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5
입수하기 전, 다이버가 가장 먼저 배우는 기술은 ‘자기구조’(Self rescue)다. 물속 세상은 다 큰 어른에게도 걸음마를 연습시키며 모든 것을 ‘제로’로 돌려놓는다. 다이빙과 동시에 지상에서 자신을 감싸던 모든 보호막이 허물어지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구원은 자기 자신이 된다.
글│현정아 기자
기사 제공│월간사진
와이진(Y.Zin, 34)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물속에 뛰어들었다. 왼쪽가슴이 아닌 중앙에서 뛰는 심장, 남들보다 작은 폐, 선천적으로 약하게 타고난 달팽이관 등 수중촬영에 불리한 여러 악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은 이러한 ‘마이너스’조차 ‘제로’로 만들어 주었다.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사진가, 수영을 못하는 다이버의 콤플렉스와 열등감도 물을 머금고 흐릿해졌다. 이처럼 수중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많은 것들을 비워내는 만큼 결핍된 무언가를 채워주기도 했다.
와이진은 크릭앤리버 소속 사진가로 영화, 드라마, 포스터, 광고, 패션화보 등 커머셜 촬영 외에도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한편으로는 내셔널지오그래픽 다이버 수중사진가로 각종 수중촬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의상학을 전공한 촉망받는 스타일리스트였다. 같은 학교 동기였던 탤런트 박경림의 스타일리스트를 시작으로 약 7년 동안 조인성, 보아, 비, 이효리, 최강희 등 국내 정상급 스타들의 스타일을 책임지고 VOGUE, BAZZAR 등의 잡지사에서 일하는 최연소 스타일리스트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저장용량이 부족해 핸드폰 3개를 들고 다닐 만큼 스타일리스트로 승승장구하던 그녀가 돌연 사진가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내 최초로 내셔널지오그래픽 다이버 자격증을 딴 수중사진가가 되었다. 험난한 모험을 보란듯이 즐기는 그녀의 ‘거칠고 여린’ 삶의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프로페셔널한 스타일리스트 ‘지니’
의상학과를 전공하고 패션업계에 종사한 독특한 이력이 눈에 띈다.
부모님의 반대로 하고 싶었던 공부를 포기하고 절충안으로 택한 곳이 의상학과였다. 꿈을 안고 여러 준비를 거쳐 의상학과에 들어온 친구들 틈에서, 꿈을 접고 아무 준비 없이 의상학과에 들어온 나는 열등감과 오기로 그 간극을 좁혀나가야 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지 않아서 유독 데생에 약했지만 ‘테크닉이 부족하면 아이디어로 승부하라’는 나름의 생존전략을 펴나갔다. 그러던 중 1학년 때 구두디자인 공모전에서 뜻밖에 대상을 수상했고 그것을 계기로 현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교수님들의 일을 자주 도와드리게 됐다. 또 이전부터 직접 팀을 꾸려서 패션쇼 무대 뒤의 헬퍼로도 일했는데 유독 우리 팀을 아껴주셨던 고 앙드레김 디자이너의 숍에서 일하게 되며 점차 무대 디자인, 패션쇼 디렉팅, 모델 스타일링 등 비중 있는 일도 맡을 수 있었다.
재능이 있었고, 전화위복이 됐던 셈이다.
애초에 뜻이 없었던 길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비뚤어질 수 있는 시기였지만 뜻밖의 대상 수상은 무모하고 무력했던 내게 더욱 무모해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또 워낙 자존심이 강한 편이라 이왕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하고, 무엇을 하든 프로처럼 해내고 싶었다. 패션쇼 무대 뒤에서 헬퍼로 일하면서도 스스로 하찮아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당시만 해도 헬퍼의 역할은 무대 뒤에서 모델의 옷을 입혀주는 정도였지만 내가 이끄는 팀은 조금 달랐다. 모델의 구두가 벗겨지면 양면테이프로 척척 고정시켜주고 급하게 입다가 찢어진 옷은 즉석에서 꿰매주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센스를 발휘했다. 덕분에 일주일도 안돼 업계에 소문이 퍼졌고 그 이후로는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마도 프로 이전에 이미 프로처럼 행동한 것이 큰 이유이지 않았을까.
한때 잘 나가던 스타일리스트였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학교 동기인 탤런트 박경림이 시트콤 ‘논스톱’ 촬영을 앞두고 스타일리스트를 구하고 있기에 흔쾌히 도와주었다. 서로 배역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대본을 보면서 캐릭터에 맞는 의상, 헤어, 메이크업 등 전체적인 스타일을 연구했다. 당시 방송국 안에는 콘셉트를 가지고 전문성 있게 스타일을 짜는 코디가 없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다. 이때부터 ‘지니’라는 가명으로 많은 연예인의 스타일리스트를 맡게 됐고 VOGUE와 BAZZAR 등 잡지로 활동을 넓혀 하루도 쉬지 않고 7년 동안 꼬박 일했다.
김중만의 “너 사진 해라” 한마디에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두고 사진을 시작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 사건이 있었다. 화보를 찍기 위해 협찬 받은 명품들이 종종 도난당하곤 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한번 깨지니 별것 아닌 일에도 주변 사람을 의심하게 됐고 심적 고통이 날로 심해졌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당시 쓰고 있던 핸드폰 3개를 모두 쓰레기통에 던졌다. 며칠 동안 죽은 사람처럼 지내다가, 그래도 고마웠던 분들에게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 내게 처음으로 VOGUE 스타일리스트를 맡겨주었던 에디터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김중만 작가의 스튜디오에 있다기에 그곳을 찾았고, 옆에서 내 디카 속 사진을 구경하던 김중만 작가가 건넨 “너 사진 해라”라는 말 한마디에 덜컥, 두번째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디카 안에는 어떤 사진이 담겨 있었나?
