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아트 | 리뷰

여행사진 없는 사진여행

2013-11-06


‘사진비평 현문현답’은 현대 사진매체와 사진예술의 환경과 담론, 이슈에 관해 두 필자 현린과 김현호가 서로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던지는 비평이자 질문이다. 이번 호는 필자의 사정상 현린의 글만 싣는다. 이번 주제는 여행사진으로, 여행사진 혹은 사진여행의 오래된 역사 그리고 사진과 여행의 관계를 짚어본다.

기사제공 ㅣ 월간사진

핑계의 기원 The Origin of Pretexts

사진을 보고서 여행을 시작해, 사진을 찍으며 여행을 하고, 돌아와 사진을 보면서 여행을 마무리 짓는 요즘, ‘사진 없는 여행’이란 것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여행사진은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대개의 사진이 짧거나 길거나 또는 가깝거나 멀거나 여행의 결과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행 없는 사진’이란 것을 상상하기도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여행과 사진 모두가 산업화, 상품화 그리고 대중화되고 난 이후의 일입니다. 우선 여행 자체가 쉽고도 저렴해져야 했습니다. 토마스 쿡(Thomas Cook)이 1851년 5월에 개최된 런던만국박람회를 맞이해서 철도회사와 협력해 대중여행상품을 기획하고, 10년 후에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이집트 등을 돌고 오는 해외여행상품을 기획한 것처럼, 여행도 생산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되어야 했던 거죠.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접근하기 쉽지 않은 것이 여행이었습니다. 사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아직은 촬영과 현상은 물론이고 원판 제작까지도 현장에서 직접 해야 했으니, 사진을 찍으며 여행을 하려면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사진 장비를 싣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니 왕가나 정부의 지원을 받아 탐험, 보도, 조사 등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소수의 사진가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여행은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특히 먼 이국땅을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의식과 적지 않은 자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당시 여행사진은 단순히 여행하면서 찍는 여행의 부산물이 아니라 엄연한 ‘사진여행’의 산물로서 여행의 목적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핑계 : 낭만, 전쟁, 예술 Three Pretexts : Romance, War, Art

이 열악한 상황에서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나일강 유역까지 사진여행을 다녀온 막심 뒤 캉(Maxime Du Camp)은 무척 특별한 경우에 속합니다. 그 목적이 오리엔트 문명을 왜곡하는 낭만주의 문학에 사실주의 사진으로 맞서기 위해서였다는데, 그의 사진은 모르겠으나 그의 여행은 무척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귀스타브 르 그레(Gustave Le Gray)에게 사진을 배우고 1849년 10월 아버지의 유산으로 구입한 장비를 역마차에 싣고 파리를 출발한 그는 열차, 증기선 다시 열차, 증기선을 갈아타기를 반복해서 유럽을 종단하고 지중해를 건너 약 3주 만에 알렉산드리아 항에 도착합니다. 이후에는 돛배와 가축 그리고 짐꾼을 동원해야 했으니, 정진국의 ‘사진가의 여행법’(2012)에 인용된 뒤 캉의 회고에 따르면 “당나귀와 낙타와 사람 등에 장비를 실어 나르기란 고역이다. 그 당시에 말레이산 고무로 만든 것 같은 특수 용기가 어디 있나. 유리나 크리스털, 도기 등에 약품을 갖고 다녔으니 깨지기 일쑤”였습니다. 열악하기는 교통만이 아니라 촬영도 마찬가지였으니, “당시 사진은 지금과 달랐다. 유리원판이니 신속한 정착, 순간적인 촬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축축한 종이로 원판 한장 찍어내는데 40여분이 걸리는 길고 정밀한 작업에 매우 숙련된 솜씨가 필요했다. 어떤 감광지와 약품과 렌즈를 쓰건, 최상의 쾌적한 햇빛에서도 최소한 2분 이상 노광해야” 했답니다. 열악한 교통과 촬영장비가 얼마나 끔찍했던지 1년 동안 200여장의 사진을 찍은 후에는 현지에 있는 사진가에게 장비를 다 팔아버립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여행을 계속했다고 하는군요.

