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25
사람이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이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도 ‘어머니’이다. 세상의 안식처이면서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 항상 내 편이 되어 주고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 나의 어머니, 이 땅의 어머니들이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수식어와 찬사는 이제 진부한 표현이 되었고 추상적인 껍데기 같은 말이 되어 버렸다. 눈부신 성장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한 세월 속에서 앞만 보고 달음질쳐 온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미덕과 소중한 정신은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었고 전력 질주를 위해 잠시 옆으로 비켜 놓아야 할 방해물일 뿐이다. ‘어머니’라는 이름도 그 짐 속에 마구 섞여 질주하는 라인 밖에 나뒹굴게 되었다.
윤주영의
<어머니>
전(2007.11.8~29/포스코미술관)은 헷갈릴 수도 놓칠 수도 없는 하나의 분명하고 또렷한 주제를 보여 준다. 어머니, 올 해 여든을 맞이한 사진가의 손이 우리의 행로 한 켠에 버려진 짐을 풀어헤쳐, 헤지고 닳아 버린 어머니라는 낡은 이름을 끄집어내 우리 앞에 바로 세우고 있다.
글 김성용 기자
어머니>
시대 정신의 기록
1980년부터 사진 작업을 해 온 윤주영에게 이전의 화려한 경력은 그가 사진가로 서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대학 교수, 일간지의 편집국장을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국회의원, 문공부 장관, 여러 나라의 대사 등 주요 중책과 업무를 맡았다. 다양한 경력과 경험은 그의 사진의 바탕이 되었지만 이유 없는 시기와 괜한 오해를 사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50대 초반부터 사진을 해서 지금까지 30여 년을 해 왔어요. 그 전에 걸어 왔던 길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인정받지도 못했지만 제가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후세가 내 사진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저에 대한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난 30여 년의 세월을 회상하면서 약간의 서운함, 아쉬운 감정이 낯빛에 살짝 비치더니 이내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온다. 윤주영이 사진을 접하게 된 것도 그의 경력에 기인한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하는 동안 사진과 글은 매일 접하는 일거리였고, 그 때의 사진은 전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후 문공부 장관직을 역임하면서 사진과의 연은 계속되었다. 사진을 시작하고서 그의 작업은 변함이 없었다. 사진은 기록하는 매체이고 그가 남긴 것은 시대의 기록이었다.
“기록을 중시합니다. 시대 정신에 입각한 기록이지요. 정신이 없는 기록은 소용이 없어요. 모든 예술은 정신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정신은 곧 철학이에요. 이것은 ‘왜 사진을 찍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어떤 목적 의식이 있어야 행위에 대한 틀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시대 정신을 담은 기록을 남기려 함이에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넘길 수 없는 일들을 고발하고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기록합니다.”
조선일보>
노병의 눈으로…
사진가 윤주영이 갖는 시대 정신은 몸으로 체득한 경험이다. 1928년생인 그는 현대화의 역사를 직접 겪어 왔다. 식민지의 슬픔과 광복의 기쁨을 누렸고 곧이어 불어 닥친 혼란의 시절을 지냈으며 전쟁의 참담함도 목격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 위에서 재건의 최전선에 섰고 드디어 한강의 기적을 이뤄 낸 세대이기도 하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격변기의 시대를 살아온 사진가는 자신을 노병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노병이지만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노병으로서 해야 할 일을 찾아 소임을 다하는 중이다.
“노병의 눈, 경험에 의한 지혜로 젊은이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 고쳐야 하는 책임이 우리 세대에게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과거를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물론 그러한 과정에 의해 발전이 이뤄지지만 과거의 계승으로 더 큰 발전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견지로 사물을 바라봅니다.”
암흑의 시대, 혼란의 시대, 발전의 시대를 살아왔고 또 지금을 살아가는 사진가에게 시대 정신이란 명확하고 구체화된 경험의 산물이다. 그런 경험이 의미를 지닐 수 있도록 여든의 사진가는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을 남겨 왔다.
