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1
“임성노 선수가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라서 제가 얼마나 말을 많이 하고 애교를 부렸는지 몰라요” 환하게 웃으며 박숙은(41)씨가 임성노(47)씨를 쳐다보자 겸연쩍은지 눈길을 피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함께 태극마크를 달고 서로 의지하며 큰일을 치룬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오누이의 정’ 같은 기운이 맴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사이좋게 가슴에 걸린 동메달을 함께 내밀었다. 두 사람은 지난 9월에 열린 8회 서울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의 사진직종에 출전해 각각 실내와 야외부문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글 | 박지수 기자
기사제공 | 월간사진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는 1981년 UN이 정한 세계장애인의 해를 기념해 장애인의 사회경제활동과 고용촉진을 늘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계 각국의 장애인들이 4년마다 한자리에 모여 직업과 관련된 기능을 겨루는 대회로 일본에서 첫 대회가 개최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9월25일부터 30일까지 처음으로 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이 열렸다. 세계 50여개국 1,500여명이 참가해 건축제도, 가구제작, 컴퓨터프로그래밍 등 40개 직종의 경기가 열린 서울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5회 연속 대회종합 1위의 쾌거를 이뤘다. 한편 서울 대회는 사진직종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프로세스로 바뀌는 첫 대회라 눈길을 끌었다. 실내와 야외로 나뉘어 치뤄지는 사진직종에서 실내부문에는 13개국 18명, 야외부문에 17개국 22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우리나라는 실내부문에 임성노(47세, 지체1급)씨와 박병후(45세, 청각2급)씨가, 야외부문에 박숙은(41세, 지체3급), 김영성(34세, 청각4급)씨가 각각 출전해 세계 선수들과 실력을 겨루었다.
사진직종의 실내부문은 경기장에 설치된 실내 스튜디오에서 조명기기를 사용해 모델의 인물사진을 촬영하는 경기다. 촬영 3시간, 리터칭과 출력 3시간을 합해 모두 6시간 동안 각기 다른 포즈의 상반신 프로필 사진 3장을 제출해야 한다. 표정과 포즈, 화면구성을 통해 완성도 높은 인물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채점은 5명의 심사위원이 100점 만점 기준으로 인물표현능력(30점), 화면구성(30점), 사진촬영 및 수정능력(40점)을 평가한다. 야외부문은 ‘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을 주제로 다큐멘터리 또는 저널리즘 사진을 촬영하는 경기다. 대회기간 중 6시간 동안 촬영하고, 사진선택 및 출력 3시간을 통해 5장의 사진을 제출한다. 제시된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현장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채점은 5명의 심사위원이 100점 만점으로 주제반영 정도(30점), 사진구도(30점), 사진촬영 테크닉(40점)을 평가해 순위가 결정된다.
국가대표가 된 웹마스터와 사진관 사장님
월간사진(아래 사진) : 동메달 딴 것을 축하한다.
임성노(아래 성노) : 금메달을 따지 못해 아쉽다. 처음에는 별로 못 느꼈는데 대회가 다가올수록 부담감이 생겼다. 연습때 실력만 발휘하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금메달을 못따 가족들에게 미안했지만 가족들은 무척 좋아한다. 딸과 아들 하나씩인데 큰 애가 휴대폰에 ‘아빠 잘해’라고 문구를 입력해줘 큰 응원이 됐다. 동메달이라 아쉽지만 그나마 가족들에게 체면치레는 했다.(웃음)
박숙은(아래 숙은) :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대회개막 전에 선수대표 3명에 뽑혀 청와대에 갔는데 그때 꼭 메달을 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동메달일 줄은 몰랐다.(웃음) 하지만 노메달이라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다.(웃음) 경기도중에 카메라 가방을 분실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서 솔직히 메달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무사히 경기를 마친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메달도 땄으니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사진 : 어떻게 대회에 참가하게 됐나?
성노 : 처음엔 이렇게 큰 국제규모의 대회인지 몰랐다.(웃음) 2005년까지 대구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는데, 어느날 신문에서 인도네시아대회의 사진부문 금메달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사진관을 그만두고 학교의 졸업앨범 사진 일을 해왔는데 작년부터 휠체어를 타면서 그것마저 하기 힘들어졌다. 그때 불현듯 그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장애인공단 홈페이지에서 국가대표 선발전 공고를 보았고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지난해 10월에 30여명의 선수들과 선발전을 치러 최종 2명 안에 뽑혔다.