배우 최강희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할 때 서로 망가진 모습을 찍으며 장난을 치곤 했다. 재밌자고 찍은 사진이지만 워낙 예쁘기만한 사진에는 매력을 못 느꼈다. 아무래도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외할아버지는 손자손녀들을 나란히 앉혀놓고 ‘너희 할머니가 얼마나 예쁜지 좀 봐라’ 하시며 당신께서 찍으신 사진을 보여주시곤 하셨다. 막상 찍은 사진을 보면 곱게 단장한 할머니 모습이 아니라 주름 가득한 발가락 사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발가락 사진에서 할아버지가 보았던 할머니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아무리 망가진 모습이어도 그 안에 애정이 담겨 있다면 보는 이에게도 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김중만 작가 역시 내 사진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사진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았나?
사진을 시작한 것은 그림 한번 제대로 그려본 적 없던 내가 의상학과에 진학한 것과 비슷했다. 결코 무난하지 않은, 어쩌면 무모한 길이었지만 워낙 쉬운 것에 매력을 못 느끼는 성격이다. 어딘가에 소속된 학생이었다면 그곳의 교재만 봤겠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각 대학교의 사진학과 교재를 모두 섭렵하며 치열하게 공부해나갔다.
국내 첫 내셔널지오그래픽 다이버 수중사진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수중촬영에 또 한번 도전했다. 계기가 있었나?
DSLR의 보급으로 누구나 훌륭한 사진을 찍게 된 시대에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만의 콘셉트가 필요했다. 이후 특수촬영 기법에 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다가 우연히 너바나의 ‘Nevermind’ 앨범재킷으로 쓰인 제나 할러웨이의 수중사진을 보게 됐다. 시작은 그랬다. 이미지의 강렬함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내 한계를 시험하는 요소가 많았던 것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물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니까.(웃음)
수중사진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처음엔 카메라가 물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수중촬영에 무지했다. 유학을 떠난 친구들의 도움으로 카메라를 보호하는 특수 케이스인 ‘하우징’이라는 장비에 관해 알게 됐지만 장비와 기술의 문제는 오히려 나중 문제였다. 먼저 다이빙을 배워야 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스킨스쿠버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지금의 코치인 찰리를 만났고 2008년에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다이버 자격증을 땄다. 사진가 중 국내 최초라는 사실은 이론시험과 체력테스트 등을 거쳐 최종 합격이 결정돼서야 알게 됐다. 참고로 내셔널지오그래픽 다이버 자격증은 운전면허시험처럼 이론시험과 실기시험을 따로 보는데, 깊은 바다나 기온이 낮은 바다를 들어갈 때는 또 다른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그 뒤로도 인터넷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찾아보거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 개최되는 다이빙박람회에 찾아가 수중사진가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장비와 촬영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자 직접 초대하여 개인레슨을 해준 작가도 있다. 이밖에도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세부에 있는 할리우드 수중촬영 시스템 학교에 찾아가 지도를 받기도 했다.
수중촬영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보통의 커머셜 작업과 함께 의뢰가 들어오면 드라마나 연극 포스터, 화보 등을 수중촬영으로 작업하고, 개인적으로는 바다 속 생태를 촬영하고 있다. 예전의 수족관 촬영은 모델만 물에 들어가고 모든 스태프들은 수족관 밖에 있었지만, 수족관에서가 아닌 수중촬영은 사진가와 모델은 물론 조명팀부터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아티스트 등 모든 스태프들이 물속에 들어간다. 특히 수중에서는 옷이나 머리카락의 흩날림 하나도 컨트롤이 필요하고 원단의 재질에 따라 흩날리는 정도와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리스트가 직접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그래서 모든 스태프들이 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고 물속에 들어가 수신호를 통해 촬영을 진행한다. 처음 들어온 스태프는 수습기간을 거쳐 약 1년 이상 훈련해야 본촬영에 참여할 수 있다.
바다 속을 촬영할 때는 가장 먼저 위급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는데, 가령 상어를 만났을 때의 대처법이나 가까이 가면 안 되는 생물들을 배운다. 그러나 모든 바다 속 생명은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절대 해치지 않는다.
수중사진 외에 최근의 관심사는?
더욱 발전된 수중촬영기법을 연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해양보호에 관심이 많다. 사진은 곧 ‘메신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 나의 사진으로 인해 해양오염의 심각성을 자각했으면 좋겠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바다에 무관심하다. 멀리서 보면 황홀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황폐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끈기, 근성이 강한 것 같다. 원동력은 무엇인가?
첫번째는 사람. 처음 다이빙을 배우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의 버디로서 옆을 지키는 찰리 코치는 빨주노초파남보 순서로 색이 없어지는 바다 속에서의 공포를 극복하게 해줬고 내가 밀어내지 않으면 물도 나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자연과의 소통법도 알려주었다. 이밖에도 수중사진가에게 가장 중요한 ‘미련을 버리는 법’, ‘포기하는 법’을 알려준 것도 찰리였다. 멋진 사진 한장을 찍는 것보다 탱크의 남은 산소를 확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번째는 내 안의 콤플렉스다. 어쩌면 이곳까지 나를 끌고 온 것은 콤플렉스가 아니었을까. 자신과의 싸움에서 늘 그것을 미끼처럼 사용해왔던 것 같다. 그러나 물속에서만큼은 마음속의 불꽃도 잠시 누그러진다. 내 호흡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곳은 물속이다. 그곳에선 누구와의 경쟁이나 열등감 없이 온전한 내가 되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다. 내가 어느 순간에 당황하는지, 내 심장소리와 호흡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