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2-06
글 | 진동선 사진평론가, 현대사진연구소 소장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것이 국사든, 가족사든, 혹은 개인사든 역사가 시간의 산물이기에 시작에는 첫 매듭이 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지막 매듭이 있다. 올해 사진전이 유난히 많았다. 통계를 내려고 한해 매체에 실린 사진전을 조사하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정말 사진전 풍년의 해이다. 하여 그 많은 사진전을 다 볼 수 없고, 평가 또한 무리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올해 가장 의미 있는 사진전 하나를 꼽으라면 개인적인 관점에서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3인의 교수전>(2006.8.30~12.13)을 꼽고 싶다. 이 전시는 내게 무척 각별하다. 전시는 작품을 넘어 한국 현대 사진의 어제와 오늘을 관통한다. 3인의 교수들이 선보인 작품들은 작품 이상의 역사라는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사진이 한국 사진의 현재성을 투과하는 역사성과 상징성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인의 옴니버스 전시는 역사의 완료형 전시다. 한 시대의 역사적 개방의 골목을 비추고 동시에 폐쇄된 역사의 닫힌 골목을 비춘다.
아카데미의 맹주, 교육의 리더로서의 강력한 자기장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 이들 3인의 교수는 한국 현대 사진의 리더들이자 살아 있는 주체적 신화들이다. 전시 제목과 컨셉이 표방하듯이 한국 사진의 최고 전성기로 말해지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그들은 지식과 언어로 사진을 평정하고 그로 인해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호시절 사진으로 누릴 것을 다 누린 행복한 사람들의 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功이 크면 과過도 크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가 깊듯이 이들 3인의 교수가 누리고 쌓았던 빛나는 업적과 가치만큼이나 아쉽고 부족한 미결과 미완성의 어둠 또한 깊다.
3인의 교수는 오랫동안 교수, 작가, 이론가, 비평가를 겸했다. 때문에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는 나 같은 후학에게는 정반대의 명암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참으로 귀중한 반면 교사이고 동시에 타산지석 같은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 그들이 있었기에 후학들은 저마다 사진의 길에서 또 다른 목표, 또 다른 길, 그리고 또 다른 방향성을 가질 책무를 느낀다. 세 번의 전시, 세 번의 오프닝에 누구보다도 일찍 가서 그리고 누구보다도 꼼꼼하게 사진들을 보았다.
홍순태의
<장 가는길>
(2006.8.30~9.27), 한정식의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
(2006.10.11~11.8), 육명심의
<백민>
(2006.11.15~12.13)은 저마다 고유한 시선, 감성, 프레임으로 우리 것을 만나게 한다. 또 우리의 정신을 보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 땅의 영혼들에 대한 사유와 성찰의 시각을 갖게 한다. 한정식 사진이 유일하게 신작으로 신선했지만 그러나 과거 ‘고요’에서 주었던 적멸의 풍경이 유지되고 있어 큰 변화는 눈치 채지 못한다. 때문에 전시는 그들 사진들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평가보다는 사변적인 것들, 그러니까 저마다 오프닝에서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자신들이 걸어왔던 사진의 길에 대해 공치사 혹은 자화자찬이 아닌 어떤 소회, 반성, 아쉬움, 미련의 목소리를 내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누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3인의 교수가 의심할 나위 없이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가히 25년간 한국 사진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고 또 그들이 막강한 위력과 위세를 통해서 한국 현대 사진의 중심에 섰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그 시절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 그들로부터 사사받고, 그들로부터 평가받고자 했던 지난 시절 사진의 허기짐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 모두 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의 사진적 위세는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대 권력으로 자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문은 경애와 숭고함의 버팀목이다. 사진을 학문으로 다루는 아카데미에서는 더욱 극단으로 권력이 만들어지고, 위계가 만들어지고, 그리고 영향력이 만들어진다. 이것들 때문에 아카데미는 힘이 생기고 또 필연적으로 추종자와 계보와 당파를 낳는다. 3인의 교수들은 오랫동안 아카데미의 맹주로서, 그리고 교육의 리더로서 저마다 대학에서 강력한 자기장을 펼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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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태, 육명심, 한정식에는 그 때문에 전무후무하게 ‘3인의 교수’라는 칭호가 붙는다. 이 꼬리표가 그들에게 따라다니는 한 운명과 역사의 대명사는 지속된다. 그들에 대한 칭호는 또 있다.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가장 절정기였던 1980년대, 그들은 당시 정치 실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빗대 ‘사진계의 3김’으로 불리기도 했고, 철자가 비슷하다고 하여 홍순태, 한정식을 H2, 육명심을 O로 칭하여 ‘H2O’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의 시간에서 건너온 어제의 시간을 바라보다
3인의 교수전은 이런 점들 때문에 작품 외적인 요소들이 크다. 작가로서 초대되고, 작품으로서 평가받기 위한 전시였다면 ‘3인의 교수전’이라는 전시명을 달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또 도록에서 강운구가 그처럼 비평적인 시선을 던질 이유도 없다. 교육자, 작가, 이론가, 비평가로서 공과가 크기 때문에 오늘의 시간에서 그들이 건너왔던 어제의 시간을 바라보는 의의를 갖는다. 돌이켜 보면, 2001년 3월 28일 인사동 하우아트갤러리에서 개최된
<미명의 새벽>
에서 나는 이미 그것들을 보고자 했다.
기획자로서 나는 강운구, 김기찬, 육명심, 주명덕, 한정식, 홍순태, 황규태 이상 일곱 사람을 한 자리에 초대했다. ‘미명의 새벽’은 강운구가 주명덕의 사진집에 썼던 어제의 한국 사진에 대한 상징이다. 일곱 사람들은 저마다의 분야에서 한국 현대 사진의 새벽을 열었던 사진가의 초상이고 신화였다.
