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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그곳에 서고 싶었던 ‘젊은 나’를 찍는다

2012-04-25


“대단한 산악인도, 훌륭한 사진가도 아니에요. 그저 산과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 늦기 전에 작아질 대로 작아진 나의 꿈 히말라야 14좌를 사진으로 남겨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글│이종화 기자
기사제공│월간사진

박창규(64)씨는 지난 9월 중순부터 한달간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와 로체 두 봉우리를 카메라에 담아서 왔다. 앞으로 4년에 걸쳐 8천미터가 넘는 히말라야의 14개 봉우리를 모두 사진에 담는다는 계획의 첫 걸음을 옮겼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50m)와 4번째로 높은 로체(8,516m) 촬영을 위해 그는 해발 4천미터까지 올랐다. 인간이 고산증을 가장 많이 느낀다는 에베레스트에서 6천미터가 넘는 아일랜드파크까지 오른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정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좋은 사진을 찍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고산증에 적응하기 위해 등반일정을 넉넉히 잡고 등반원칙도 철저히 지켜가며 올랐지만 결국 많이 내린 눈 때문에 4천미터 촬영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동행한 아내가 고산증으로 남체바잘(3,440m)에서 의식을 잃고 숨을 멈췄던 밤은 지금도 생각하면 끔찍한 순간이다. 한때 인생의 목표였고 지금도 변함이 없는 히말라야 14좌를 자신을 믿고 평생 뒷바라지해온 아내와 함께 보고 싶었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여 한국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으로 체력을 길러왔던 아내였다.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얘진 아내와 현지 포터의 고함소리, 아내를 들춰 업고 급히 뛰어내려가는 포터의 모습은 지금도 딴 세상 일처럼 느껴진다. 천만다행으로 잠시 뒤 아내는 의식을 차렸지만 그때의 고마움과 미안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박영석 대장과의 만남, 도전하는 이유는?

박씨 같은 산악인에게 산이란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다.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히말라야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미답의 루트에 대한 도전은 떨칠 수 없는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히말라야에서 만난 후배 산악인 고 박영석 대장도 그중 한명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산악 그랜드슬램(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세계 3극점)을 이룬 그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가장 오르기 어렵다는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르다 실종되었다. 박씨는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에 에베레스트에서 고산 적응훈련 중이던 박대장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이지만 지금까지 잘 이겨내와서 더욱 안타까워요. 비교적 쉬운 돌아가는 길을 놔두고 사람 머리만한 돌덩이가 떨어지는 곳에 코리안 루트를 만들겠다며 오른 그는 전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탐험가였어요. 정말 산을 사랑했고 도전밖에 몰랐던 진정한 산악인이었죠.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14좌 사진트레킹에 용기를 얻었는지 몰라요.”

누구도 지금까지 혼자서 히말라야 14좌를 촬영한 적이 없다는 점이 박씨가 도전에 나서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주변의 만류도 있었지만 “건강하게 살려면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는 아들의 지지도 큰 힘이 되었다. 젊어서 가졌던 히말라야에 대한 동경과 애환은 60대 중반의 그를 다시 일깨워 이끌었다. 그 사이 신구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사진을 배웠다. 그리고 한참 산을 오를 때 본 우리나라 산악사진의 아버지라 불렸던 고 김근원 선생의 사진은 황홀한 산사진의 기억을 꺼내놓았다.

고교 때부터 히말라야 등정 꿈꾼 전문산악인

박창규는 고교시절부터 산에 매료되어 전문 등반을 시작했다. 허구 헌 날 인수봉과 선인봉, 우이암, 오봉에 하켄과 볼트를 박고 사다리를 걸고 루트를 개척하며 히말라야 원정에 대한 꿈을 키웠다. 당시는 해외원정이 쉽지 않던 때라 히말라야 지도를 펼쳐놓고 실내에서 크라이밍을 연습하기도 했다. 대학 때는 형인 박정규(전 청주대 교수)씨와 함께 인수봉에 우정A, 우정B, 하늘길 등 6개 코스를 개척하고 도봉산 선인봉의 거미길, 오봉의 노을길 등 암벽 루트를 개척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개척한 루트 중 지금도 수많은 산악인이 오르는 우정B 길은 특히 형제길로도 불린다. 겨울 설악산에서 사다리를 걸고 빙벽등반을 하고 한라산에서 적설기 훈련을 하는 등 히말라야 거봉 등정의 꿈을 키워오던 그는 1977년 우리나라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에 참가할 수 없었다. 당시 군대를 제대하고 막 사업을 시작했던 터라 선택의 갈림길에서 후일을 기약했다.

