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11
어느 날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책 한권. 책 제목이 좌린과 비니의 사진가게란다. 정겹고 따스한 내용의 한장 한장. 그리고 사진에 이어진 멘트가 인상적이다.
“세계 여행, 배낭을 메고 떠나기 위해 그 때 당시로는 꽤 과감하게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어요. 회사 다닌지 3년 정도 지난 후 였죠” 직장 3년차 슬럼프로 고생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408일간의 세계 여행을 한 부부. 좌린과 비니. 인터넷 웹기획 전문가와 제약회사 약사의 번듯(?)한 직업을 때려치우고 지금은 길거리 사진작가로 나선 이들을 만나보았다.
덥수룩한 수염에 티셔츠 한 장, 옷차림에서도 수더분한 사람냄새가 폴폴 풍겨나는 그 들. 주하아린;좌린. 빈진향;비니, 두 글자의 이름만큼이나 귀엽고,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 들. 인터뷰는 좌린의 사진 작업장에서 이루어졌다.
세상에 소개된 대로 좌린과 비니 이 두 사람이 같은 학교 사진 동아리 출신으로 알려졌는데, 그 들은 사실, 같은 학교 안에서 얼굴만을 익힌 채 둘 다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을 뿐이었다. 좌린은 학보사의 취재기자로 열심히도 집회취재를 다녔다. 그리고 비니는 말 그대로 사진에 취미를 붙인 대학생이었다.
이들이 결국 만난 것은 무료한 직장생활을 하던 사회에서였다. 사람들과 술과 어울려 놀다가 만났다는 그들의 짤막한 대답.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서로의 일상에 빠져들었고, 누구나가 그렇듯이 막연하게 여행을 동경했다.
세계여행을 하기 위한 결심이라기 보다는, 세계여행이라 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보는 것이기에 그 들은 도전했다. 어쩌면 당시 부부 배낭 여행기들이 많이 출판되었기에 세계여행이라는 막연한 꿈이 조금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고 슬며시 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았다.
그 들의 책을 펼쳐 몇 장을 조심스레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넘기다가 왠지 두 사람의 사진의 느낌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좌린의 사진은 풍경, 그리고 패턴. 비니의 사진은 인물 그리고 스틸로 촬영한 사진이 많았다.
책을 넘기며 사진이 나오면 둘 중 누구의 사진일까 어디를 찍은 것일까, 촬영자의 정보를 무시하고 자못 궁금해 하며 혼자 퀴즈를 내고 또 맞춰보았다. 어린 날, 받아쓰기 채점을 하는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듯이. 색다른 책을 읽는 재미란 건 이런 것일까?
좌린은 사진동아리 시절, 암실작업에 흥미가 많았다. 프레이밍과 크로핑을 유심히 하다 보니 구도, 구성 이런 것들에 자연스레 주의를 많이 기울이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흑백 톤의 묘미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 느낌을 재현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슬라이드 작업은 별로 하지 않았고 바로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원색의 재현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신경 쓰는 부분들이 비교적 원하는 대로 잘 표현이 되어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느껴진다는 좌린, 그 것은 비니의 사진을 보면서 채워가야 할 부분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안데스 고원의 풍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원에서는 일반적으로 쓰는 데이라이트 필름이나 자연광 화이트밸런스의 기준과는 분명 다른 자연광이 존재합니다.
하늘이 너무 파랗고, 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태양이 붉게 변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색온도가 조금 더 높은 것 같아요. 처음에는 화이트 밸런스 문제이거나 가지고 있는 노트북 디스플레이 문제인줄 알았는데, 여행 마치고 돌아와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나서 고도나 지역에 따른 색감 차이가 저 혼자 잘못 느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눈에 쏙 들어온 사진은 좌린이 2003년도 이집트 카이로에서 촬영한 [창(窓)]이라는 사진이었다. 액자 구성의 이중 프레임으로 낡아빠진 창 사이로 들어오는 온화한 빛에 비춰진 문고리와 창 뒤편으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동상의 느낌. 그리고 낯선 거리가 정말 매혹적인 사진. 좌린에게 반투명 피사체를 투과하는 역광은 중학교 때부터 즐겨 찍어온 소재였다. 노출 잡기가 애매한 사진은 브라케팅을 충분히 해서 적당한 걸 고르고 디지털 카메라의 최대 장점인 즉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활용한단다. 좌린에게 디지털카메라는 '경험과 계획에 의한 철저한 의도'와 '일단 찍고 봤더니 우연히 잘 나왔더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여행사진을 제대로 찍겠다고 마음먹었다면 필름이나 사진파일 관리가 최우선. 소지품 분실 사고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과 시간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필름은 분실했을 때 절대로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다.
어떤 여행자는 한 달 동안 갈라파고스 군도의 생태계를 수 십 통의 슬라이드에 담았는데, 귀국할 무렵에 슬라이드를 모두 도난당했다.
좌린과 비니 부부가 둘 다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있어 사진기는 두 번이나 잃어버렸지만, 그들의 사진 파일은 매우 꼼꼼하게 관리를 했다고. '이미지탱크'라는 외장하드 카드리더에 기본적으로 사진을 저장하고, 노트북에 한 벌 더 저장해 두는 방법도 좋다.
이 두 가지를 항상 다른 가방에 넣어 다닌다. 20기가 하드디스크가 웬만큼 찰 무렵 시디를 왕창 구워 한국으로 부치고 잘 도착했다는 메일이 오면 보낸 사진을 지웠다.
