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25
올해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 동안 남과 북의 정치세력은 서로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분단을 이용해왔고, 이 결과 통일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언어, 역사, 정서를 가진 민족공동체라는 사실은 잊혀지고, 반목과 불신이 깊어갔다. 이런 점에서 1950년대의 남과 북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사진은 사료적 가치와 더불어 남북이 동질성을 찾아가는 출발선의 역할을 한다.
글 ㅣ 이종화 기자
기사제공 ㅣ 월간사진
“PX를 중심으로 갑자기 발달한 미군 상대의 잡다한 선물가게들-사진이나 군단의 마크를 수놓은 빨갛고 노란 인조 머플러, 담뱃대, 소쿠리, 놋그릇,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그런 가게 앞에서 나는 기웃거리며 될 수 있는 대로 늑장을 부리다가 어두운 모퉁이에서 숨이 가쁘도록 뜀박질을 했다. 그러나 번화가인 충무로조차도 어두운 모퉁이, 불빛 없이 우뚝 선 거대한 괴물 같은 건물들 천지였다. 주인 없는 집이 아니면 중앙우체국처럼 다 타버리고 윗구멍이 뻥 뚫린 채 벽만 서 있는 집들, 이런 어두운 모퉁이에서 나는 문득문득 무섬을 탔다.” 박완서의 ‘나목’ 중에서
고인이 된 소설가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헤집고 다니던 서울은 어린아이의 눈에 이상한 도시였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된 도시는 미군과 이들을 상대하는 가게들로 번화했지만 한 골목만 지나면 복구할 엄두를 못낼 정도로 파괴된 곳들이 널려 있었다. 그나마 먹고 살아야 하기에 시장이 열리는 곳에는 활기가 넘쳤다. 전쟁이 뭔지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도시는 무섭고 신기한 것들 투성이였다.
일제시대부터 공장과 항만시설이 밀집했던 북한의 함흥은 연합군의 공중폭격으로 제대로 선 건물을 찾을 수 없었다. 1930년 함경남도 정평군 출생인 신동삼은 흥남고급중학교를 마치고 전쟁이 터지자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인민군 부대에 배속되었다. 동해안을 방어하던 507여단을 거쳐 자강도 인민위원회에서 근무하던 그는 마침 사회주의권 나라로 파견할 국비유학생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험에 응시해 선발됐다. 고향을, 그것도 전쟁 중인 조국땅을 떠나야 했지만 다시 안올 배움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37명의 북한 유학생과 함께 그가 도착한 곳은 동독이었다. 신동삼은 이곳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프레스턴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1955년, 500여명의 동독 함흥시 재건단의 통역관이 되어 다시 고향을 찾았다. 동독 재건단은 도시를 설계할 도시계획가부터 측량기사와 건축가 그리고 흙이 주재료인 북한 상황을 고려해 점토 전문가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전후 재건을 도왔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남과 북
1950년대 중후반대의 남과 북의 모습을 사진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사진전시가 열리고, 책이 출간되어 화제를 모은다. 당시는 남과 북이 치열했던 전쟁을 멈추고 복구작업에 매달리던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또한 분단으로 인한 이질감보다는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시기였다. 전쟁의 참혹했던 피해와 아픔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남과 북의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시립대박물관이 9월30일까지 열고 있는 <1950’s, 서울의 기억>전은 박물관이 그동안 수집한 사진 중에서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을 담은 사진만 선별해 열고 있는 사진전이다. 점차 일상을 찾아가는 거리나 시장 사진과 함께 뼈대만 남은 건물이나 피난민들의 천막촌 등은 전쟁의 흔적을 보여준다. 멀리 명동성당이 보여 을지로 주변으로 짐작되는 피난민 천막촌 사진은 당시의 열악했던 생활환경을 말해준다. 서울에서 중구와 용산구는 군수시설과 중요 건물이 밀집해 전쟁을 치르면서 70퍼센트 가까운 건물이 파괴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다. 미군의 PX가 있던 명동은 판이하게 다른 풍경이다. 길거리는 미군들로 넘쳐나고 이들을 상대하는 각종 상점들과 교통정리를 하는 헌병까지 보이는 등 전쟁과는 거리가 먼 번화가의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새로 지어진 부흥주택과 제법 형태를 갖춰가는 시장, 뛰어 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음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있음을 보여주며, 삶의 치열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동질성이 살아있던 50년대의 기록사진
이념이나 사상과 거리가 멀어 보이기는 당시 북한 풍경도 마찬가지다. 눈빛출판사에서 나온 ‘신동삼 컬렉션 : 독일인이 본 전후 복구기의 북한’은 도시의 95퍼센트가 파괴된 함흥의 재건사업을 돕기 위해 파견된 동독 재건단원들이 촬영한 사진을 수집해 만든 아카이브북이다. 재건단의 통역으로 참가했다가 냉전기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한 신동삼이 나중에 수소문해 모은 3천장의 북한 사진이 책으로 만들어졌다.
아카이브북은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북한의 모습을 500장의 컬러사진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후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또한 재건 현장, 5.1절과 8.15 10주년 행사 퍼레이드, 북녘 사람들의 일상, 북녘의 산하와 문화재 등으로 사진을 분류하여 1950년대 북한 사회의 모습을 다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집 몇채만 서있는 황량한 들판은 남한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지만 당시 북한은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지원으로 연간 20퍼센트의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때였다. 남한에선 60년대까지 볼 수 없었던 타워크레인이 세워지고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복구가 이뤄지는 인상을 준다. 또한 당시까지 시장경제가 살아있어 장이 서고, 그나마 피해가 덜한 개성의 한옥촌에는 평온함이 흐른다. 전통방식의 혼례나 해수욕을 즐기는 아이들, 5.1절 행사에서 춤을 추는 여성들에게서는 한민족의 정서적 친밀함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