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1
100년 전, 조선 땅에 루이비통씨가 찾아온다. 그는 조선인 청담녀와 사랑에 빠지고 흔한 러브스토리의 결말이 그렇듯 고향인 프랑스로 떠나고 만다. 홀로 남겨진 청담녀는 루이비통씨를 잊지 못해 그가 남기고 간 가방을 끌어안고 흐느껴 운다. 울고 있는 청담녀의 어깨에는 정인(情人)을 잊지 않으려는 ‘불국루비통’(佛國漏悲痛)이란 문신이 새겨져 있다. 즉 프랑스(불국)로 루이비통을 떠나보낸 비통한 심정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또다른 이야기는 100년 전 파리의 살롱과 100년 뒤 서울의 놀이공원이 무대다. 한 소녀가 살롱에서 샴페인을 음미하며 생각에 잠겨 있고, 그 사진을 현대의 놀이공원에서 똑같은 소녀가 보고 있다. 과거의 자신을 찾으려는듯 소녀는 이곳저곳을 헤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이런 모습을 100년 전 살롱의 소녀가 다시 사진으로 보고 있다.
기사 제공│월간사진
루이비통 가방과 페리에 주에 샴페인 회사의 두 광고사진을 찍은 이는 김용호다. 비통의 눈물을 흘릴 만큼 정인과 같은 가방, 100년의 시공간을 추월해 아름다운 인생을 즐기는 샴페인이란 스토리로 구성된 광고 연작사진들이다.
이처럼 김용호의 커머셜 사진은 제품의 세부정보나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관한 독창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소비자들이 누리고 얻을 수 있는 가치와 문화를 전달한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비슷한 문화적인 배경을 지닌 이들에게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반향을 일으킨 김용호의 엘칸토 광고사진에는 남성들의 구두 사이에 도드라지는 한 켤레의 여성 구두가 등장한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회사에 입사한 여성이 신입사원 환영 회식자리에서 벗어놓은 구두다. 이때 구두는 단지 신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운의 꿈을 안고 새로운 인생에 도전하는 꿈을 상징한다. 비록 구두의 주인은 보이지 않더라도 관객이자 소비자인 우리는 빛나는 구두의 존재감에서 한 여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지난 20여년간 사진을 통한 문화적, 감성적 소통을 시도해온 김용호의 사진은 항상 화제를 몰고다녔다. 또 사진가로서뿐만 아니라 디자인, 홍보 기획, 파티 플래닝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문화예술인들이 교류하는 청담동 문화의 창시자로서 그의 행보 역시 늘 주목을 받아왔다. 사진작업에서도 광고사진과 순수사진을 오가며 미술관에서 전시를 여는 등 경계나 영역을 한정지어 김용호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최근에 그는 독특한 사진전을 열었다. 현대카드의 의뢰를 받아 촬영한 그의 사진이 상업화랑에서 전시된 것이다. 광고사진을 판매한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얘기지만 사실이라면 기록에 남을만한 사건이기도 하다. 흔히 광고사진이라면 상품 판매가 목적이며 광고가 게재되는 동안만 보여지다 사라지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도 광고로 쓰이는 이미지를 클라이언트인 현대카드와 무관하게 상업화랑이 판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그의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김용호의 사진전
<우아한 인생>
(8월30일~10월14일)전이 열리는 서울 한남동의 류화랑을 찾았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가 제작했다는 영상물이다. 화려한 벨르 에포크 시대를 오마주한 샹들리에를 배경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에서 오브제들이 떨어진다. 성적 욕망과 다산을 의미하는 물고기, 획일화되어가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로봇 장난감, 부유함의 상징인 진주 등이 천장에서 떨어지지만 이내 바닥으로 스며들어 소멸되고, 마지막에 카드만이 남는다. 리드미컬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사라지지 않고 유일하게 남는 카드는 그것이 가진 전지전능함과 동시에 소비에 형태에 뼈있는 잔상을 남긴다. 20여점의 전시 작품에서는 먹고 마시고 어울리는 인간의 본능적 행동들이 소비와 욕망이 투영된 우리시대의 ‘우아한 인생’들로 펼쳐진다. 김용호는 카드가 지닌 의미를 분석하고, 직접 소품과 스타일링도 챙겨 자신만의 독특한 해석이 담긴 카드 광고사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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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사진이 판매를 위해 전시되기는 아마 처음인 것 같다. 그전에 ‘우아한 인생’의 메인 작품이 현대카드 본사 로비에 줄리앙 호피의 작품과 함께 걸리는 등 여느 광고사진으로 촬영된 것 같지 않다. 어떻게 제작된 작품이고, 전시를 열게 된 계기는?