장기간 여행을 하면서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사진까지 업로드하기 위해서라면 노트북 컴퓨터가 반드시 필요한데, 디지털 카메라나 노트북 컴퓨터는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기 때문에 최대한 주의해야겠지만, 도난이든 분실이든 '사고'는 결국 팔자소관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터는 가급적 백업을 해 분산 보관을 하는 게 좋고 노트북 컴퓨터가 있으면 사진 편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외국의 인터넷 까페는 한국의 게임방과 비교해서는 절대 안 된다. 다이얼 전화연결을 열 대씩 공유해 영업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200메가 하드디스크에 윈도우98을 깔아 여유 공간이 2메가가 안 되는 PC를 발견한 적도 있다고.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매일 촬영한 사진을 다운받고 그 중에서 괜찮은 사진을 골라 보정을 하고 웹 용으로 축소해 놓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인터넷 까페에서 업로드를 할 때 보정해 놓은 사진 중에서 여전히 마음에 드는 걸 추리지요. 사진을 고르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묵혔다 보는'방법인데요, 하루 지나서 다시 보고, 한달 후에 다시 보고, 1년 후에 다시 보고, 10년 후에 다시 보면 결국 좋은 사진을 골라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객관화된 시각'이 매우 중요한데, 이게 매우 힘든 거거든요. 그걸 시간의 힘으로 극복하는 거지요.
그렇게 웹에 올린 사진이 2000장이 넘습니다. 그 중에서 딱딱한 유적지 사진, 개인적인 인물 사진들을 빼고 나머지 중에서 200장 정도를 추려 인화를 했습니다. 그걸 또 벽에 붙여놓고 며칠을 들여다보고는 희망시장에 가지고 나갈 사진들을 선별했습니다.
사진을 팔면서 또다시 사진들을 선별할 수가 있었어요. 요즘도 가끔씩 여행 사진 원본들을 보다보면 '이거 다시 인화해볼까'하는 게 있습니다. 후보정은 주로 커브보정을 합니다. RGB 채널별 커브보정으로 웬만한 색감이나 컨트라스트는 다 해결을 하지요. 출력은 동네 사진관에서 합니다.
사진관 사장님이 사진을 하시던 분이라 인화 품질을 까다롭게 관리하고 계시거든요. 사진관과 집을 몇 번씩 왔다갔다하면서 조금씩 모니터 캘리브레이션을 했구요, LCD의 한계로 조정되지 않는 차이는 느낌으로 커버합니다. 인터넷 인화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단골 사진관의 이점이 많이 있더군요.
집에 쌓여 있는 먼지 쌓인 책과 음반들. 툭툭 먼지를 털어 가끔씩 날씨 좋은 일요일에 홍대 놀이터 옆 공터, 가난한 예술가들과 정신없는 장사꾼들이 섞여 난리법석인 곳, 홍대 프리마켓에 들고 터덜터덜 걸어 나간다.
신문지를 펼쳐 놓고 그 위에 가격이 적힌 메모지와 제품을 올려놓고 따스한 햇빛 아래 책 한권을 읽다 보면, 이런 것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는 나른함에 졸고 있는 나 자신도 발견 한다. 아직 못 가본 독자들이 있다면 꼭 짬을 내서 들려보자.
골라 쇼핑하는 재미가 있다고 하던가? 문화의 거리 홍대의 명물이 되어 버린, 일요일 프리마켓. 요즘 좌린과 비니는 이 곳에서 작은 종이 간판을 내걸고 자신들의 사진을 팔고 있다. 이름하여 “좌린과 비니의 세계여행 사진 가게”.
오천원짜리 예술시장은 없는데 오천만원짜리 예술품 경매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좌린에게는 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원화의 아우라가 제거되고 망점의 조합으로 변화한 인쇄물만이 오천원짜리 시장에 존재할 뿐. 디지털 인화는 원화이면서 복제품이라는 사실 때문에 묘한 경계선 상에 위치해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구입해서 두고두고 감상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사진작품을 들여다 보는 것이 영화 한 편 감상한 것과는 또 다른 어떤 영혼의 울림이다.
“저는 '예술시장' 자체가 매우 크고 넓어지면 좋겠어요. 21세기 대한민국 먹여살릴 문화컨텐츠라는 게 사실 별겁니까. 주말 홍대앞 시장 역시 그러한 지점에 있다고 봅니다. '아트'와 '중국산'의 사이 어딘가를 치열하게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만들고 있지요.”
그 들의 책 뒤편에는 자신들이 촬영한 사진의 메타데이터와 촬영 정보들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 것은 그들의 408일간의 사진들이 모두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이야기 해준다. 책에 기록된 디지털카메라만 4대. G1과 E5700 그리고 G3 그리고 300D. 사실 그는 오래전 소니의 130만화소짜리 플로피 디스켓을 저장장치로 사용하는 마비카 디카를 사용했다. 98년 지하철 파업을 취재하면서 디스켓 디카를 이용해 속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고속버스 기사편으로 서울로 필름을 보내던 시절이 지나갔다는 걸 느끼고 있다.
지금도 필름카메라에 유효기간 지난 슬라이드를 끼워놓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잘 쓰지 않는다. 다만 디지털 사진을 조금 더 해 보고 나면, 언젠가는 창고에 있는 확대기를 집 어딘가에 다시 설치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든다고 한다. 필름으로 회귀는 아니지만 너무 오래 떨어져있다 보니 가끔씩 아련히 보고 싶어지는 옛 친구 같은 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