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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말 없는 말 권부문

2007-07-10

권부문.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여섯 번의 개인전이 있었지만 서울에서의 전시는 10년만이다. 이렇게 긴 시간을 뛰어넘어 관객과 만나는 작가는 왠지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다시 찾아왔다’는 문장과 어울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권부문에게도 ‘숨어 있었다’라는 표현이 적합할까? 마치 녹음 테이프의 지워진 부분처럼 드문드문 남아 있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끈은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는 얼마 전에 열린 그의 전시 <권부문, 사진 2000-2007> (2007.4.13~5.13/아르코미술관)에 붙여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개인전을 통해 제대로 접하지 못했거나, 해외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 온 작가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미술관의 기획 의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작가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중의 하나가 ‘국내보다 오히려 국외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은 이 나라가 역수입된 작가를 선호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혐의를 두게 한다는 점에서 묘한 아이러니이지만, 한 작가가 시공간의 공백의 틈에서 파고들었을 깊이를 기대하게 하는 부분 또한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전시의 끝 무렵, KIAF의 부스에 한창 작품을 설치 중이던 그를 만났다.

취재 │ 전미정 기자(월간 포토넷)

그 동안 국내 전시가 많지 않았다.
10년 만의 서울 전시다. 젊은 큐레이터의 기획을 남다르게 생각해 참여하게 됐다.

국외에서 더 잘 알려진 작가라는 수식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국외인지 국내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내 앞에 서 있는 세계의 문제인데, 국외와 국내로 나누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걸 일부러 알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오히려 자괴감이 드는 것 같다. 진짜가 되려는 길은 아직 험난하고, 관객과 하는 게임을 치열하게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번 전시를 보고, 그리고 직접 언급한 내용을 보고 몇 가지 단어가 맴돌았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구름도 그렇고, 눈이 내리는 바닷가를 찍은 낙산의 사진이나 별보기 시리즈도 그렇다. 단조로움 속의 변화가 느껴지는데 단조로움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사진뿐 아니라 모든 표현에서 메시지가 많아지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가능한 사물성 자체에 주목하려다 보니 사진이 단순해진다. 어떤 경우에는 작가도 당사자인 동시에 관객이다. 자기 자신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겠나? 관객을 노릴 때, 가르치려고 할 때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 같다. 사물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의미를 드러내려고 애쓰다 보면 사물은 부속물이 되기 쉽다. 물론 별을 찍은 작업에는 어떤 문학적인 속성이 빠질 수가 없었다. 별의 속성상 피할 수 없는 부분이고, 내가 아무리 경계를 해도 남아 있는 부분이더라. 관객들은 별을 보면 자연스레 문학적인 감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도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낙산 작업은 눈이 바람에 흩날리는 정도가 계속 변하면서 단조로운 공간에 역동적인 시간이 개입한다. 여러 곳을 여행하며 찍은 밤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며 겹쳐지는 동영상 작업도 그렇고.
시간에 대한 성찰은 인간에게 중요하다. 삶이건, 사물에 대한 이해건 시간은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사진은 그 태생이 시간과 떼 놓을 수 없지 않나. 시간에 대한 성찰을 하기에 좋은 매체다. 이미 수억 광년 전에 사라진 별이 지금 우리 눈앞에 반짝이는 것처럼 시간성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관객이 이미지 앞에서 내가 발을 디딘 위치를 어렴풋이 느낀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다. 낙산 시리즈도 동영상으로 작업해 둔 것이 있다. 시간대를 교차해서 파도와 눈이 움직인다. 매번 전시 때마다 사진집을 함께 놓는데, 전시장에서 사진을 보는 것과 달리 책장을 넘기면서 또 다른 공간과 시간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일어났던 현상이나 사물의 입장을 환기하면서 인식의 깊이에 도달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관객들도 인식의 폭만큼 환기가 될 것이라고 본다. 전시는 열린 제안이지 이해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접근의 폭을 열어 두려고 한다.

얼마 전 전시를 소개하는 연합뉴스의 기사에서는 사진가를 ‘이미지의 노동자’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지를 섬긴다’는 표현도 했었고.
이미지 스스로 가지는 운명과 힘에 대한 이야기다. 컴퓨터에 저장된 이미지를 화면으로 불러 내면 서로 다투어서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럴 때면 로마의 검투사들처럼 강렬한 힘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보니 이미지를 펼칠 때 이미지의 온전한 힘을 모두 드러낼 수 있도록 다루려고 하게 된다. 이때 사진가는 이미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에게 온 이미지는 나를 빌려 오는 것이고. 이미지의 자생력을 중시하는 종사자라는 의미에서 노동자라는 의미였다.

카메라의 ‘엄정한 눈’에 대해 중시하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보여지는 이미지는 오히려 극도로 추상적인데, 이 지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추구하는 것은 손대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생각하는 것을 담아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 스스로 힘을 지니기 바란다. 대상이 스스로 갖는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자신의 존재 방식대로 달려든다. 결국 이것은 이미지의 몫이고,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는 그 속에서 얼마나 거리를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본다. 이미지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이미지 자체의 힘을 드러내고, 관객이 소통에 있어 불편 없이 자기 사유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은 매우 예민한 것이어서 마치 물감 한 방울 차이로 색이 달라지듯 조심스럽다. 하지만 사물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유지하는 맛이 있다. 사물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구름이나 사막, 하늘, 별처럼 자연을 찍은 사진이 많다. 초기에는 도시 작업을 많이 한 걸로 안다. 이번 전시의 도록에서는 초기 사진을 언급하며 ‘사회적 검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표현이 있던데 예전 작업과 지금의 차이가 있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대학 시절은 단순히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인식의 힘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창 할 때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사물에 대한 해석력이 필요하고, 따라서 인식의 폭을 확장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안동 수몰지구나 하회마을을 찍은 사진들도 사실 인문학적 호기심으로 찍은 것이지 다큐멘터리적으로 찍은 건 아니었다. 당시에는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가 너무 좋았는데, 근대 농촌의 형성에 대해서 연결 지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대 가기 전이었는데, 한 시점을 돌아왔을 때 내 삶의 랜드 마크 같은 시점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주 치열하고 싶었던 생각에서 나왔던 작업들이다. 하지만 ‘사회적 검열의 대상’이라는 표현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검열의 대상이었다. 그림만 해도 붉은 색이 3분의 2가 넘으면 전시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초기 작업을 어떤 사회적인 저항의 메시지로 미화하는 것은 좀 불편하다.

좀 우스운 질문인데, 본인이 원하는 이미지를 매번 만나는가?
이미지라는 게 또 하나의 환상이다. 환상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내 것이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미지는 언젠가 나에게 온다는 확신이 있다. 대신 헛꿈은 안 꾼다. 절실한 생꿈을 꾸고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꿈을 꾸기 위해 나를 형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갖출 것은 갖추는 것.

수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설치하느라 복잡한 코엑스 전시장으로 그가 사라졌다. 부문富問이라는 이름답게 ‘물음’을 생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그. 모두 똑같이 되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의문을 가지고 반문하며 의식의 불화를 겪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는 그. 그래서 작가는 혼자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그의 말이 남았다. 준비가 한창인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길, 아르코미술관 전시에서는 보지 못했던 권부문의 아이슬란드 사진과 마주쳤다. 아이슬란드 회색빛 하늘이 펼쳐진 바닷가에 빙하 조각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미지를 그곳에 불러 낸 자는 이제 그곳에 없고, 이미지가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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