우선 전시 제의를 받고 고마웠다. 광고로만 끝나지 않고 작품 자체가 영속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며,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현대카드와는 수년째 브랜드 이미지 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다. 개별 제품이 아니라 문화기업으로서 브랜드 이미지를 예술작품과 매치시키는 것으로, 예술과 경영의 콜라보레이션 정도로 칭할 수 있겠다. 기업이 제작비나 물품을 지원하는 형태의 메세나 활동과 다르게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와 맞으면서 작가의 역량을 표현하는 문화 콘텐츠를 함께 만드는 것이다. 일종의 파트너 관계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상업적인 메시지와 함께 작품으로서 영속성도 가져 커머셜이면서 파인아트 작품이기도 하다. 내년에 서울 이태원에 현대카드가 문을 여는 공연장과 전시장을 갖춘 문화공간에서 보다 다양한 결과물이 전시될 예정이다. 콜라보레이션 관계에서 한층 더 긴밀하게 결합된 관계에서 제작된 작품이 판매 목적으로 전시되는 것은 클라이언트인 기업의 입장에서 자신의 제품이 들어간 사진이 작품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반길 일이다. 또한 일회성 광고로 그치지 않고 판매가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면서 작가들에겐 자극제가 되고 더 신중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우아한 인생’에는 다양한 오브제들이 등장하고, 시각적 강렬함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어떤 스토리로 촬영된 사진인가?
당신이 이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기분, 문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왔다. 현대카드 광고는 여기서 더 표현의 깊이가 깊어지고 세련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에게 카드는 욕망을 대변한다. 누구나 갖고 싶어 하며,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제2의 화폐다. 카드 하나로 우리는 거의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다. 쇼핑과 데이트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과 연관이 되며, 작업에서는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등장하는 오브제들은 대부분 수십년 동안 내가 수집해온 것들이다. 물고기 화병은 성적 욕망과 다산, 풍요로움을 뜻하고, 로봇은 단순화, 확일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의 이미지다. 페트라 두상은 시리아의 석두상으로 역사와 지성을 상징한다. 두상 머리에 연필을 꽂아 둠으로써 스스로 자제해야 할 욕망과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도록 한다.
판타지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사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 관심, 정보의 축적이다. 책이든 신문이든 영화든 닥치는 대로 보고 느끼고 경험해야 한다. 그 다음 퍼즐의 마지막을 채우는 조각은 계산되지 않은, 이론에 의지하지 않는 경험에서 우연찮게 얻어지는 것들인 것 같다. 내가 대표로 겸업하고 있는 도프앤컴퍼니는 파티 이벤트를 여는데, 파티라는 게 즐기고 노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파티만큼 한 순간의 행동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파티에서 실수하면 한순간에 배척되고, 반대로 돋보이면 일약 스타가 된다. 순간의 예기치 못한 기회를 통해 화려하게 인생이 빛날 수 있고,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바보 같은 행동에서 깨달음을 얻는 적이 일상에서 우연찮게 발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론적, 논리적으로 뭔가를 이해하려고 한다. 최고의 요리사가 최고의 요리법으로 만든 음식이라도 맛이 없으면 그만이다. 실제 좋은 것은 설명할 필요 없이 먹어봐야 하고 맛이 있어야 한다. 최고의 사진가와 배우, 스태프들이 모였다고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게 아니다. 예기치 못한 변수에서 대박이 나오곤 한다. 시안에 얽매여서는 기본은 하겠지만 그 이상을 넘지는 못한다. 자양분이 될만한 정보라면 끊임없이 흡수하고, 스스로의 판단력을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전시성과는 어떤가? 판매나 관객의 반응이 궁금하다.
현대카드가 지원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전시로 알고 오는 분들이 더러 있다. 일반 관객들은 흔히 보는 광고이미지와 다르다는 점에서 호감을 느끼고, 이것이 제품에 대한 호감으로 귀결되고 다른 해석이라는 점에서 전시장을 찾은 클라이언트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고급 레스토랑 등 몇 곳에서 매장 분위기와 어울린다며 구매 문의가 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전시 개막식 때 사진가 육명심 선생이 오셨다. 전시장을 둘러본 뒤 ‘10년은 더 광고사진 찍겠다’고 하시더라. 상업사진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일을 주는 클라이언트가 있어야 한다. 내 나이면 진작에 일이 없어졌겠지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은 나이와 무관한 것 같다. 스스로 아이디어는 누구에게도 안 뒤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육선생이 인정해줘 감사한 마음이었다.
