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6-02
미술과 연극 혹은 공연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통해 전시 형식을 구성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은 근대 연극의 전통에서 순수미술 작가들이 무대미술 형식을 빌려 삶의 낮선 풍경들을 간간히 재현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연예술이 순수미술의 장점을 취한다는 것은 예술 장르간의 차이를 넘어 예술적 내용을 직조하는 다양한 시간의 구조를 그 자체의 차별성을 지닌 장르로 승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것이다.
글_정용도•미술비평
스페이스C 미술관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기획전 ‘이미지 극장’이 시사하는 중요한 게임의 법칙은 순수미술 중에서도 동영상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미디어아트의 기술적 환영 공간을 관객과 교류하는 통로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관객은 작품을 감상할 때 물질적으로 제시되는 기계적 장치보다 의미가 부유하는 주변 공간과 작품이 발산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분위기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여 작품들의 비물질적 구조가 우리의 경험에 물질적인 충족감을 줄 수 없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되겠지만, 비물질적 상황으로 인해 관객은 경험적인 공간의 부재를 겪게 되고 비가시적 혹은 비구조적 의미생성의 환경으로 공간 해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연예술의 무대는 배우가 존재하지 않으면 무대로 완성될 수 없고, 관객은 배우와 정서적으로 교류하지 못하면 의미를 체험할 수 없다. 의미가 부유하고 있는 공간은 경험의 질적인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또한 공간에 대한 경험의 부재는 삶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정밀한 판단을 유보시킨다. 이것은 공적인 공간이나 사적인 공간 모두에 해당되는 것으로, 피상적인 체험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을 통해 완성되는 의미의 가상적인 성취를 방해할 뿐이다. 하지만 질적인 경험의 부재는 개념의 확장을 통해 보충될 수 있다. 예술작품의 존재성이 단순히 의미의 부재를 통해 조형적으로만 완성되고 제시된다면, 예술과 삶의 경계는 무의미의 차원으로 추락하게 된다.
경험의 공간적 완성과 공간의 경험적 의미충족이 중요한 까닭은 ‘이미지 극장’ 전의 출품작들이 단순히 순수미술 작품으로서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전시 기획의도가 일종의 공연예술과 미술작품의 콘체르토로써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공간은 토론과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되는 장을 형성해줄 필요가 있다. 이는 민주주의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 나아가는 것처럼, 예술작품 역시 애초의 기획과 의도의 특성에 따른 미학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지 극장’의 공적인 특성은 동시에 내적이고 외적인 복잡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디어아트 작품을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설치작품들은 물질적인 적극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가상적인 공간에 흡수되는 관객의 심리적 참여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가상적인 상황의 개입은 공적인 공간이 갖추어야만 할 사회성의 차원을 심각하게 약화시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적인 공간의 주제는 가상성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상성의 어떤 의미가 공적인 공간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해봄으로써 해체된 공간이 어떻게 삶과 예술의 특수성을 일반화시켜줄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공간은 ‘우리가 공간 안에 거주한다’고 하는 장소로서 특성으로 정의되고, 좀더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는 공간의 존재성을 인식해가는 과정은 우리 스스로의 삶을 성장시켜 나아가는 과정에 비교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해체된 공간은 경험의 해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경험의 질적인 속성상 해체 불가능하다. 즉 경험 자체에 대한 해체는 불가능하지만, 경험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해체를 이야기할 수는 있다.
말하자면 사물과 환경이 경험되는 방식이 지극히 분화되어 삶의 중심을 통해 하나의 총체적인 특성으로 승화되는 것이 아니라, 분화 자체가 우리 삶의 내용이 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미지 극장’ 전에서는 공간의 부재가 직접적으로 야기되지는 않지만, 미술관 공간에 무대가 세워진 것과 순수미술 작가들에 의해 무대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면에서 본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 자체로 인해 야기되는 공간성의 부재를 논할 수 있다.
공간성의 부재를 극복하는 방법은 신체의 직접성이다. 미디어아트에서 인간의 신체는 물질적으로 생략된 - 주로 시각화되는 - 정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정보들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을 갖게 된다. 그리고 감각은 미디어아트의 주요한 특성인 가상현실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과의 관계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신체의 역할은 오히려 감소되고, 전혀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곧 신체의 존재와 부재가 공존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런 상황들은 예술 매체에 마치 경험을 넘어서는 선험적 차원이 존재하는 듯한 신비주의적 시각을 갖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런 신비주의적인 특성들을 민감하게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매체가 지니는 기계적 특성과 기술적 특성을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매체의 기계적 특성은 개별 대상에 대한 지각을 요구하지만, 기술적인 특성은 동시에 발생하는 다양한 지각 표상들의 수용을 요구하고, 또 신체는 그런 양태들을 공감각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체의 직접성이 부재하는 것을 경험한다. 촉각적으로 감각할 수 없는 것들을 신체는 부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재는 존재를 전제한다. 인간이라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성은 사물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활용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감상을 통해 정신적인 역량을 확대시키고, 그리하여 삶의 질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 예술작품에 대한 전통적 입장의 미학적 정의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디어아트에서는 가상현실을 몸의 행동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경계를 확장시켜주는 것으로 간주한다.
