쎄고’ 좀 으스스한 여자상이 다양하게 도열해있다. 단독으로 혹은 둘, 셋이 모여서 정적과 고독 속에 침잠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것도 있고 측면을 보여주는 얼굴도 있다.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괴기하기도 하지만 또한 귀엽기도 하다. 기존에 익숙하게 보았던 인물과는 무척 다르다. 그 얼굴은 분명 누군가의 얼굴로부터 파생되어 나와 작가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고 변형, 해체 혹은 작의적인 훼손으로 변질(?)된 얼굴이다.

작가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직관에 의해 파악된 그 어떤 느낌을 회임하고 일정한 시간을 기다려 출산하듯 하나의 얼굴을 그렸다. 눈과 입, 눈물과 피, 머리카락만이 부동의 몸에 균열을 일으키며 상처처럼, 아픔처럼 응고되어 있다. 대부분 먹만으로 그려지고 칠해진 화면은 묘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다. 그 어두운 배경, 바탕을 등지고 크고 둥근 얼굴이 달처럼 부풀어오른다. 동공이 사라지고 온통 검게 칠해진 인형을 닮은 커다란 눈, 사라진 눈썹과 귀, 반듯한 가름마, 잘 빗은 머리, 안면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삼켜 버릴듯 증식을 거듭하며 자라는, 숲처럼 무성한 머리카락, 작은 코와 콧구멍, 그만큼 작은 입술과 더러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치아, 퉁퉁한 살을 거느린 몸, 모나리자가 입은 주름이 잡힌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흰 옷이 그 얼굴과 함께 다가온다.

이콘이나 성화의 익숙한 도상이나 불상의 의습이 떠오른다. 관습적인 종교화의 도상을 빌어 기이한 얼굴을 오버랩 시키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프리카나 네팔의 가면 같기도 하다. 단순화시킨 얼굴에 눈만 구멍처럼 뚫려 까만 응시를 전한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먹으로 채워지고 적셔진 눈을 지녔다. 김정욱은 눈을 통해 자신이 보고 읽은, 감지한 인간을 형상화한다. 기술한다. 더러 마스카라 번진 까만 물이 눈물과 함께 흐르고 ‘피눈물’같은 것들도 얼룩처럼 스며들어있다. 인간의 얼굴에서 눈은 감정을 드러내는, 감출 수 없는 치명적 부위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보이는 눈, 그래서 너무 많은 시간과 그 시간의 양만큼 눌린 기억과 상처를 간직한 눈을 본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다. 얼굴이 아니라 눈이 결국 이 인물들의 내면이랄까, 마음과 정신, 굴곡 심한 사연과 주름잡힌 상처의 결들을 찰나적으로 보여주다 멈춰있다. 커다란 눈이 먹을 머금고 침침하다. 보는 이들은 그 눈에서 눈을 뗄수 없다. 강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보는 이를 마냥 빨아들일 것도 같다.

보는 이들은 그 눈에 함몰된다.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깊고 가늠하기 어렵고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구멍이다. 자궁같은 눈, 텅빈 구멍 같은 눈이다. 그림 속 얼굴의 시선을 통해 나는 대상이 되었다. 타자와의 만남은 내가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대상이 되는, ‘시선의 싸움’이다. 바라보는 자는 시선이고, 바라보여지는 자는 눈이다.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부득불 눈이 된다. 하나의 대상으로 자꾸 얼어붙는다. 얼굴 이미지가 주는 강도 못지 않게 나는 수묵과 모필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독자한 그림 안에 조율하는 작가의 힘을 느낀다. 그 힘에서 새롭고 신선한 수묵화의 매력을 환기 받는다. 먹색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고 모필을 유희하는 감촉이 견고하다. 기존의 다소 상투화되거나 습관적인 먹의 쓰임이나 모필의 활용에서 벗어나 수묵이란 재료를 자기가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펼쳐내는 쪽으로 몰고 간다. 여기서 수묵이란 재료는 당대의 삶의 감수성이나 그녀가 보고 읽어낸 얼굴, 그 얼굴로부터 번져나가는 또 다른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쪽으로 환생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우리 조상들이 초상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정신/전신傳神과 만난다. 김정욱은 사람의 얼굴에서 모든 것을 읽어나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전생에 무당이나 심령술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녀의 작업실을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이는 도대체 내 얼굴에서 무엇을 감지하고 읽었을까?”