<미명의 새벽>
도록에서 정주하는 그런 말을 한다. “강운구! 김기찬! 육명심! 주명덕! 한정식! 홍순태! 한정식! 이미 우리의 사진 역사에 중요한 ‘길목’을 감당해 준 이 일곱 명의 ‘작가와 사진’을 말하는 일은 무척 어렵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사진은 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사회 속에서 생성되었다.
서양과 비교하여 볼 때, 더없이 열악한 사진 풍토 속에서 자생한 이들은 다행히도 나름대로의 ‘미학과 결심’으로 스스로를 점철하였다.”(『미명의 새벽』, 눈빛, 2001, 166쪽) 그렇다. 정주하의 말처럼 후학들은 홍순태, 육명심, 한정식이라는 3인의 교수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또 이들이 직면했던 시간과 공간을 직시한다. 척박했던 시절,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사진 이론 교육의 주춧돌을 쌓고, 그리하여 미학과 역사의 지평을 펼쳤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그들의 크나큰 공이며, 그들이 전개하고 다듬은 아카데미의 이론이고, 바로 어제의 우리 사진의 미학이고 예술론임을 안다. 그들은 중요한 역사의 길목에서 기술의 시대에서 이론의 시대로, 그리고 발과 장비의 시대에서 사유와 성찰의 시대로 이행시킨 사람들이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들에 의해 이론과 논리와 식견의 틀을 세우고, 또 그들로 인해 스스로 역사 및 시대 인식의 틀을 갖출 수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어느 순간 그들로부터 혼자 설 수 있는 힘과, 또 그들과 다른 역사 인식 및 시대 인식으로부터 갈등하고, 그 때문에 그들에게 학문적 애증을 가졌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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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과 쇠락의 ‘애증’
그들 작품 앞에서 바라본 것들은 이것이다. 나도 모르게 작품에 이론을 오버랩한다. 홍순태의 『현대사진의 조류』, 육명심의 『세계사진가론』, 그리고 한정식의 『사진예술개론』은 척박했던 시절 우리 사진 이론의 현현들이다.
이 책을 통해서 역사를 알고, 세계를 알고, 사진을 알았다. 또 불행히도 이것들은 우리에게 그들이 전개한 이론과 실제의 차이, 즉 그들이 가르친 것과 그들이 실천한 것들의 불일치가 얼마나 크고 공허한가를 알게 했다. 지금도 듣고 싶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옛날
<수평전>
에 보냈던 태도, 메이킹 포토에 대한 태도(이 태도는
<사진은 사진이다>
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사진의 세계화, 국제화에 대한 태도들을 듣고 싶다. 또 한발 더 나아가 정주하가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했던 이론 교수들이 끝내 이 땅에 사진 이론의 학풍을 이끌어내지 못한 점, 그리고 예술을 위한 작가 양산 체제 말고는 아무 것도 구축하지 못한 인프라에 대해서는 그들이 누렸던 영향력과 견주어 설명되어져야 할 부분이다.
3인의 교수전이 열린 그 곳에서 한국 사진을 본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대, 서로 다른 시대적 정황 속에 있다. 단언컨대 그들 세 교수는 사진이 이만큼 아름답게 만개할 수 있게 한 지렛대, 징검다리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대의 징검다리 역할을 충분히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가 저문 순간, 놀랍게도 사진계는 쇠락하고 있다. 사진은 맹렬히 성황을 이루고 있으나 사진(계)는 점점 추락하고 있다. 지금 사진(계)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다. 사진 대학은 더 이상 경쟁력을 갖지 못하며, 이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사진(계)의 운명이 3인의 교수의 부흥과 퇴장과 맞물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고, 빠짐없이 출석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부흥과 쇠락의 ‘애증’ 때문이다. 예컨대 그들은 이론 교수로서 아름다운 정년퇴임을 했지만 10년 넘게 해외에서 이론을 공부한 박사들은 어떠한가. 원인은 그들 때문이 아니나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 땅의 사진은 몇 되지 않은 사람들을 수용 못할 비극적 환경에 서 있다. 그들로부터 계승되지 못한 불운한 이론 교육, 또 그랬기 때문에 이끌어지지 못한 불모의 학문적 학파. 사랑은 미움을 낳는다. 그러나 애정으로부터 나오는 미움이기에 애증으로 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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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전>
세 사람이 하나 되어 기념 사진을 찍을 때 부질없는 상상을 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후임을 실기 교수가 아닌 이론 교수에게 물려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들이 찍는 교육 외에 비평하고, 유통하고, 다양하게 소비화할 수 있는 특성화된 컨텐츠에 앞장섰으면 어땠을까? 그들이 빼어난 이론과 미학으로 저마다의 학풍, 자신들의 이론적 전통을 아카데미에서 구축했으면 어땠을까? 또 그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후학들이 작업만 해도 살아갈 수 있는 굳건한 사진적 토양과 사진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으면 어땠을까? 이런 일들이 그들만의 역사적 과업도 아니고 그런 교육적 환경이 아님을 알면서도 역사의 가정을 늘어놓는 것은 이것이 사진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흥할지 몰라도 사진계는 쇠락하고 있다. 너무도 다른 사진 지형, 너무도 급박하다. 3인의 교수들이 누렸던 지난 시간대와 너무도 다르다. 그들의 시대는 호시절이었고, 또 그들은 마지막까지도 누릴 영예를 누린다. 물론 그들 가운데 아직도 배고프고,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자. 지금 사진은 풍요 속에 빈곤이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전시장에서 응당 보아야 할 작품들은 보지 않고 작품을 가리키는 손을 보아야 했던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