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24
잘 알려진 피아노연주곡 ‘고양이 춤’은 본래 피아노 독주곡이지만 연탄곡 버전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11월17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춤’ 역시 사진과 영상이라는 매체의 앙상블로 연주된 영화버전 ‘연탄곡’이다. 영화 속 길고양이들의 삶은 비록 피아노곡처럼 경쾌하진 않지만, 그들만의 사연과 이야기들은 길고양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을 경쾌하게 깨내고 있다.
글│현정아 기자
기사제공│월간사진
영화는 시인이자 여행가인 이용한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지난 4년간 길고양이를 기록한 사진 에세이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명랑하라 고양이’, ‘나쁜 고양이는 없다’(북폴리오 펴냄) 등 모두 3권의 고양이 시리즈를 출간한 바 있다. 2009년 가을, 우연히 이용한 작가의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책을 읽게 된 CF감독 윤기형은 그 속에 담긴 수많은 고양이 이야기와 사진들을 보며 고양이 사진으로만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스틸컷으로만 구성하고자 했던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사진과 영상이라는 두 매체의 병렬 구조로 완성됐다. 윤기형 감독은 지난 1년간 출퇴근길 혹은 담배 사러 나가는 길 등 틈틈이 핸디캠을 가지고 다니며 동네 길고양이를 영상으로 기록하였고, 여기에 음악, 내레이션, 애니메이션 등을 첨가하여 75분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탄생했다.
인디다큐페스티발, 서울환경영화제,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등 여러 영화제에서 큰 호응을 얻은 ‘고양이 춤’은 전국 24개관의 비교적 소규모로 개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봉 18일 만에 독립영화 흥행기준인 1만 관객을 돌파했다.
고양이 사진이 영화가 되기까지
월간사진(아래 사진) : 세계 최초 길고양이 다큐멘터리라고 들었다.
이용한(아래 이) : 물론 방송에서 ‘인간과 고양이’와 같은 고양이다큐를 제작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 고양이들의 단편적인 모습들만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는 고양이가 주연, 조연, 단역이 되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고양이가 주인공인 영화는 이 영화가 세계 최초이다.
윤기형(아래 윤) : 그렇다.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큐는 길고양이들의 생태, 위기 등을 다룬 뻔하고 단편적인 이야기일 뿐, 그곳에 주인공은 없다. 나는 주인공이 있는 다큐를 만들고 싶었다.
사진 : 많은 영화제에 참여했는데, 그곳 반응은 어땠나?
이 : 제일 처음 인디다큐페스티발 영화제에 참여했다. 첫회 상영은 매진이었고 그 이후에도 거의 만석이었다. 우선 국내에 처음으로 고양이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애묘인들이 관심을 가졌다. 대부분 호평이었지만, 가끔 날카로운 지적을 들을 때도 있었다. 가령 고양이만 나오기 때문에 내용이 다소 밋밋하다, 딱히 눈물샘을 자극할 만한 극적인 장면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은 윤감독과 나 역시 계속해서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전국상영이 결정된 후에는 3분의 1가량을 재편집하여 극장판으로 다시 만들었다. 명장면으로 꼽히는 ‘바람이’ 사연과 고양이 출산장면 등은 재편집 과정에서 추가된 것들이다.
윤 : 무엇보다 특이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보통의 다큐들과 달리 이 영화는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보는 이가 가볍게 공감하길 바랬다. 고양이들도 인간과 다름없이 길에서 살아가고 사랑하고 죽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수의사나 동물보호소에서 들려주는 노골적인 내용은 집어넣지 않았다.
사진 : 영화화하게 된 이유는?
윤 : 사실 이 작업을 하기 전까진 고양이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부정적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책을 읽고 그 속에 담긴 고양이들의 따스한 사진과 사연에 반했다. 나처럼 고양이에 관심조차 없던 분이 고양이를 알아가고 그들과 관계를 쌓아가는 모습들, 그 이야기 자체가 너무 좋았다. 단순히 고양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의 책이었다면 그만큼 매력을 못 느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고, ‘라제떼’와 같이 사진으로만 구성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극장개봉까진 꿈도 못 꿨고, 처음엔 자기만족을 위해 시작했었다.
사진 : ‘고양이 춤’의 샘플영화였던 ‘라제떼’는 어떤 영화인가?