뒤 캉이 문명의 시원을 찾아 여행하고 있던 무렵, 런던 만국박람회 관람객 수는 6백만명을 넘고 있었으니, 그중에는 훗날 최초의 전쟁사진가로 알려지는 로저 펜튼(Roger Fenton)도 끼어 있었습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상을 총망라했다는 이 박람회에서 그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사진이었으니, 펜튼은 곧 파리로 건너가서 뒤 캉과 마찬가지로 르 그레에게 사진을 배웁니다. 다음 해에는 사진전을 열고 사진기와 함께 러시아 여행을 하기도 하는 등 사진가로서 입지를 굳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55년 당시 크림반도는 기독교 성지이자 이슬람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 문제로 프랑스와 영국, 투르크, 오스트리아 연합군과 러시아가 전쟁 중이었는데, 펜튼은 영국 왕실의 의뢰를 받고서 이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크림반도 남쪽 흑해 연안에 있는 발라클라바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거운 장비를 싣고 유럽을 횡단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전쟁이었으니, 식량은 물론이고 5대의 사진기와 7백장의 유리판 그리고 현상약품 등을 싣기 위해서 특별히 ‘사진마차’(Photographic Van)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하고도 전쟁 포화와 흑해의 무더위 속에서는 촬영은 물론이고 원판 제작이나 현상 작업도 고역이었습니다. 보먼트 뉴홀의 ‘사진의 역사’(1982)에 인용된 그의 말에 따르면, “차문을 닫고 감광판을 준비하기까지 진땀이 온 얼굴을 흠뻑 적셨고, 눈물처럼 방울져” 떨어졌고, “현상에 쓰는 물은 또 어찌나 뜨거운지 거의 손조차 담그기 힘겨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그해 7월 콜레라에 걸려서 준비해 간 유리판의 절반도 쓰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가지고 온 사진 중에는 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포탄의 수를 조작한 사진도 있었답니다. 그의 사진여행에 비해 여행사진은 충분히 뜨겁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한편에서는 고대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 지배권을 놓고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지만, 프랑스나 영국 본토에서는 멀고 먼 이국땅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토라고 사정이 다르지도 않았으니, 한창 진행 중이던 도시 재개발로 인해서 많은 문화유적들이 파괴되고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만, 국외여행은 물론이고 국내여행도 용이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아예 볼 수 없으니 귀한 문화재가 사라지건 말건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죠. 프랑스의 경우 1837년부터 이미 사적위원회라는 것이 설립되어 이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1851년에는 사진조사단이란 것을 만들어 사진으로 문화유적들을 기록해 복원 작업에 사용하기로 합니다. 조사단의 단장은 뒤 캉과 펜튼의 스승인 르 그레였고, 나머지 네 사진가는 에두아르 드니 발뒤스(Edouard Denis Baldus), 이폴리트 바야르(Hippolyte Bayard), 앙리 르 세크(Henri Le Secq), 오 메스트랄(O. Mestral) 등이었으니, 이들은 문화유적들을 기록하기 위해 프랑스 전역으로 흩어져 사진여행을 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단장이었던 르 그레가 사진의 기록성보다는 예술성을 더 강조한 까닭에, 조사단의 사진이 문화재 복원 사업에는 무용지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사진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후 나폴레옹 3세의 전속 사진가가 되었다고 하니, 1860년대에 본격화되어 1년에 백만장씩 찍어내던 여행사진의 상품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의 사진은 오히려 선구적이었습니다. 특히 1850년대 말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에서 찍은 그의 바다 사진은 대단히 낭만적이어서 요즘의 감성적이고 치열한 여행사진들을 위한 모범이라고 할 만합니다.

두 가지 핑계 : 순수성과 진정성 Two Pretexts : Purity and Authenticity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여행과 사진 모두 장족의 발전을 해서, 초기 사진가들이 겪었던 고충들이 대부분 사라집니다. 과거 마차와 열차 그리고 증기선으로 한달 가까이 걸렸던 거리가 비행기 몇 시간의 거리로 짧아졌고,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던 장비는 기껏해야 수 킬로그램으로 줄어듭니다. 지금이야 이코노미석에 끼워져 보내는 그 몇 시간의 비행시간이나 몇 백 그램짜리 사진기 무게도 버거워서 더 빠르고 더 넓은 비행기와 더 가볍고 더 작은 사진기를 요구하지만, 뒤 캉이나 펜튼, 르 그레의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배부른 소리인 셈입니다. 한편 적어도 제1세계의 경우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한 이른바 포디즘이 만개하면서 높아진 소득과 여가로 인해, 한때는 소수의 유한계급만의 특권이었던 여행이 대중화됩니다. 게다가 그동안 생산된 여행사진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과거 부유한 아마추어 사진가나 선택받은 프로페셔널 사진가만 찍을 수 있었던 여행사진을 이제는 다수의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찍게 됩니다. 그 결과 사진 없는 여행이나 여행 없는 사진이란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사진은 여행의 필수품이 됩니다. 그러나 여행의 대중화와 함께 여행사진 역시 대중화되면서, 여행 때문에 여행지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사진 때문에 여행의 진정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개탄하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 됩니다.그러나 돌이켜 보면, 세계를 말 그대로 ‘찍는’ 것이 사진이니 사진기는 찍고자 하는 대상 또는 적어도 그 대상으로부터의 빛과 접촉할 수 있는 ‘그때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록 현실화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사진에 있어 여행은 본래부터 본질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바다에 관한 시나 그림, 사진이 없다고 해서 바다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바다에 관한 시나 그림을 쓰거나 그리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다 사진은 바다에 가야만 찍을 수 있습니다. 해서 누군가가 쓰고 그린 바다에 대한 시나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가 바다를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그가 바다에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 누군가가 찍은 바다 사진을 볼 때 우리는 그가 바다를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그가 바다에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진은 회화보다는 판화의 자동화 즉, 세계 자체를 ‘원판’으로 삼는 판화인 셈입니다. 그러나 피사체가 있는 그때 그곳이 바로 지금 여기인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때문에 피사체를 사진기가 있는 지금 여기로 옮겨오거나 아니면 사진기가 피사체를 찾아 그때 그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으니, 짧고 가까운 여행이건, 길고 먼 여행이건 사진은 여행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의 경우 바다를 옮겨올 수는 없는 일, 바다를 찍고자 한다면 부득불 바다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오직 바다를 찍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여행의 진정성을 훼손할지는 모르지만 ‘사진여행’의 진정성은 오히려 보존하는 것입니다.문제는 여행지의 순수성에 대한 우려 즉, ‘원판’을 찍겠다는 사진이 ‘원판’을 변질시킨다는 지적입니다. 대개 제3세계와 관련해서 제1세계에서 나오는 순수성에 대한 갈망은, 자신들 세계의 순수성을 근대화의 대가로 희생시키고서는 잃어버린 그것을 잃어버린 그곳에서 찾지 않고, 대신 제3세계에서 찾겠다는 갈망입니다. 그러나 이 노스탤지어 자체가 근대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시킬 세계는 유토피아(U-Topia),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땅입니다. 한마디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길 원하는 것이니, 여행지의 순수성이란 실은 여행자의 불순성의 전도된 상, 물신(Fetish)으로서 이미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뒤 캉이 낭만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결국 사진도 없이 무척 낭만적이게도 오리엔트를 여행한 것이나 펜튼이나 르 그레가 사진을 수정한 것은, 당시의 느리고 둔한 사진 그대로는 물신을 물신답게 재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여행과 사진이 발달하고 대중화됨으로써 물신이 물신다운 정도를 넘어 아예 그 실체를 드러내자 더 이상 물신 기능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해서 원함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달리 말해 다시 잃기 위해서 이제 세계라는 원판 자체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포스트포디즘의 시대가 열렸으니, 단지 사진이 아니라 여행지와 여행자 자체를 무대와 배우로 연출함으로써, 순수성과 불순성 모두를 복원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불순한 여행자가 순수한 여행지를 찾는다는 여행의 순수성은 복원되고 그 덕에 여행도 지속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 여행지의 순수성이 복원될지언정 정작 그 원판이 이미 연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사진여행의 결과마저도 여행사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판화 또는 기껏해야 공연사진이 되고 맙니다. 요컨대 사진여행이란 것은 존재할지언정 여행사진이란 것은 사라집니다.