명랑한 고통 - 홍인숙展
2008. 10. 01 ~ 2008. 10. 13
문화일보갤러리 gallery.munhwa.co.kr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68번지
02. 3701. 5755

살아낸 만큼의 이야기 (글 김최은영)

진짜로 구름모자를 쓰고 다니면 얼마나 좋겠어요. / 의성에서 농사짓는 애자氏 얼굴하고 점점 닮아가요. / 공룡도 아니면서 공룡 같은 불을 뿜고 왔는데 그게 또 왜 그랬을까요. / 일반적인 삶이지만 끈으로 예쁘게 묶으면 좋잖아요. /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 내가, 내 얼굴이 점점 동그래져요 _홍인숙

뻔한 질문에 시詩처럼, 노래처럼 대답하는 사람 홍인숙은 그렇다. 변명이나 설득보다 도리어 하기 힘든 말이 되어버린 ‘미안해요’와 ‘고마워요’ 같은 말들을 입 밖으로 내뱉기 민망한 상황과 상관없이 ‘진짜 그러니까요.’라며 툭! 던지는 사람이다. 자꾸만 주변에서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산다는 홍인숙.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자꾸 만나는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을꺼라고 얘기하는 홍인숙. 그래서 또 그림도 그렇게 그려지는 거라고 말하는 홍인숙은 「점점 동그래지는 얼굴」로 변화의 순간을 맞이한 바로 지금의 자신을 그린다. 달라지는 그 순간, 그 찰나는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이 행복이고 긍정이라면 기꺼이 「명랑한 고통」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홍인숙이다.

그런 그에게 작정과 비슷한 단어인 의도는 없다. 만화적으로 그리려고 의도하고 그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낡은 책에서 발견된 자신의 어린 시절 낙서이미지를 본 따 그리다보니 만화 이미지인 것. 유치한 색으로도 팝pop적인 색으로도 판명되는 알록달록 색들과 정형화된 형태도 자꾸 사람들이 왜 그러하냐 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단청을 보고 자란 덕이 아니겠냐고 말하는 홍인숙을 보며, 나는 사회가 손쉽게 유지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범주와 분류를 떠올린다.
그러나 규격화 해놓은 범주와 분류 사이에 행간이라는 적절한 단어도 남겨두었으니 홍인숙에겐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리지어 놓길 좋아하는 분류 속에 새로운 경우의 수를 만들어주는 작가. 만화든 팝이든, 드로잉이든 판화든, 동양화든 그것은 그냥 홍인숙의 그림이다. 그의 이야기다.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홍인숙의 그림을 볼 땐 사실fact처럼 보이지만 진짜 사실은 행간을 읽어야 알 수 있다. 더구나 읽는 행위에는 그것을 보는 사람의 경험과 가치관이 투사되기 때문에 행간의 의미는 한층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홍인숙의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홍인숙의 작업을 통해 향유자는 자신의 과거와 경험치를 조형적 요소를 통해 새롭게 구성하게 되는 것. 따라서 홍인숙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개인사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가치에 대한 접근법을 그만의 예술적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개인의 이야기와 사회의 이야기가 굳이 나뉘지 않는 것. 아니 개인의 이야기가 결국 사회의 이야기인 동시에 역사가 되는 것. 그곳엔 사실의 기록이라는 방식만이 존재하는 듯 하지만 종종 말로 다하지 못하는 것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버려진 것과 남겨진 것에 대해 가혹한 구별을 한다. 그것이 때로는 타당한 사적(史的)의미를 품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작은 가치에 대한 무심함으로도 읽힌다. 유물, 골동품, 흔한 물건들 따위로 쉽게 분류될 수 없는 작은 가치들은 홍인숙 자신의 눈을 통해 재발견되며, 우리는 그 가치들이 개개인의 추억들을 담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의 작업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러한 가치의 맥락은 작가본의에 의해 작품으로 표현되며, 보는 이들은 그녀의 작품과 소통함으로써 그러한 가치들의 형상들을 일종의 코드로 공유하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녀는 흔히 볼 수 있는 작가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획일적인 열정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그러한 형식적 틀을 벗어 버리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보여주며, 그 덕에 우리는 거대한 성역처럼 여겨지던 예술의 답답한 틀 대신 즐거운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시작과 같은 말로 마무리를 하려 한다. 그가 살아냈을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홍인숙이 제공할 즐거운 확장의 경험을 기꺼이 기다리겠노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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