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18
대구의 낯선 지하철을 타고 낯선 동네에 내렸다. 고명근의 전시(2007.10.12~27/리안갤러리)가 열리는 리안갤러리를 찾아가는 길. 익숙하지 않은 초행인 곳에서 사람은 불안한 흥분과 즐거운 설렘을 느낀다. 경험하지 못한 곳에 대한 두려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 미묘한 차이를 띠는 감정이 가슴 속 깊은 곳을 자극한다.
처음 고명근의 작품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 이와 다르지 않았다. 사진이 프린트된 투명한 베이스로 만들어 낸 조형물. ‘사진 조각’이라는 낯선 대상은 관람자를 신선한 자극, 새로운 감각과 조우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작품들. 처음의 낯설음은 친근함이 되어 작품의 다양한 변주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새로운 공간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초행길의 긴장감을 덜어 주었다.
취재 | 김성용 기자
2006년과 2007년에는 국내보다 해외에서의 전시가 많았다. 해외 활동에서 느낀 점이나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2006년 일본의 도쿄 갤러리Tokyo gallery에서의 전시가 밑거름이 되어 외국 전시가 계속되었다. 도쿄 전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프레이 노리스 갤러리Frey Norris Gallery에서 전시가 있었고 2007년에는 뉴욕 오케이 헤리스 갤러리O.K Harris Gallery와 시카고 앤드류 배 갤러리Andrew Bae Gallery에서 개인전을 했다. 미국 예술의 중심 도시에서 전시를 한 것이 의의가 있었다. 유럽에서는 작은 화랑에서 전시가 있었는데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하진 못했다. 유럽에는 주로 아트 페어를 통해 소개가 된 듯하다. 외국에서의 전시가 국내 전시보다 두 배 정도 힘든 것 같다. 보통 6개월 전부터 전시 준비를 하는데 작품을 옮기는 과정은 물론 언어와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이 크게 느껴졌다.
지금 뉴욕은 사진이 붐을 이루고 있다. 전시의 절반 이상이 사진전이다. 5~6년 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오는 시기에 작품의 생산 수단이 바뀌는 과정에서 기존의 수단을 기리는 의미로 사진전이 일시적으로 많을 것이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이 정착된 지금, 사진은 미술을 대체하는 힘으로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사진이 디지털이라는 매체와 연결되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전반적인 환경의 변화, 그 배경을 힘으로 사진이 대세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사진 조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업 방식이 입체적인 대상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그 사진을 다시 입체적인 조형물로 만드는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재구성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큰 맥락에서 볼 때 입체와 평면에는 큰 구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입체가 평면이 되고 다시 그 평면이 입체가 되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제3의 존재 상태를 억지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예술의 고유 영역이다. 입체도 평면도 아닌 제3의 상태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감각의 자극을 받는 것이 즐겁다. 새로운 상태를 억지로 만들어 낼 때 왜곡이 된다. 이러한 왜곡은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일부러 만들기도 한다. 왜곡 속에 작가의 의도가 존재할 수 있다.
조각품을 촬영한 사진을 그대로 보여 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작가의 생각대로 이미지를 변형했을 때 새로운 경험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미지의 변형은 작은 감각으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은 감각을 작고 소소한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은 조금 다른 감각이 위대하다. 감각이 다르게 표현된 것이 고흐의 터치 기법이다. 감각의 차이는 쉬워 보이지만 대단한 것이다.
사진으로 만든 조각은 기존의 사진이나 조각과는 전혀 다르고 새롭다. 다름과 새로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새로움new’과 ‘다름different’은 21세기 서양 미술의 키워드이다. ‘new’는 새로운 것, ‘different’는 다양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현대 예술의 모토이면서 인류가 지향하는 사상과도 가깝다. 이러한 사상이 내 작업의 기초가 되었는데 포스트모던이 한창 논의되던 시기에 공부해서 그런 듯하다. 새로운 것의 추구, 다양성의 인정은 현대 예술의 포용성을 낳았다.
꽤 오랜 시간을 거쳐 지금의 ‘사진 조각’이라는 형식에 이르렀다. 앞으로 작품의 형식에 변화를 줄 계획이 있는지.
20년을 해서 겨우 이 수준에 이르렀다. 정착됐다고 자부할 때 고인 물이 될 것이고 이것저것 시도할 때 깊이가 얕아진다. 작가의 딜레마이다. 예술에 있어서 형식의 완성이란 없기에 현재로서는 조금 더 발전시키고 실험해 볼 생각이다. 일단은 내가 시작한 영역이기 때문에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할 것 같다. 여태껏 했던 것처럼 또 다른 새로운 실험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요즘 들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피부에 와 닿는다.