마지막 핑계 : 사진 The Last Pretext : Photography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의 두 주인공 마틴과 루디는 한날 한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는 데킬라 한병과 함께 동병상련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담배와 술을 연거푸 들이키던 마틴이 레몬과 소금을 씹으며 바다와 바람, 여인과 키스에 대한 시 한편을 읊조리자, 루디는 자신은 한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고 하죠. 그러자 마틴이 이런 얘기를 들려줍니다. “천국에는 별다른 얘깃거리가 없어.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을 얘기할 뿐이지. 물속으로 빠져들기 전의 거대한 핏빛 공의 강렬함과 세상을 뒤덮는 바다의 냉기를. 영혼 속의 불길만이 영원한 거야. 그런데 넌, 할 말이 없겠다. 바다를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바다를 향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여행 도중 두 사람이 넋을 잃고 함께 바라보는 것이 있으니, 그게 어느 여행사 쇼윈도 너머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사진 한장, 다름 아닌 바다 사진이었습니다. 서로에게 보내는 미소의 의미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데 직접 바다를 본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그런데 여기서 드러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바다 사진을 보고는 바다를 알아봤다는 것이고, 이는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이 이미 있다는 것 즉, 바다에 대한 얘깃거리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바다로 가야 한다면, 그건 천국에서의 얘깃거리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여행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천국이란 것이 정말 있다고 믿는 것도 아닐 터, 천국을 위한 얘깃거리 운운한 것도 실은 여행을 위한 얘깃거리였던 겁니다. 한마디로 바다도 천국도 핑계였을 뿐, 정말 필요했던 것은 여행 자체였던 것이죠. 그렇다면 그들이 알아 본 바다 사진은 한편으로는 바다 여행을 위한 동기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 여행의 목적이 천국도 바다도 아닌 지상에서의 여행 자체였음을 드러내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천국의 문을 열지는 못할지언정 여행의 문은 열게 해주는 열쇠 말이죠. 혹시 우리들의 여행사진 혹은 사진여행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현린
서울대와 동대학원 및 인도 IIE(Indian Institute of Education)에서 교육철학을 공부했고, 현재는 문예교육디자이너로서 사진과 영화를 만들고 있다. 2009년 9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월간사진에 ‘사진, 책에 길을 묻다’를 연재했고, 2012년 1월 사진전 의 기획을 맡아 참여했다. 제1회 레드 어워드(Red Awards) 사진 부문을 수상했다



facebook twitter

월간사진
새롭게 떠오르고 있거나,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진가가 월간사진을 통해 매달 소개되고 있습니다. 월간사진은 사진애호가와 사진가 모두의 입장에서 한발 앞서 작가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심도 깊은 사진가 인터뷰와 꼼꼼한 작품 고새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표 사진잡지입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