숙은 : IMF 이후에 웹마스터 일을 하고 있어서 2008년부터 웹마스터 직종을 준비했다. 선발전에서 2등 안에 들어야 출전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3등을 했다. 기능올림픽에는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회원으로 활동하는 도사모(도전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사진동호회에서 사진직종에 출전해보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얼떨결에 출전하게 됐다.(웃음) 사진은 1995년에 디자인 학원을 다니면서 촬영부터 암실작업까지 배운 적이 있다. 96년에 첫 월급으로 니콘 수동카메라를 사서 계속 취미로 해왔지만 태극마크를 달 줄은 몰랐다.
사진: 훈련과정은 어땠나?
숙은: 훈련은 6개월 전부터 시작됐다. 일주일에 한번씩 지도위원인 손영호 교수(국립순천대)와 한상일 교수(상명대)에게 지도를 받았다. 지도위원은 감독과 코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제를 정해서 촬영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보완점과 스토리구성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성노 : 지도위원인 백승휴 교수(중앙대)와 남창희, 박정숙 사진가의 스튜디오에서 연습을 했다. 평소에 동네의 복지관에서 영정사진 봉사활동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사진관을 그만두고 감각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늘 준비하면 언젠가는 사진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메달색보다 값진 경험, 도전과 자신감
사진 : 경기는 어떻게 치렀나?
숙은 : 야외부문은 6시간 동안 ‘국제기능올림픽’에 대한 다큐멘터리 사진을 촬영해 포토스토리로 구성해 5장을 제출한다. 트리밍, 색보정 등 리터칭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에 노출이나 구도 등 사진의 기본기가 뒷받침돼야 한다. 스토리텔링이 가장 중요한 채점기준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상황을 찍기 때문에 변수가 많고, 사전에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 필수적이다. 사전답사를 하면서 계획을 세웠지만 중간에 카메라 가방을 잃어버려 모두 물거품이 됐다. 사진을 찍으면서 잠시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았는데 계속 메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웃음) 너무나 당황해서 여유를 잃었고, 나중에 다른 사람의 장비를 빌렸지만 내 것이 아니라 너무 어색했다. 다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셀렉트 과정에서 만회하자는 생각으로 포토스토리 구성에 고민을 많이 했다.
성노 : 실내부문은 우선 모델을 정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 모델이 각각 4명씩이고 선수들이 제비뽑기로 남녀 한명씩 모델을 정했다. 아무래도 조명세팅이 가장 중요한데 휠체어 때문에 조명장비를 직접 조절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진행요원이 도와주긴 하지만 미세한 조정은 하지 못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리고 모델에게 포즈나 제스처를 요구할 때도 시범을 보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애로사항이 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실내부문에서 금, 은, 동메달을 딴 선수들의 남자모델이 모두 똑같았다. 촬영기술 못지않게 모델의 분위기나 숙련도도 중요하다.
사진 : 대회출전 자체가 특별한 경험이 됐을 것 같다.
성노 : 대회에 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지도위원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선수와 대회를 지원하는 장애인공단 직원들의 노력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겪지 못했던 상황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시야가 넓어진 것 같다. 인물사진을 찍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관심을 갖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숙은 : 메달을 딴 것보다 모르던 사람들과 친해진 것이 가장 소중하다. 사진은 그저 개인적인 즐거움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회 동안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태극마크를 달고 청와대에 간 것도.(웃음)
사진 : 사진 국가대표들인데, 사진의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성노 : 아직도 스스로 장애를 100퍼센트 인정하지 못한다. 후천적인 장애여서 그런지 한때 심각하게 좌절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분노나 고통을 사진으로 해소하고 싶다. 사진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숙은 :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장애인들도 사진에 접근이 쉬워졌다. 특히 여성 장애인의 한사람으로서 사진의 의미는 각별하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다. 장애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데, 카메라를 들고 나오면 더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에게 사진은 사회의 시선에 대한 싸움이자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카메라가 숨어있는 장애인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