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경 | 2012-08-20
예술은 멀리 있다?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예술’은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는 하나의 ‘교양’이고, 이해하기 어렵다면 굳이 애써 알려고 할 필요가 없는 대상일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예술은 대중과 멀지도, 어렵지도 않았다. 중세시대 성당의 조각과 제단의 그림들은 문자를 모르는 농민들을 위한 장치였고, 르네상스 미술은 종교라는 주문자를 소비되었다는 사실을 들추어본다면 말이다. 비록 지금은 소수를 위한 신비주의 전략으로 미술관 안에 갇혀있다지만, 예술은 언제나 소비자들을 위해 제작되었다. 이런 예술의 본질은 바쁜 현대인들이라 하더라고 자신의 놀거리로써 ‘예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술은 미술관, 캔버스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집안의 가구, 액자, 그릇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그 예술적 욕구는 발아할 수 있을테니까.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이봄
「real 영국은 주말에 오픈한다」는 예술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으로 영국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음 한 켠 공허함을 지닌 현대인들에게 예술이 든든한 친구가 될 수 있다며, 영국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을 하나, 둘 오픈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 소수의 미술가들이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작업실을 개방한 것에서 출발한 영국의 오픈 스튜디오는 1990년대부터는 점차 작가들 사이에서 창작활동의 연장선으로 인식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아트 트레일'(Art Trail) 또는 '아트 위크'(Art Week)라고 불리기도 하며, 현재 런던과 같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까지 영국 어디서나 오픈 스튜디오를 찾아볼 수 있다.
오픈 스튜디오는 쉽게 말하면 해당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작업실이나 집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공개는 주로 주말에 이뤄지며,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의 작업실을 개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한 공간에 여러 작가들이 함께 모여 작업을 보여주기도 한다.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시민들에게는 회화, 조각, 판화, 사진, 영상, 설치, 도자, 유리, 자수, 가구, 일러스트, 그래픽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시각예술을 쉽고 자연스러운 장(場)이 마련되는 셈이다. 작가들은 또한 일반인들이 작품 제작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워크숍을 개최하며, 더욱 친근하게 다가서는 예술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지역 소재 박물관이나 갤러리들은 오픈 스튜디오 참여 작가들의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를 한다거나, 오픈 스튜디오 일정에 맞춰 특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하는 등 예술을 즐기는 재미를 더해준다.
오픈 스튜디오는 작가와 일반 대중들 둘 다에게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라는 의미도 가진다.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잇는 기회이고, 대중들에게는 미술관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작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처럼 ‘만남’이라는 교류를 통하다 보니 지역 예술과 작가들에 대한 특별한 감성이 더해지며, 예술로 인해 지역사회에 대한 신선하고 긍정적인 인식이 심어지게 되는 것도 오픈 스튜디오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이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오픈 스튜디오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쉽게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우리 주변에도 지역 예술은 살아있다. 그리고 「real 영국은 주말에 오픈한다」에서 소개하는 10곳의 오픈 스튜디오를 살펴보다 보면, 일상 속에서 예술을 즐기며 더욱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물론 영국을 여행하는 이들에게는 그곳의 예술을 즐기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Jungle : ‘문화 컨설턴트’라고 불리는데, 어떤 직업인지요.
제가 하고 있는 일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명명한 이름입니다. ‘문화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현재 어떤 특정한 직업군에 포함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문화예술에 대해 접근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런지요. 제가 관심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각예술이지만, 시각예술이 소통되고 활용되는 도시와 공간,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 그리고 창작과정과 결과물이 유통되는 정보망 등. 워낙 제가 하려는 분야가 광범위하다 보니 단순히 ‘아트 컨설턴트’라는 말로는 제 일이 설명이 힘들 것 같더라고요.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아트 컨설턴트의 이미지가 미술작품을 판매하는 딜러와 많이 중첩되잖아요. 오해의 소지도 있고 해서, 문화 컨설턴트라는 직업 이름을 지어내는 것까지 제가 해버렸네요.
