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9-20
만능 엔터테이너는 연예계에서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사진가에게도 그러한 끼와 재능들이 인정되고 발휘되고 있는 세상. 요리하는 포토그래퍼 이성호.
그를 만나기 위해 그의 청담동에 위치한 스튜디오 Boom을 찾았다.
그의 스튜디오 붐은 한쪽 벽면이 넝쿨로 덮여 있는 고개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요하고 적적한 느낌의 작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그의 보금자리가 보인다.
자유가 느껴지는 곳, 순간 ‘컹컹’하며 나의 몸보다 훨씬 커보이는 강아지 두 마리가 달려들어 내 손을 온통 침 범벅을 만들어 놓는다. 나를 반기는 이 녀석들이 소식으로 전해졌던 그의 가족이자 막둥이들임이 틀림없다.
황금색 털이 온몸을 둘러싼 골든리트리버 두 마리, 순하기만 한 이 녀석들의 이름은 듣기도 말하기도 좋은 ‘멜로디’와 ‘하이디’란다. 반가움의 몸짓을 하는 두 마리 강아지들을 힘겹게 떼어놓고 스튜디오를 둘러본다.
그가 촬영한 사진들과, 먼 이국에서나 봄직한 액세서리들, 드러눕고 싶은 충동이 절로 생기게 만드는 소파, 그가 흑백 사진 작업을 하는 암실과 사진인화지들이 사진기들과 어우러져 쌓여 있는 벽면. 그가 인도한 곳에는 그가 자랑하는 ‘무기창고’가 있었다.
그를 찾은 손님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요리하는 것을 보면서 사진촬영까지 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그가 요리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담소할 수 있도록 꾸며놓은 다용도의 장소. 그의 요리도구들과 각종 향신료들이 빼곡히 자리 잡은 ‘무기창고’였다.
‘저의 나이는 비밀이에요’ 약간 두터운 사각 뿔테 안경을 쓴 그가 조용히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생각보다 젊어보인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외모. 아니 어쩌면 보기보다 너무 나이가 들어 버린 것일까.
보통의 삶을 살기에는 너무 핸섬해서 피곤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 그 남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작업량은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많다.
산업디자인을 전공으로 한 그가 제일 먼저 손댄 일은 바로 그림 그리기였다. 일러스트레이터로 계몽사에서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만들었고, 어린이 TV프로그램 [뽀뽀뽀]에서 매회 3분 이내의 애니메이션을 위해 일주일을 밤새 고생했었다.
1996년, 그는 3D애니메이터로 변신을 시도했다. 뽀뽀뽀에 3D애니메이션을 접목시킨 것은 바로 그 였고, SBS 인기가요에서는 춤추는 사이버캐릭터 “룰루랄라”를 만들어 냈다.
시사프로그램으로 유명했던 ‘나잘난 박사’도 그의 작품. 그는 현재도 [애니하임]이라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으면서 캐릭터 디자이너로서도 많은 작품 활동을 겸하고 있다. 개봉 예정인 프랑스 국영TV와 한불 합작애니메이션인 ‘오드패밀리’의 3D메인캐릭터 디자인 개발도 그가 맡았다. 워낙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사진촬영과 요리를 접목한 새로운 작업들에 푹 빠져 있다.
그가 촬영한 코르크 마개 사진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자, 그가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직접 만든 라임사이다와 요리 재료로도 자주 활용한다는 레드와인을 한잔 꺼내놓는다.
그는 그 자신이 ‘문어발식 자유 직종’ 이라며 쑥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사진은 그의 말대로 새로운 경향으로서 흥미로서 다가선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부전공으로 그는 대학시절부터 사진을 전공한 바 있었고, 수년 전부터 사진 프리랜서 일로 패션화보촬영과 인스타일의 인터뷰화보를 촬영했었다. 그에게 사진은 또 다른 영역으로의 도전이 아닌 그의 창조 작업의 확장으로 봐야했다. 여유를 찾기 위해 일을 한다는 그 남자. 요리 사진을 찍게 된 계기가 있었다.