윤 : 흑백사진으로만 이루어진 26분짜리 단편 극영화이다. 프랑스 영화감독 크리스마르케의 작품으로 영화 ‘트웰브 몽키스’의 원작이기도 하다. 사진만으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재밌었다. 그래서 이작가의 사진으로 20~30분짜리 다큐영상을 만들어봤지만 금세 좌절해야 했다. 나의 자만이었다.(웃음)
사진: 어떤 점에서 한계를 느꼈나?
윤 : ‘라제떼’는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로 스토리와 주인공이 있는 극영화이지만 고양이 영화는 구분도 안되는 고양이 사진이 20~30분이나 나온다. 내가 봐도 지루하더라.(웃음) 그래서 처음의 계획을 수정하여 영상을 추가하게 되었다. 처음엔 브릿지 형식으로 쓰려고 했는데, 어느새 1년 동안 찍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만의 이야기가 생겨 이작가의 사진 이야기와 나의 동영상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의 ‘삶’을 찍다
사진 : 길고양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이 : 하루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집 앞에 나가보니, 은갈색 소파 위에서 어미고양이가 다섯 마리 새끼고양이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유난히 밝았던 달빛 아래, 새끼 고양이들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 고양이의 모습이 굉장히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보름 후 다시 집 앞에 찾아온 고양이들에게 멸치 등 먹을 것을 조금씩 주다 보니 자연스레 정이 들었고, 처음 여섯 마리로 시작해 어느새 마을 전체 30여 마리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주게 되었다.
사진 : 고양이 사진은 왜 찍게 되었나?
이 : 사진은 한달 정도 후부터 찍기 시작했다. 처음의 강렬한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유심히 고양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게 되면서 그들만의 민첩하고 돌발적이고 유연한 몸짓 속에 끝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 사이에도 역사와 사연이 있고 얽혀있는 관계가 있다. 즉, 행동 하나하나에 흥망성쇠가 다 녹아있더라. 그것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사진 : 길고양이는 유독 경계심이 많은데, 어떻게 촬영했나?
이 : 책에 이런 이야기를 쓴 적 있다. ‘고양이에게 신뢰받지 않고는 신뢰할 만한 고양이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이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꾸준히 밥을 주고 각자의 특징에 맞게 이름도 지어주니 서로 정과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경계심이 사라지기까지 어떤 녀석은 3개월이 걸린 반면 어떤 녀석은 3일 만에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
사진 : 자신의 사진이 다른 고양이 사진과 다른 점은?
이 : 나보다 고양이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많다. 예술적인 구도에 노출이 정확히 맞은 포토제닉한 고양이 사진도 좋지만 나는 진실성이 담긴, 고양이만이 가지고 있는 사연들을 끄집어낼 수 있는 사진을 찍고자 했다. 현재 많은 블로거들과 사진전문가들이 고양이 사진을 찍고 있지만 대부분 한 고양이와 신뢰를 쌓으며 그의 일생을 기록하진 않는다. 이는 사진의 퀄리티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진 : 사진은 어떤 식으로 배웠나?
이 : 따로 배운 적은 없다. 예전에 한국 지오(GEO)에서 편집팀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 지오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기사를 취사선택해서 잡지에 싣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보니 좋은 사진과 기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후에 프리랜서 여행가로 활동하며 여행사진을 위주로 많이 찍었다. 아무래도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일을 해와서 그런지 내 사진 역시 다큐멘터리적인 작업으로 흐르더라.
또 다른 시작과 도약
사진 : 윤감독은 최근 고양이구름필름의 대표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앞으로도 영화를 제작할 계획인가?
윤 : 그렇다. 틈나는 대로 써오던 시나리오가 있어 생업인 CF감독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선에서 극영화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광고는 아무래도 내 작품이란 생각이 안 든다. 그저 의뢰 내용에 따라 충실히 연출할 뿐이다. 언젠가 내 목소리가 담긴 극영화를 제작해보고 싶다.
사진 : 이작가의 고양이 책은 3권으로 시리즈가 완결되었다. 이후에는 어떤 작품을 계획 중인가?
이 : 독자들은 왜 더 쓰지 않고 3권에서 끝내냐고 물어온다. 아무래도 다큐멘터리 식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혔다. 고양이들의 사연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이 필요하고, 내가 기록하고 관찰하는 고양이가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나 2~3권에 등장했던 고양이 가운데 열댓 마리가 쥐약으로 세상을 떠났다. 책의 주인공과 다름없었던 고양이들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앞으로는 다큐멘터리 형식이 아닌 다른 콘셉트로 고양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다룰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