Jungle : 오픈 스튜디오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큐레이터로 살아가는 것에 심신이 지쳐있던 중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선물이자 기회라는 생각으로 뒤늦게 런던으로 유학을 갔어요. 마침 예전에 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문화 컨텐츠’에 관심이 많았던 차라, 전공은 미술사가 아닌 문화산업으로 선택했죠. 그렇게 시작된 유학생활이 그리 만만치는 않더라고요. 빡빡한 일정 속에 제 생활은 이전에 그리던 ‘런더너’의 모습이 아닌 학교와 기숙사를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 그 자체였죠. 기숙사에서 나와 잠시나마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잠시나마 바람 쐬는 일이 유일한 휴식이자 운동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제가 있던 지역에 오픈 스튜디오라는 것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살던 동네가 조금은 음산하기도, 무섭기도 한 분위기였는데, 이곳에도 예술가들이 살고 있고, 오픈 스튜디오도 열린다니 제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죠.
처음 오픈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는 그냥 단순한 이벤트인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런던에서만 열리는 것도 아니었고, 영국에서는 오픈 스튜디오가 곳곳에서 다채로운 형태와 내용으로 열리고 있었죠. 그 역사도 40여년이나 되었고요.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영국의 시각예술이 추구하는 다양성에 대해서도 점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방문했던 오픈 스튜디오를 나중에는 기차와 비행기까지 타고 찾아 다니는 예술 탐험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한마디로 오픈 스튜디오 세계의 푹 빠져들었습니다.
Jungle : 영국에서 오픈 스튜디오가 주목 받는 현상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가장 큰 이유는 문화예술활동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미술가들의 고민이겠죠. 예술작품을 만드는 작가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작업을 중단할 수는 없죠. 실제로 제가 영국에서 만난 한 세라믹 작가는 이제 더 이상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하기가 힘들다고 하더군요. 갤러리에서 가져가는 작품 판매에 따른 수수료가 점점 올라, 전시회를 통해 작품이 팔려도 미술가에게 돌아오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거죠.
실제로 작가들에게 오픈 스튜디오는 그 동안 본인이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는 계기이자 대중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창구가 되고 있어요. 또한 작가 본인이 직접 작품의 고객을 관리하고 잠재 고객까지 개발하면서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으며, 아울러 다른 미술가들의 작업을 살펴보고 그들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스스로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역의 예술가 및 지역민들과 소통하며 연대하는 커뮤니티 장소로 작업실을 활용하고 있는 거죠. 이것은 예술가의 이력관리와도 연결되는데,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어떤 이는 아마추어에서 전업 작가로 전향하거나 단절되었던 미술가로서의 경력을 다시 시작하기도 하고, 큐레이터와 같은 미술관계자와의 만남을 통해 전시회나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모색되기도 해요.
이처럼 작업실을 기반으로 한 작가들의 활동이 달라지는 것과 함께, 대중의 문화예술향유의 변화된 태도도 오픈 스튜디오가 주목 받는 이유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이제 미술가의 작업실을 박물관으로 개조된 이후에나 찾아갈 수 있는 외딴 공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미술가를 만나고 그들의 작품에 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장소로 여기고 있거든요. 이것은 곧 적극적 미술향유로 이어지는데, 오픈 스튜디오 기간 동안 대중은 다양한 종류의 시각예술을 가까이에서 즐길 수 있고, 작가에게 궁금한 점을 직접 물어보고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취향과 안목에 맞는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구입할 수 있으며, 비록 지금 당장 구입하지는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미술가를 기억하고 그 작가의 작업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고요.
Jungle : 오픈 스튜디오가 예술계나 지역사회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지역민의 경우 오픈 스튜디오를 찾아 다니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들의 지역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은 같은 동네 사는 미술가들의 집이나 작업실을 단순히 구경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지역공동체에 대한 감수성으로 발전할 수 있어요. 이러한 지역들은 미술가의 작업실을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서 활용할 수 있는데, 실제로 영국의 오픈 스튜디오 중 다수가 지역 축제와 연계되어 해당 지역의 다양한 커뮤니티가 참여하는 문화예술활동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죠. 또한 몇몇 오픈 스튜디오 프로그램은 관광과 결합한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운영되고 있어 미술가들의 작품 판매를 통한 경제적 이익에 더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고요. 이렇듯 오픈 스튜디오가 문화예술의 생산, 소비, 유통, 향유의 기회를 증가시킬 수 있는 매개자일 뿐만 아니라 ‘살고 싶은 동네’에 대한 인식을 통해 도시재생을 위한 문화자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예술계와 지역사회에 미치는 커다란 파급 효과라고 할 수 있죠.
