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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캘리그라피를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

이상현 | 2015-06-05


90년대만 해도 서예는 교양 축에 끼는 활동이었다. 서예교습소가 흔했고, 미술 시간에는 붓과 먹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이런 유구한 전통조차 ‘사이버’와 ‘디지털’을 부르짖는 밀레니엄의 조류 앞에서는 유물로 전락하는 듯했다. 속수무책 사양길로 접어들던 서예가 다시금 빛을 본 기점은 2000년대 중반, 서예와 디자인의 앙상블이 ‘캘리그라피’라는 아날로그적 반동을 빚어내면서부터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자료제공 | 미진사
 

그 어원을 희랍어에 두고 있는 캘리그라피를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손글씨’, 즉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핸드레터링이라 하겠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광고, 로고, 출판, 포스터, 패키지 디자인 등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작업 방식이지만 이 같은 전성시대가 제 발로 찾아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는 지난 1999년 설립된 캘리그라피 전문회사 ‘필묵(筆墨)’을 시작으로 국내 1세대 캘리그라퍼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상현의 캘리그라피 교실>를 저술한 이상현 작가 역시 캘리그라피의 대중화를 선구한 1세대에 속한다.

필묵을 처음 접한 유년기 이래 외길을 걸어온 그에게 서예 중흥의 열망은 전향의 계기가 됐다.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 한국적 캘리그라피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서예 또한 대중화하겠다는 포부는 야심 찼다. 캘리그라피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디자인계에 붓을 들고 뛰어든 지 16년 차에 접어든 지금, 이상현은 캘리그라퍼, 서예가, 교육자, 퍼포먼스 아티스트 등의 타이틀을 쥐고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이번에는 저자로 변신한 그가 <이상현의 캘리그라피 교실>을 출간했다. <이상현의 캘리그라피 교실>은 입문자를 대상으로 캘리그라피의 기초를 알기 쉽게 풀어쓴 가이드북이다. 캘리그라피의 개념에서 출발해 문방사우의 선택과 관리, 붓 잡는 법, 획 긋는 법, 글자 연습, 단어와 문장 연출하기, 일러스트 기법 익히기, 영문과 한자 쓰기 등으로 확장되는 구성은 정도(正道)에 충실하다.

일견 초보적인 수준 같은 그의 기본기에는 뚝심 있게 축적해 온 내공이 실려 있다. 수세미, 풀뿌리, 스포이트 등 소재를 응용하는 노하우와 붓을 놀리는 운필(運筆) 솜씨도 볼만하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한글 조형을 이해하는 심도다.

알파벳에 최적화된 캘리그라피 기법을 한글에 적용하는 데는 애로사항이 적지 않다. 훈민정음은 세로쓰기를 토대로 창제되어 가로 타입 시각화가 원만하지 않고, 초·중·종성의 신축적인 결합이 자칫하면 가독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에 한글 조형에 걸맞은 전략이 요구되는 바, 이상현은 동양 고유의 모필 예술을 근간으로 캘리그라피에 접근한다. 저자는 고체(古體) 쓰기를 통해 한글의 공간 구성 및 무게 중심을 익히고, 기초 조형과 배열에 대한 파악을 지지대 삼아 캘리그라피로 나아가게끔 독자를 이끈다. 이는 고전적인 서예 지도법의 저력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 밖에도 <이상현의 캘리그라피 교실>에는 저자가 작업한 상업용 캘리그라피 시안이 B컷과 함께 수록됐다. 영화 <타짜>와 드라마 <해를 품은 달> 타이틀, ‘교촌치킨’과 ‘삼립호빵’ BI를 비롯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로고타이프들이 펼쳐지며 작업 과정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캘리그라퍼로 활동하며 들어온 질문들에 대한 답을 인터뷰 형식으로 제공하고, 써볼만한 예시 글귀들을 실은 ‘캘리그라피 연습노트’를 부록으로 별첨하여 한 세트를 실하게 구성했다.

<이상현의 캘리그라피 교실>은 기본을 닦고자 하는 캘리그라피 입문자에게 안성맞춤인 책이다. 쉽게 쓰였을 뿐 아니라 상당한 양의 도판이 수록돼 후루룩 읽히지만, 글만으로는 배움에 한계가 있는 법. 저자는 끊임없는 실습과 훈련을 통해 감각을 체득하고, 나아가 글씨에 ‘마음’을 담으라고 조언한다. 같은 단어라도 어떤 감성을 새기느냐에 따라 형태와 질감, 소리, 향기, 맛을 달리 연출할 수 있기 때문. 이는 이상현이 캘리그라퍼를 ‘붓을 잡은 연기자’라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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