2003년 ‘한국문화예술명인’전(스타타워 갤러리), 2007년 ‘mom’전(대림미술관), 2011년 ‘피안(Pian)’전(서울디자인페스티벌 특별전) 등 꾸준히 순수작업을 발표해왔다. 커머셜 작업과 병행하는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과 갈망 같은 게 있다. 커머셜 작업은 수입이 보장되고 정확한 일이지만 파인아트 작업은 확정된 수입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하고 싶어지고, 꾸준히 그래왔던 듯하다. 돈벌기 바쁘다고 미루면 끝내 못하고 만다. 아이디어란 그 시기에 나오는 이유와 나에게 필요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작업들이 작가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더 수준 높은 작업의 형태로 전이시켜주었다. mom(몸) 작업은 지큐 잡지에서 의뢰받은 유명인의 일반적인 누드 작업이었다. 과연 몸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우리가 아는 표면적인 몸이 아닌 진짜 몸, 정신과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서 몸이라는 철학적인 사유로 연결되었다. 우리가 평생 보지 못하는 몸의 뒤편을 마치 신대륙을 탐사하는 것처럼 촬영한 작업으로, 새로운 대륙에서 발견한 생명체를 표본화하고 채집하는 식이었다. 몸 작업에서 더 철학이 정립되고 확장된 것이 피안 작업이다. 몸 작업이 다소 개념적이었다면 피안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사진이다. 물 아래라는 다른 시각에서 보면 물 위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지만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인다. 일과 작업에 관해 몇 년간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는데, 일상의 피안이 무얼까를 생각했다. 하루일과를 끝내고 친구와 가지는 술자리 이런 게 피안이 아닐까. 몸을 통해 다소 어렵고 철학적으로 접근했다면 힘들었던 시기를 거친 뒤에는 가까운 곳에서 나에게 피안을 주는 작업과 대상을 찾게 됐다. ‘형식은 본질의 너머에 진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 같다.
사진이란 작품 자체로 말한다고 한다. ‘포토 랭귀지’라는 말을 쓴 적이 있는데 스토리텔링과 새로운 시각을 통해 포토 랭귀지를 시도하는 것 같다. 여러 일을 겸업하면서 사진에 충실한 사진가의 태도와도 연관되는 것 같다.
사진 그 이상의 것, 보이는 것 이상을 통해 사진작품은 영속성을 가질 수 있다. 디지털화되면서 사진의 가치나 신비감이 많이 퇴색된 게 사실이다. 쉬운 장르라고 인식되는 것인데, 그러나 사진이 가지는 가치는 기술적으로 쉬운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객이 원하는 것, 정해진 것만 해서는 고루해진다. 작가 입장에서는 더 어려워지고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 우연한 만남에 관해 자주 생각하는데, 이런 것을 통해 조금 다른 생각이 가능하고, 사진 외적인 교류와 실천이 사진을 더 잘 찍게, 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동일한 가치를 위한 것이고,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내야 한다. 시대는 계속 바뀌고 작가의 열정, 혼이 절대적이던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이전에는 작가로서 터부시되던 영역이라도 경험하고 확장성을 가질 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 사진 한장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획안 전체의 스토리를 만들고 단서를 확장시켜 사진이 지닌 효과를 매체나 사회적 맥락에서 규정하는 등 더 넓은 시야와 플러스알파가 필요하다.
준비 중인 개인작업은 어떤 게 있는가?
20세기 초반 개화기 신여성에 관한 작업이다. 어떤 분야의 원류, 뿌리를 찾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한국의 문화예술 명인에 관한 포트레이트 작업처럼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의 문화예술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류 열풍이라는데 그 원류에는 최승희가 있었고, 개화기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현재 우리 사회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개화기 신여성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만능 엔터테이너, 우리 시대 최고의 멋쟁이, 영감을 불어넣는 사진가. 김용호를 지칭하는 수식어들이다. 김용호는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나 공간지의 사진부장, 에스모드 서울 홍보부장을 거쳐 현재는 광고디자인, 홍보마케팅, 파티 플래닝, 사진 스튜디오 등 다양한 일을 하는 도프앤컴퍼니의 대표로 있다. 2012년 'ENCOUNTER(S)'(서울 부티크 모나코 더 페이지 갤러리/베이징 SZ art center), 2011년 '피안-서울디자인페스티벌 김용호 특별전'(서울 코엑스), 2010년 '집을 위한 나눔의 기록'(서울 아덴힐리조트), 2009년 '신데렐라 사진전'(서울 예술의전당), 2007년 'mom'(대림미술관/2008년 베이징 따산즈 스페이스 눈 갤러리), 2007년 'Firenze Florence Ferragamo'(서울 살바토레 페라가모) 등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