Jungle : 오픈 스튜디오가 우리나라 예술 환경에도 적합할까요?
제가 영국에서 계속해서 고민했던 질문이기도 한데. 사실 영국과 우리나라는 오픈 스튜디오를 할 수 있는 환경 면에서 많이 다르기는 해요. 우선 가장 큰 차이는 ‘주소 찾기’의 문제죠. 영국은 워낙 도로 및 주소 정비가 잘 되어 있어, 길 이름과 번지수가 정확히 나와 있는 지도만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나라 실정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물론 ‘도로명주소’ 표기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번에 의존해서 찾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죠. 그래도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어 한국에서 어디를 찾아가는 일이 예전보다는 많이 수월해졌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로는 ‘접객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국에서는 하우스 파티나 티타임을 가지는 것이 워낙 생활화 되어 있다 보니, 오픈 스튜디오에 가면 작가들이 낯선 이에게도 환영의 멘트와 접대를 소홀히 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한테 말 붙이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미술창작 스튜디오’나 ‘예술 공장’ 등과 같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오픈 스튜디오를 접할 수 있는데, 실제로 우리나라 오픈 스튜디오에 가보면 작가님들이 굉장히 수줍어하세요. 때로는 너무 ‘쿨’하다 싶을 정도로 작업실에 들른 이에게 눈길조차 안 주고 본인 일에만 집중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아마도 작가들이 오픈 스튜디오를 또 하나의 ‘일’이자 의례적인 ‘행사’로 여기고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다 보니 작가는 물론 관람객에게도 재미는커녕 감동도 얻기 힘든, 그냥 단순한 행사와 구경거리로 여겨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Jungle : 일상의 삶에서의 예술, 영국의 환경과 우리의 환경은 어떻게 다른가요
영국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구입하고 소장하는 일에 적극적이에요. 작가의 창작물에 비용을 지불하는 일에 아까워하지 않죠. 물론 누구나 미술작품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고가의 미술품만이 예술작품은 아니잖아요. 예술작품이란 게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만든 엽서일 수도 있고, 작은 판화일 수도 있고, 컵일 수도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장식을 위해서건 실생활에서의 사용을 위해서건, 자신의 안목과 취향으로 작품을 선택하고 구입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오픈 스튜디오나 아트 페어에 가보면 작품을 대충 구경하는 사람들보다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오랫동안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꼭 미술관계자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영국의 예술가들이 정말 부지런하고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작가의 본분인 창작활동은 물론, 작품을 대중들과 만나게 할 수 있는 방법과 기회를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더라고요. 각종 전시회와 페어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것은 물론 미술 강좌와 워크숍 같은 교육활동을 대상별로 세분화해서 진행하기도 하고, 학교나 교회와 같은 지역 내 다른 커뮤니티들과의 협업에도 매우 적극적인 모습이었어요.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매개로 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일과, 그리고 그러한 기회를 경제적 활동과도 연결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어요. 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감나무를 흔드는 동시에 다른 종류의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새로운 열매의 수확을 기다린다고나 할까요?
Jungle : 마지막으로 오픈 스튜디오를 경험하면서 느꼈던 점과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제가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경험한 것은 작업실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비밀스럽고 성스러웠던, 작가 본인과 그와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폐쇄된 사적 공간이었던 미술가의 작업실이 열린 공간으로서 살아있는 미술가와 그의 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공적 장소로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거죠.
하지만 오픈 스튜디오가 작가들만이 만드는 ‘그들만의 리그’는 아니라는 점을 꼭 말씀 드리고 싶어요. 오픈 스튜디오를 완성하는 것은 오픈 스튜디오를 찾아가 즐기는 사람들이고, 오픈 스튜디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술작품을 통한 소통과 공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더욱 재미있는 형태와 내용으로 열리게 될 오픈 스튜디오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면, 독자 여러분들도 팍팍한 일상과 지루해 보이는 동네를 나만의 신나고 재미있는 숨겨놓은 놀이터로 분명히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마치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아무쪼록 저의 영국에서의 오픈 스튜디오 모험과 작가들의 열린 작업실에서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기록한 「real 영국은 주말에 오픈한다」가 미술가의 작업실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와 변화를 조명하고 오픈 스튜디오를 매개로 하여 지속 가능한 예술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다각도로 펼칠 수 있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찾아보는 출발점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