나는 작업의 주제나 내용보다 재료나 방법론적인 면에서 먼저 길을 여는데 그렇게 구상된 새로운 시도가 두 가지 있다. 듀폰Du Pont에서 새로 나온 건축 자재 중 유리면에 이미지를 전사해서 겹친 재료가 있다. 외부 설치도 가능하고 대형화할 수도 있는 재료여서 작품에 사용하려고 준비 중이다. 다른 시도는 오래 전부터 생각했지만 비용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었는데 LCD 패널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LCD 화면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격의 부담과 패널 프레임의 두께 때문에 아직은 아이디어로만 남아 있다. 프레임이 두꺼우면 이미지의 면과 면이 맞닿지 않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빔 프로젝터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빔 프로젝터로 구조를 만들 경우 공간과 설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조각이 아닌 설치가 된다. 나는 설치 작품을 그 공간이 아니면 안 되는 작업, 그 공간과 딱 맞아떨어지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내 작업을 설치로 보는 이들도 있다. 예전 작업에는 조립하는 대로 모양이 달라지는 설치 작품도 있었지만 지금의 작품은 하나의 덩어리로 된 독립적인 조각이다.
이번에 건물의 외벽이 아닌 실내 공간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새로 보였다. 우선 내 작품은 건물의 미니어처가 아님을 밝힌다. 미니어처는 건물의 외형을 전후, 좌우, 상하로 똑같이 만들어서 작게 만든 것이고 내 작품은 전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육면체가 만드는 공간이 건물의 외형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위와 아래를 구름 사진으로 막았다. 비슷한 사면이 만드는 공간은 환상illusion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다.
여태껏 실내는 내부 공간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줄곧 외부 이미지만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에서 건물의 외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부 공간도 새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고, 내부가 외부(육면체)로 나옴으로써 공간의 왜곡이 한 번 더 생길 수 있었다.
방금 설명한 환상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내가 의도하는 환상은 ‘비어 있음’을 말한다. 다만 시각적인 비어 있음이 아닌 내용적인 면에서의 빈 공간이다. 작가는 작품에 내용을 담고 의도를 싣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의미를 잃게 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와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보는 사람이 채우는 빈 곳이다. 비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비어 있지 않게 보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비어 있음’이 있다고 얘기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선 공간과 이미지의 함수 관계를 조율해서 그럴듯한 접합을 이뤄야한다. 이점이 가장 어렵고 여기서 투명한 베이스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시장에는 입체 작품 외에도 평면 작품이 보인다. 두 작업에 차이점이 있는가. 평면 사진은 오래되고 낡은 벽이나 건물을 촬영한 것과 조각상을 데칼코마니한 것이다. 이것은 독립적인 작품이면서 입체 작업의 과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사진은 기록성이라는 큰 특징을 갖는다.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 환상을 만드는 사진 조각에도 사진의 본질인 기록성이 있는지.
물론이다. 조형성이 강해서 다른 사진보다 덜 보일 뿐 기록성을 지닌다. 조각상을 촬영하는 경우 대다수는 조각상의 특징만을 촬영하는데 나는 2~3시간 동안 모든 각도에서 수없이 촬영을 한다. 건물이나 벽 사진에서도 기록성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주로 카메라에 담는 벽은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오래되고 낡은 것이다. 낡은 벽은 추하고 지저분하지만 삶의 이야기와 생의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날을 지나온 대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작업에 대입하기 위해 전체적인 모습보다는 주로 부분의 디테일을 촬영하지만 그러한 사진은 시대의 기록이 되고 있다. 입체로 만드는 과정에서 정교한 기록의 부분이 가려지지만 사진의 기록성은 작품에 존재한다.
박스box, 대칭symmetry, 투명transparency. 고명근의 작품을 이루는 형식적인 근간이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틀로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의미 등 작업의 내용이 이 틀에 담겨진다. 박스는 가능성의 공간, 매트릭스(matrix, 산실), 인공적, 문명의 형식이고 대칭은 복제, 조화, 질서의 형식 그리고 투명은 빈 공간, 덧없음, 소멸의 형식이 된다.
사진과 조각을 합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 냈다. 원래 공간이란 무언가를 담기 위한 빈 곳. 그러나 작가의 손에 의해 창조된 공간은 ‘비어 있음’을 위한 빈 곳이 되었다. 무엇을 위한 빈 곳일까. 최선을 다해 모자란 것을 채우고 빈 곳을 메우는 삶만을 살아왔기에 ‘비어 있음’의 공간이 낯설게 다가온다. 이제는 고명근의 작품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 다시금 낯설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