어머니라는 에너지, 어머니라는 유산
“탄광촌을 작업으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양 산업이지만 한 때는 산업의 원동력이 되는 일이라 하여 광부를 일컬어 검은 다이아몬드를 캐는 용사라 한 적도 있었지요. 당시에 제 자신도 산업화를 이뤄 낸 중심 세대로서 공헌했다는 자부심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고 예전의 영화도 사그라들었습니다. 탄광의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과 매치되더군요.
현장에서 사라진 사람들, 그들의 감정과 제 감정이 일치되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보는 탄광과 제가 보는 탄광의 모습은 다릅니다. 그러면서 이 나라를 발전시킨 에너지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귀중히 여겨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러한 유산, 발전적인 에너지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 우리의 어머니였습니다.”
포스코미술관의 넓은 전시장이 120여 점의 흑백 사진으로 가득하다. 윤주영은 농어촌의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대도시의 한복판에 불러 모았다. 사진은 농촌, 석정리역, 장날, 탄광촌, 해녀, 어촌, 갯벌, 풍어제 등 모두 8개의 주제로 나뉜다.
흙먼지를 뒤집어 쓴 농투성이 아낙이 있고, 이른 새벽 첫 기차를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있다. 제 몸뚱이만 한 보따리를 인 할머니가 있고, 탄가루에 눈만 하얘 성별도 구분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수압으로 인한 두통을 이기려 쓴 가루약을 털어 넣기도 하고, 날카로운 바다 바람을 등에 지고 도라무통 군불을 쬐기도 한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개펄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 웃음 짓기도 하고, 무명옷 차려입고 용왕님께 정성을 드리기도 한다. 오래된 추억 같은 흑백 사진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서 목으로 울컥 솟아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어머니들의 노동하는 모습에서 슬픔을 느낍니다. 저로서는 외국의 어머니들과 비교할 기회가 많았기에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신랑에게 시집 온 새색시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할 기회조차 없었던 어머니입니다. 밥 먹는 입을 줄이기 위해 시집을 보내기도 했고 일할 노동력을 얻기 위해 며느리를 얻기도 했습니다.
가난 속에서 가족을 먹여 살린 어머니는 먹고 사는 걱정을 덜자, 이번에는 자식 교육을 위해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어머니들이 준비된 고급 인력을 키워 냈기에 우리나라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미덕을 발견했고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으로 전시를 열었습니다.”
다큐멘터리에 임하는 자세
그토록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어머니이기에 사진가는 가장 정직한 방법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했다.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윤주영이 택한 방법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람들이 보는 대로 느낄 수 있도록 대상에게 정직하게 다가갔다.
“기교보다는 내용에 충실하도록 노력합니다. 사람을 촬영할 때는 마음을 찍자고 생각해요. 마음은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진에는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눈물, 웃음, 몸짓으로 나타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한 순간이 제게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마음이 가장 잘 나타나는 순간. 그리고 풍경은 한없이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을 촬영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흔적, 이야기가 스며든 곳, 느끼고 겪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기록하여 풍경으로 남깁니다. 다큐멘터리는 보통의 기록이 아닌 예술입니다. 작가의 머리를 통해 나오는 개성 있는 시각,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단, 그 안에 시대 정신, 철학이 담겨 있어야 하고 정직한 태도로 대상에 접근해야 합니다.”
윤주영은 명작이 명작으로 남는 이유를 작품이 갖는 변함없는 생명력 때문이라고 한다. 시대가 변해도 가슴에 확 와 닿는 무언가가 있는 작품. 시대 정신, 철학이 담긴 작품이 변치 않는 생명력을 얻어 명작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의 평가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삶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 때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긴다. 사진가이기 전에 여든 인생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윤주영은 사진으로 말을 건넨다. 단지 과거형으로 끝내고 말 것이 아닌 소중한 말. “어머니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