그뒤 시간이 흐르며 히말라야 등정의 꿈도 사라져가는 듯했다. 그러다 한 고교동창의 부음이 전해졌다. 바로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장비담당으로 참여했던 한정수씨였다. 호방한 성격에 너털웃음으로 큰 산을 연상케 했던 친구는 영정사진 속에서 옛 모습 그대로인 채 박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넨 어찌 사는가?’ 묻는 듯한 친구의 영정 앞에서 한없이 울며 함께 했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문득 더 이상 늦춰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등반은 아니지만 더 늦기 전에 히말라야 14좌를 트레킹하며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올라 사진으로나마 담자는 결심이었다.

육십에 카메라 메고 비로소 올라

9월 중순, 네팔 카투만두공항에 도착해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담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에베레스트와 로체는 서로 붙어 있으며, 14좌 촬영의 첫 걸음으로 상징적인 봉우리들이다. 만년설을 머리에 인 거봉은 좀체 제 모습을 내보이지 않는다. 순간 드러났다가도 어느새 구름과 그늘 속으로 숨어버린다. 게다가 특별한 구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멋진 사진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오로지 정상 가까이까지 올라 망원렌즈를 보고 인내하며 기다려 찍는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산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양함과 아름다움은 우리나라 산이 훨씬 낫지만 설산이 주는 신비롭고 웅장한 느낌이 있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집중하면 이런 것들이 보입니다. 이때까지 기다리려면 멋진 사진에 집착하지 말고 사진 자체를 즐겨야 합니다.”

에베레스트 뷰우와 쿰중, 탕부체를 거쳐가며 해뜰 때를 기다리기를 몇일째. 세계 3대 미봉 중 하나라는 히말라야 아마다블람은 끝내 화사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눞체에 가려진 에베레스트도 좀체 웅장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늘이 도와야 정상에 설 수 있듯이 사진촬영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나마 로체와 에베레스트를 찍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귀국해서 몸무게가 4kg 빠졌더군요. 얼굴도 검게 탔지만 하루종일 걸으며 설산을 보고 셔터를 눌러서인지 건강은 한결 좋아졌어요.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인내하고 절제하는 자에게 히말라야가 주는 선물

고산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걷고 충분히 쉬고 샤워를 해선 안되며 술도 삼가야 한다. 제아무리 단련된 이라도 이중 한 가지라도 어기면 바로 고산증이 찾아온다. 거창한 목표나 건장한 체력이 있어도 우선 절제하고 인내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 히말라야다. 낮은 자세로 느리게 다가서야 비로소 산은 자신의 한귀퉁이를 내준다. 살아있는 사실 자체에 감사하게 만드는 청정한 공기와 보석처럼 박힌 별들은 히말라야가 내리는 또다른 선물이다.

박씨는 예정대로 히말라야 14좌 사진촬영이 끝나는 오는 2015년 이후에 더 많은 사람과 히말라야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나누기 위해 전시를 열 계획을 갖고 있다. 그리고 2차 촬영부터는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히말라야사진작가클럽’의 회원들과도 함께 떠날 생각이다. 히말라야가 주는 감동과 사진 하는 즐거움을 주변의 사진애호가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다. 박씨는 내년 봄에 안나푸르나 남면과 다울라기리 그리고 가을에는 K2, 브로드피크, 가셔보룸1, 가셔브룸2를 오를 예정이다. 이어서 낭가파르밧, 칸첸중가, 마칼루, 마나슬로우, 초오유, 시샤팡마 등의 봉우리를 계속 담아 14좌 사진촬영을 끝낸다는 계획이다. 여기에 여건이 허락하면 세계의 미봉까지 계속 찍고 싶다는 원대한 계획까지 밝혔다. 이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마치 젊은 산악인 박창규로 돌아간 듯 비장함과 들뜸이 교차했다. 20대의 젊은 박창규는 야시카 카메라를 메고 암벽을 올랐다. 지금 60대 중반이 된 그는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젊어서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산을 찍는 중이다. 그래서 그가 촬영한 산사진에는 그곳 능선이나 암벽에 서기를 꿈꿨던 젊은 날의 열망까지 담겼고, 그의 도전이 특별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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