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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냉엄한 예술세계, ‘사진가의 자존감’으로

2013-05-02


육명심의 타고난 기질은 반항적이다. 80년 인생을 살아오며 가장 기뻤던 때가 군대에서 제대하던 때라고 한다. 사회초년생으로 충남의 한 초등학교에 발령받아서는 석달 만에 교장, 교감과 싸우고 그만두기도 했다. 애당초 꽉 막힌 조직문화와는 화합할 수 없는 기질이었던 셈이다.

사진을 대하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이론가로서 스스로 옳다고 내린 판단이면 고집스럽게 한 길을 걸어왔다. ‘백민’, ‘검은 모살뜸’, ‘장승’ 등 ‘우리것 3부작’을 30년의 시간이 걸려 세상에 내놓았고, ‘예술가의 초상’과 ‘문인의 초상’도 그의 고집이 만든 역작이다. 교육자 육명심은 더욱 엄하고 세심했다. 학생들이 자신의 아류가 될까봐 교직에 있는 동안에는 전시나 출판을 일체 하지 않았다. 3번 이상 책을 읽어오도록 한 후 질문과 문답만으로 진행되는 그의 수업에선 질문의 수준이 곧 점수로 연결돼 학생들은 요행을 기대할 수 없었다. 또 해외유학이란 말 자체가 생소했던 70년대 말에는 일본 오사카예술대학장과 담판을 지어 사진학과 학생을 처음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 사진가로 활발히 활동 중인 준 초이(최명준), 최광호 등이 당시 1세대 유학파였고, 그 뒤를 이어 30여명이 더 일본 유학길에 오르는 등 후학들이 더 넓은 세상에서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선 이가 육명심이었다.

글│이종화 기자
기사 제공│월간사진

최근 육명심의 사진적 고집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사진집 ‘영상사진 1966~1978’(글씨미디어 펴냄)과 지난 사진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서 성격의 책 ‘육명심 이것은 사진이다’(글씨미디어 펴냄) 2권이 출판됐다. 제목부터 생소한 ‘영상사진’은 그가 사진계에 모습을 드러낸 1966년부터 ‘백민’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1978년까지 ‘인상’(印象) 시리즈라는 제목으로 촬영한 사진을 40년만에 정리한 사진집이다. 리얼리즘 사진이 대세이던 시기에 홀로 터득한 사진적 시각에서 촬영한 차별화된 사진들로, 오롯이 주관적인 인상들이 표현되었다. 또 회고서 ‘이것은 사진이다’에는 ‘인상’ 시리즈부터 ‘우리것 3부작’, ‘예술가의 초상’에 이르는 사진작업 전반에 걸친 한 사진가의 일관된 사유의 방향과 솔직한 경험담들이 담겼다. 책에는 외국의 사진풍을 따라가기에 급급해 스스로 모닥불에 뛰어들어 타죽는 벌레를 보는 안타까운 심정이 드러나는가 하면, 잡아먹느냐 잡아먹히느냐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는 예술세계의 냉엄한 현실이 펼쳐진다. 결국 책을 통해 노(老) 사진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예술세계에서 겸손이란 위선에 불과하며, 사진가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려 온몸으로 싸울 때만이 역사의 한 귀퉁이에나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사는 사진을 잘 찍는 사진가들의 역사가 아니라, 각 시대마다 사진을 남들과 다르게 자기 식으로 새롭게 찍어나가는 역사였다. 사진가의 이름이나 잡스러운 것들을 외울 필요 없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면서 짚어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1966년 사진에 입문해 이제 만 50년 가까운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일정한 스승 없이 지금껏 이렇게 나대로 걸어온 것은 사진의 역사가 가르쳐준 그 지혜의 등불이 항상 내 앞을 비추어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 ‘육명심 이것은 사진이다’ 중에서

‘영상사진’은 제목부터 생소하다. 어떤 의미인가?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처음에는 가운데가 텅 비거나 여백이 많은 이미지의 특성에 착안해 ‘중심의 그늘’ 정도로 제목을 생각했는데, 디자이너를 비롯해 주변에서 리얼리즘 사진이 대세이던 시대에 전혀 다른 사진을 했다는 기치를 분명히 드러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어서 그렇게 정했다. 당시에는 ‘영상’이라는 말은 감히 쓰지 못할 때였다. 의미는 간단하다. 사진이라면 기록성을 떠올리는데, 기록성 이외의 그밖의 많은 사진의 잠재적인 기능까지 포함한 접근방식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육안’(Naked Eye)과 ‘카메라아이’(Camera Eye)의 차이로부터 시작된다. 육안으로 보이는 그대로를 찍는 게 재현이라면 카메라아이는 재현의 기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재현성을 넘어선 다양한 잠재적인 기능을 총동원해 표현하는 것이 영상사진이다.