2년 전, 와이프가 친구들과 영국 여행을 간 사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주간을 홀로 살기 위해 (그의 말대로라면 생존을 위해) 요리를 하다가 보니 그 재미에 푹 빠져 버린 것. 와이프가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이태리 요리를 좋아해서 많이 시도하고, 동남아 요리도 하고, 퓨전요리를 개발하기도 하면서 그는 요리 실력을 부쩍 키워나갔다.
그러나 그에게 요리는 허망했다.
애써 맛있는 요리를 하더라도 왠지 모르게 그냥 먹어버린다는 것에 허탈감을 느낀 그에게 사진은 그 문제점의 아주 좋은 해결책이 되어주었다. 음식을 만들자 마자 사진 촬영해 놓은 음식은 어떻게 먹어도 안심이기 때문.
요리 가지고 음식사진 찍어 보니까 재미있어요. 국내 음식사진의 경향이 예전 스튜디오 스타일을 고수하는 경향을 보였거든요. 그러나 외국에서는 좀더 내추럴하게... 라는 흐름이 대세인 것 같아요. 보다 자연스런 음식사진이 나오지요.
언제 한번은 우동 그릇을 대여섯개를 설거지 쌓아놓듯 포개 올려놓고 제일 위의 그릇에 우동을 담아 놓은 사진을 본적이 있는데 인상적이었어요. 파격적이었죠.
국수도 안 삶아 놓고, 국물도 차가운 음식을 놓고 촬영하는 것은 사진 기술이자 장치로는 인정할 수 있어도 저와는 맞지 않아요. 방금 요리한 따끈한 음식을 촬영해 놓은 사진이 역시 진짜 음식 사진이 아닌가 생각해요. 사진 촬영하고 바로 따스하게 먹을 수 있는 그런 정상적인 프로세싱을 거친 음식사진이 진짜 아니겠어요?”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찍은 사진. 또는 그 요리를 만든 사람의 기분을 이해한 사람이 찍는 사진은 뭐가 다르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요리사진만큼은 최고의 요리사가 찍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않느냐는 것.
음식은 화장품과 다르고 무조건 반짝인다고 좋은 음식사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형화 된 음식사진을 보다보면 아쉬울 때가 많이 있다.
그는 음식사진을 뛰어넘어 그 자체가 아트의 경지까지 올라간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기존 사진계가 어려워하던 숙제인 새로운 비즈니스 포인트를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든다.
요리한 후, 맛있는 식사까지는 누구나 좋아하는 일. 그러나 식사 후의 설거지는 정말 싫어하는 필자. 그는 설거지가 귀찮지 않을까? 이 질문에 이성호 씨는 카메라 렌즈를 예로 들었다. 사실 예전 설거지하는 일은 참 번거롭게 느껴졌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사진가가 험한 촬영 여정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카메라 바디와 렌즈를 소중하게 관리하고 닦아 놓는 것과 요리하는 사람에게 그릇과 요리도구들의 정리는 비슷하죠.
요리하는 만큼 접시, 그릇들을 닦아 놓는 그 과정들이 즐거워요. 요리도 장비병이 있어요. 프라이팬도 접시들도 명품이 있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하면 갖고 싶은 요리도구들도 많아져요. (뒤에 걸려 있는 갖가지 프라이팬들을 가리키며) 프라이팬들도 렌즈와 같이 구경과 초점거리가 있어요.
열 사람의 손님이 앞에 앉아 있으면 굉장히 큰 크기의 프라이팬이 필요하고 음식에 따라 크기와 열전도율이 다른 프라이팬들이 따로 존재하죠.
욕심이 많아서 무엇을 새로 시작하면 그 것에 대해 잘 되고 싶은 욕심이 너무 많아요. 무서울 정도로 빠져들죠. 와이프도 굉장히 놀라더군요. 평소에는 낙천적인 제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죠. 체질을 변화 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하하.
