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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악마적이고 사랑스러운 우주의 기원을 찾아서

기예르모 델 토로, 마크 스콧 지크리 | 2015-09-03


예언대로라면 이미 수년 전 멸종되었어야 할 종이책이 기어코 죽지 않는 것은 대체 불가능한 아날로그적 물성 까닭이다. 커버를 만지고, 책장을 넘기고, 공간을 느끼는 기쁨.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에는 이 같은 촉각적 즐거움이 있다. 에폭시로 나뭇결을 살린 하드커버 텍스처에서는 산과 들을 관장하는 목신(牧神) ‘판(Pan)’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유광 아트지를 실로 엮은 변형 국배판의 묵직함은 어릴 적 갖고 놀던 올 컬러 백과사전을 연상시킨다. 고대의 비의를 감춘 보관함 같은 양장 제본. 〈헬 보이〉 시리즈, 〈판의 미로〉, 〈퍼시픽 림〉의 판타지 세계를 ‘디자인’한 영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외관이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자료제공 | 중앙북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의 원제는 〈Guillermo Del Toro, Cabinet of Curiousities〉다. 우리말로는 ‘호기심의 방’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Cabinet of Curiousities’는 ‘쿤스트캄머(Kunstkammer)’ 혹은 ‘분더캄머(Wunderkammer)’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분더캄머’는 르네상스 시대 귀족들 사이에 유행했던 백과사전적 진열실을 지칭한다. 대항해 시대의 새로운 세계관에 매료된 이들의 ‘분더캄머’는 중국 도자기 같은 이국적 공예품부터 샴 쌍둥이 고양이, 용의 알, 인어의 머리 같은 기묘하고 괴이한 컬렉션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는 그의 자랑스러운 현대판 ‘분더캄머’, 찰스 디킨스의 소설 제목에서 이름을 따온 ‘블리크 하우스’에서 출발한다. ‘블리크 하우스’는 기예르모가 사랑해 마지 않는 회화, 일러스트, 조각상, 밀랍 인형, 피규어, 분장 소품, 소설과 만화책 컬렉션이 우글거리는 판타지 소굴이다. 무려 550점에 달하는 컬렉션에 점령 당한 두 채의 단독주택은 단순한 과시용 쇼룸을 능가한다. ‘블리크 하우스’는 기예르모의 안식처이자 작업실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기예르모 델 토로는 크리처, 코스튬, 토템, 공간과 색채 등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비주얼 요소를 직접 디자인하는 감독이다. 그 지독한 정교성과 무성한 창조력은 어디서 샘솟는 것일까? ‘천재’라는 피상적 수식어로 그를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수법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는 기예르모 델 토로라는 거장의 판타지 왕국이 잉태된 고향, 그 고상하고도 이상야릇한 영감의 화수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예닐곱 살에 불과했던 유년기에 이미 별스러운 취향을 계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가족 건강의학 백과사전〉에서 탐구한 해부학적 지식, 한 질의 〈미술 감상법〉을 통해 만난 위대한 예술, 공포·스릴러·오컬트 장르 문화에서 얻은 상상력으로 독자적인 우주를 건설한다. 가족들에게 자체 제작 호러 그림책을 강매(?)하고, 인체 모형 만들기에 탐닉하던 되바라진 소년은 자신의 길을 일찌감치 발견했다. 고급예술과 B급 대중문화의 경계를 널뛰며 흡수한 비전을 한 데 반죽할 수 있는 그릇, 종합 예술로서의 영화는 기예르모에게 꼭 맞는 장르였던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의 가장 큰 재미는 뭐니 뭐니 해도 기예르모가 반 평생 동안 써 온 아이디어 노트 실사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드로잉은 기예르모에게 최고(最古)의 습관이자 최고(最高)의 표현 수단이다. 그는 사진을 촬영하는 대신 스케치를 남기고, 드로잉 주변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글을 쓴다. 놀랍게도 그는 연쇄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구상하지 않는다. 한 페이지에도 이미 제작됐거나 제작될 영화들에 대한 구상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오르며, 이미지를 빼곡하게 둘러싼 텍스트에는 일관성이 없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 노트를 가끔씩 들춰 보고 필요한 내용을 찾아 쓰는 ‘카달로그’에 빗댄다. 그는 산발적인 아이디어들로 저글링을 해대며 5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진행하는 ‘멀티 태스커’다.

알코올 마커로 쓱쓱 그린 원형 스케치는 실제 캐릭터와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인다. 심지어 〈헬보이 1〉에 등장하는 몬스터 ‘사마엘’은 관절의 메커니즘까지 해부학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그는 스토리에 맞게 캐릭터를 창안하는 대신, 그의 상상 속에 이미 존재하는 생물체를 영화적 세계에 구현하는 듯하다. 악취를 풍기는 촉수 괴물들, 양서류와 곤충의 혐오스러운 외형을 닮은 크리처들은 고유한 개별성을 지닌다. 인간의 잔인성, 욕망, 공포를 자극하는 악당들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공감과 연민을 자아낸다.

기예르모가 특별히 페이지를 할애한 상징주의 미술 사조에 대한 노트는 그의 예술관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펠리시앙 롭스, 아르놀트 뵈클린, 오딜로 르동의 작품이 품고 있는 에로틱하고 음습한 분위기, 초자연적이고 이교적인 세계관은 기예르모 영화의 주된 모티프로 자리 잡았다.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그의 영화적 세계는 현실적이라기보다 도상학(iconography)적이다. 그의 영화에서는 각각의 색채마저도 은유로 사용된다. 복수를 상징하는 빨강, 어린 시절을 의미하는 흰색과 황금색, 비밀스러운 지하의 청록색. 독학으로 완성한 기예르모의 색채론은 때로는 절제로, 충돌로, 과잉된 향연으로 나타난다.

“나는 여덟 편의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모든 영화로 구성된 단 한편의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 중입니다. 내게 그 한 편의 영화는 블리크 하우스와도 같아요. 나는 하나씩 하나씩 방을 만들어나가고 있으니, 관객은 그 집을 한눈에 전체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기예르모가 직접 쓴 글과 공동 저자 마크 스콧 지크리의 글, 기예르모와 마크의 인터뷰, 지인들의 헌정 글 등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는 실로 영감의 ‘분더캄머’라 할 만하다. 기예르모는 〈블레이드 2〉, 〈헬보이〉, 〈판의 미로〉, 〈퍼시픽 림〉 등 자신이 제작한 8편의 창작 과정뿐만 아니라, 폐기된 아이디어와 앞으로 실현될 아이디어들까지도 가감 없이 공개한다.

이제 기예르모는 아이디어 노트를 딸들에게 물려줄 생각으로 정성스레 꾸미고 있다고 한다. 아직 어린 두 딸은 요괴와 시체가 난무하는 엽기 낙서장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가 창조한 악마적이고 사랑스러운 우주의 매력에 빠진 독자라면 그 가치를 알아볼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가 진귀한 기록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아쉬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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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예술 #기예르모델토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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