‘인상’ 시리즈는 당시 리얼리즘 사진과 거리가 멀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가?
처음 사진에 입문하면서 사사하는 스승 없이 혼자 사진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정립하게 된 안목을 사진작업으로 옮긴 발자취이다. 사진의 역사는 대학 때 연극과 문학에 심취하면서 터득한 현대문학의 흐름이나 사조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특히 20세기 사진사는 1917년부터 2차 대전 이전까지 약 20년 동안 독일에서 일어난 모더니즘 사진운동으로 대표되었다. 그중 모홀로 나기의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시각’(New Vision)에 주목했는데, 그가 부르짖은 신시각은 카메라아이라는 제삼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때까지 오직 육안으로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전부인줄 알던 나에게 육안을 넘어선 카메라아이는 천지개벽과 같은 일이었다. 기계적 기록성만을 신봉하던 소박한 리얼리즘 사진의 전성기에 대상 자체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주관성이 개입하게 되면서 그전까지 따로 놀던 사진과 정신세계가 차츰 하나로 맞물리게 되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만난 건 더 나중이다. 모홀로 나기에게서 접근방식을 깨쳤다면 브레송에서는 무엇을 담을지 내용을 깨쳤다. 브레송은 대상의 심리적인 의식의 흐름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소재주의를 걱정하며 학생들의 콘테스트 응모를 만류하곤 했는데, 이때 자주 보여준 것이 브레송의 사진이었다. 그래서 만날 나보고 브레송 타령만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사실 좋아하는 사진가는 브레송이 아니라 빌 브란트다. 특히 그의 ‘리터러리 브리튼’(Literary Britain)을 참 좋아한다.

사진 속 여백은 관조의 느낌이 강하다. 작가의 주관적인 의식이 반영된 듯하다.
찍을 때는 전혀 의식 못했는데,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나 역시 놀랬다. 대학시절 이야기를 안할 수 없는데, 당시 나를 지배한 건 철학과 종교였다. 한국전쟁 때 내 발로 교회를 찾아가 세례를 받았고, 대학을 다니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3번과 100번 이상씩 완독했다. 코란도 완독했고, 불교의 대한 관심은 나중에 선불교로 이어졌다. 영문과를 다녔지만 철학과에서 동양철학을 4학기 동안 수강하면서 노장사상에 빠져 살았다. 동양 사상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이것이 사진의 밑바탕이 된 것 같다. 단순히 지식놀음이 아니라 서구 사상과 서구 중심의 가치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에 대한 반항이랄까. 영토를 뺏기면 언제든 되찾으면 되지만 정신적인 식민지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곧 정신적인 자주를 이루려는 것이었고, 이것이 사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 발표 안하고 이제야 발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자로서 학생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연관된다. 90년대에 환갑이라고 떠밀려서 전시한 것 외에는 내 작품을 보여준 적이 없다. 선생은 학생을 위해서 존재한다. 내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나의 아류를 만들 수 있다. 찍고 싶은 것을 찍게 하고, 먼저 답을 알려주기보다는 물어서 스스로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고, 정년퇴임을 한 후에는 여기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퇴임 후부터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해, 그동안 5권의 사진집을 냈다.

당시 리얼리즘 사진가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영상’ 잡지에 몇 차례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그만뒀다. 세계적으로 리얼리즘 사진이 등장하는 시기는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다. 한국전쟁을 거친 이후에 리얼리즘의 등장은 당연했고, 여기에 패전국인 일본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당시의 비평 수준은 누구의 사진이 어떻다는 재단 비평이었지 리얼리즘 자체를 논한 것은 없었다. 사실 예술이론 중에 리얼리즘만큼 다양하고 정연한 것도 없다. 가장 오래된 예술이론이지만 한국에서는 ‘소박한’ 수준의 리얼리즘이었고 재단 비평이 전부였다. 문학으로 얘기하면 일제시대 때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카프나 낭만파와 비슷하다. 제대로 이해를 못한 사이 새로운 게 들어오니 밀려나는 것이다.

지금의 사진가들에게 정신적인 자주는 무엇일까?
나름 현대사진의 정의를 지금 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컨템포러리는 100년 전에도 컨템포러리였고, 지금도 컨템포러리다. 지금 서있는 자리에 대한 표명이다. 그래서 일정한 틀이 없다. 베흐 부부는 당시 자신들의 상황에서 그런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고, 지금 우리가 이것을 따라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백민’ 작업을 하게 된 이야기를 잠시 하면, 당시는 나날이 소득수준이 올라가며 하루아침에 풍경이 바뀔 때였다. 서낭당과 초가집이 없어지고 자고 일어나면 풍경이 바뀌었다. 아차 큰일 났구나 싶더라. 없어지기 전에 정신적인 것까지 함께 기록해 후세에 전하지 않으면 사진가로서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내 문제가 현대사진의 뿌리다. 다른 곳에서 찾으면 안되고, 틀을 가져와서도 안된다. 우리 것이라고 무조건 한국적인 대상을 찍는 게 아니라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정신적인 자주와 사진가로서 자존감이 가장 중요하다.

육명심은 1933년 충남 대전 출생으로 연세대 영문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 서라벌대 사진과 전임대우를 시작으로 75년 신구대 사진과와 81년 서울예대 사진과를 창설하며 교수를 재직하다 99년 서울예대에서 정년퇴임했다. ‘영상사진 1966~1978’, ‘예술가의 초상’, ‘백민’, ‘검은 모살뜸’, ‘장승’, ‘문인의 초상’ 등 9권의 사진집과 ‘사진으로부터의 자유’, ‘세계사진가론’, ‘한국현대미술사 시리즈(사진편)’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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