사진은 아날로그적인 작업이에요. 후보정만 디지털 작업이지요. 전 자신이 아날로그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직업이 여러 개라서 일을 할 때마다 연극속의 주인공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사진과 요리가 비슷한 점은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거에요.
사진은 촬영하면서 피사체와 말도 많이하고 교감도 필요한데, 요리도 그래요.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과 대화하며 과정을 보여주면 더욱 맛있는 요리가 완성이 되지요.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과 음식은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가 EOS-1과 핫셀을 사용하다가 잡은 첫 번째 디지털카메라를 설명하면서 스튜디오 한 구석에서 멋적은듯 직사각형의 카메라 하나를 들고 다가온다.
바로 지금도 명기로 손꼽히는 명기 니콘 쿨픽스950이다. 그는 950으로 일상을 기록 촬영하면서 디지털카메라의 묘미에 빠져 버렸다. 렌즈가 회전하니까 다양한 화각을 잡을 수 있었고, 21미리 광각 컨버젼렌즈를 달아 사용하니 더욱 재미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단다.
그러나 마치 깔때기 같은 모양의 컨버젼렌즈를 끼운 직사각형의 쿨픽스 950. 이 조합을 들고 길거리에서 멀뚱히 서 있던 그 사진사는 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그가 이후 기변을 시도하며 기존에 사용하던 EOS시리즈의 렌즈와 호환되는 D30을 선택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용하는 EOS-1D로 이어졌다. D30은 화각이 좁다라는 느낌이 들어 조금만 더 넓었으면 하는 바람 덕에 EOS-1D를 선택했다.
잡지 인쇄에도 400만화소의 EOS-1D는 풀 페이지를 훌륭하게 소화해냈고 그 특유의 셔터감과 무수한 셔터찬스는 그에게 만족을 안겨줬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아직은 여러 잡지 인쇄물의 인쇄 퀄리티가 디지털 사진과의 매칭에서 아직 부족한 면이 많다며 아쉬워했다.
포토샵을 버전1.0부터 사용해 온 그 남자. 그러나 내가 갖다 준 월간DC를 받아 들고는 인쇄상태에 매우 만족해하며 궁금해 하는 눈치. 이후 잠시. 디지털사진 인쇄에 많은 공을 들이며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노력들에 대해 토론에 빠져 버린 우리 둘이었다.
그는 여전히 분주했다. 곧 출판될 그의 책에는 그가 만든 요리, 촬영한 사진, 그린 그림까지 넣어 독특한 책을 준비 중이었다. 나른한 일기 같으면서도 일상도 들어가고 사진도 들어가고, 그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 녹아 들어있는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책을 기획 중이다.
인터뷰하는 내내 덩치 큰 강아지 두 마리는 나에게 반가움의 표시를 반복하며 나의 손과 무릎에 침을 묻혔고, 이내 단순한 나는 그 강아지들의 귀여운 눈빛에 매료되어 인터뷰가 중단되는 사태도 종종 일어났다.
그리고 인터뷰가 막바지를 향할 때 즈음 그가 배고프다며 피자를 좋아하는지 물음과 동시에 요리를 시작했다. 신중한 눈빛으로 토마토를 고르고, 정성스레 자르고, 말린 토마토를 올리브유에서 꺼내 싱싱하고 두터운 버섯과 함께 얇은 빵 위에 얹는다.
내 입가에는 군침이 벌써 돌기 시작한다. 음식 앞에서 인상 찌푸리는 사람을 못 봤다나. 그렇다. 그렇게 행복해 하는 요리 모습을 보면서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누가 어두운 표정을 할 수 있을까. 방금 오븐에서 꺼내온 피자를 입에 물었다.
입 안 가득 느껴지는 부드러운 치즈의 맛과 버섯의 향. 그리고 정성마저 느껴지는 훌륭한 맛이다. 바라본 그 남자의 눈빛에서 행복감이 느껴진다. 그가 하는 작업들은 일이 아니었다. 그 것은 그 남자의 삶이자 기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