즉 몸은 경험이 된다. 기술은 몸을 통해 해체되고 다시 종합된다. 그러나 여기서 종합은 부재를 일상화 한 종합이고, 기술은 부재를 본래의 부정적인 의미에서 다른 차원으로 전이시킨다. ‘이미지 극장’ 전에서 발생하는 다른 차원은 관객의 뇌를 자극하는 상상적 애니메이션의 차원이다. 자기분열적 상황이 극단화되면서 수평•수직적 관계가 발생하는 일상적 경험의 세계가 아니라, 의미가 다양하게 편재함으로써 공감각적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신체는 부재하지만 부재할 수 없다. 기존 질서와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형과 왜곡을 통해 새로운 장소성과 시간적 특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통해 발생하는 그러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은 현상의 보편화는 경험적 대상의 혹은 물질적 오브제의 부재로 인해 나타나지만, 그 같은 상황에 대한 경험은 아주 구체적이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몸 자체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재하는 신체는 매체로 전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 극장’ 전의 부재의 양상은 우선 전통적으로 공연예술(연극)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배우, 관객, 무대 중에서 배우가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배우만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역시 연극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중간적인 부재상태로 말할 수 있고, 무대는 배우가 공연하지 않는 무대라는 면에서 완성될 수 없는 부재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부재는 무대를 제작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보완된다. 그리고 동영상이 중심이 되어 제시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에 의해 적극적인 현전의 형식으로 완성된다.
미디어아트는 물질성의 부재로 인해 영화적인 특성에서도 벗어난다. 영화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는 심상들을 자극함으로써 완성된다. 즉 이야기 전개에서 관객의 물질에 대한 과거의 경험들이 기억으로 되살아남으로써 삶의 특수성과 연결되어 점점 경험의 기능적 확장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반복이고 환영적인 재현으로써 영화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락적인 효과와 관련된다. 영화는 관객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속에 가두어 놓는다. 그리고 관객은 고정된 위치를 자발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적극적인 참여의 부재를 합리화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을 꺼낼 준비를 한다. 이것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의 부재이다. 정적인 상황에서는 기억 속의 지식들을 꺼내어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참여를 통해 미래의 행동을 상상한다거나 새로운 행위들의 정당성을 찾아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즉 시선의 집중을 통해 개념간의 교류와 비판을 생산할 수는 있지만, 행위의 활동성에서 비롯되는 삶의 실천성을 결여하는 것이다. 확장과 반복은 현대미술은 물론 현대 소비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문화가 물화된다는 것은 이미 문화가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결론을 가능하게 한다. 문화는 우리 삶의 일부로써 생명성을 가지고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문화라 불리는 것들은 그런 생명성을 더이상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위적이라고 하지만 전위적이기보다는 상업적인 목적을 숨기고 있으면서 문화를 가장하기 때문에 폄하되고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가 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락성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면에서 영화는 현대문화의 비이성적 통속성을 함의하고 있다.
시선은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이자 적극적인 의미부여의 행위이지만 정감적인 전이 상태의 경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같은 모방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또 다른 범주이다. 범주적 차별성은 단순한 대안이 아니다. 대안은 기존의 질서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교체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대안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범주의 변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선과 정감적인 전이간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앞에서 이야기한 시선은 비판적인 응시이고, 정감적인 전이는 신체와 관련된 감각의(sensory) 행위이고 과정적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의 특성은 작품이 일방적인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감각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경험의 질적인 특수성을 전달하고 반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 극장’은 정감적인 전이 상황을 유발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은유적인 상황 제시를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감상과 느낌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영상 이미지의 역동적 상황 창조의 과정에 관객이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관객의 신체가 인터페이스로 작용하도록 하는 상황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 뉴미디어아트에서 시간과 공간은 더이상 분리된 개념이나 서로에게 냉정한 타자가 아닌, 우리 삶의 실제성과 관련되어 드러나는 신체적 본질의 내용이다. 사이보그는 타자로서 존재하는 기술적 완벽성의 표상이 아니라 미디어아트를 경험하는 우리 몸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은 동영상 미디어아트가 시도하는 지각의 자동화 혹은 주체의 예술작품화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외적 지능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의 완결성을 통해 추출되는 의식의 정의 기능을 넘어서는 존재의 또 다른 특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사이보그는 우리 자신이고 또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이런 인식의 기반에서 보면, 삶을 스스로 작용하게 만들고 신체적 기억이 활동하는 무의식의 초현실적 특성들로 인해 가능한 새로운 의식의 전이과정과 끊임없이 지속되는 변화의 상황이 우리를 21세기 뉴미디어의 삶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미지 극장’ 전의 특성은 예술작품이 작동하는 상황에 기술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었고, 그런 자율성이 의도하는 바는 새로운 예술작품이 가질 수 있는 통로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품간의 경계와 공간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다. 사이보그적인 적극성보다는 작품의 구성에 안주함으로써 동영상 화면과 정지화면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의 실제성을 활성화시키는 부재에 대한 인식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오늘날의 현대미술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한계이다. 스펙터클에 의존하면서 한편으로는 경험의 상대성을 소외시키게 되는 과정으로 드러나는 정감적인 전이 상황의 부재이다. 정감적인 전이는 흐름을 활성화시킨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작품과 관객이 신체적으로 교류하는 것이고, 삶의 모습은 이미 작품의 속성에 구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체적인 상황은 지각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정감의 상태이다.
통합적인 정감의 상태는 전이를 통해 편재하고, 공간과 공간, 매크로와 마이크로의 세계는 무의식의 컨텐츠로 통합된다. 신체의 부재는 무의식의 실제성을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하고, 해체된 공간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경험의 해체는 신체의 부재를 존재의 상황으로 제시하고, 예술작품과 예술작품, 예술작품과 관객, 관객과 문화 사이의 정감적인 전이를 활성화시키는 촉매가 된다. ‘이미지 극장’ 전은 현대미술에서 운동과 시간, 무의식과 신체, 기억과 역사의 현상학적 흐름의 예술에 대한 구속력을 제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