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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별난 사진 별난 빈곤

2012-03-02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된다. 고로, 뉴스거리가 되고 싶다면 개를 물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개를 문 사람에 관한 뉴스라면 이미 1987년 11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실렸다. 게다가 뉴스거리가 되고자 하는 별난 사람들이 넘쳐나고, 별난 사진에 굶주린 이들이 사진을 빛의 속도로 공유하는 탓에, 이제는 별나기도, 별난 사진을 찍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면? 개를 무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개가 되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 현린

예컨대, 스스로를 개라 불렀던 디오게네스처럼? 디오게네스는 밥그릇에 머리를 박고 밥을 먹었고,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자위를 하거나 배설을 했고, 햇살 좋고 바람 막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고 잠을 자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개처럼 먹고 싸고 자는 별난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오히려 탁월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존경을 받지 않았던가. 이를테면, 어느 날 거리에 누워 햇살을 쬐고 있는 이 철학자를 만난 알렉산더는 어떤 소원이건 들어줄 테니 말만 하라고 했다. 이에 디오게네스는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짖었다. “햇살 가리지 말고, 비켜.” 그러나 왕은 개의 일갈에 분노하는 대신 오히려 감동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옛날 옛적 얘기다. 요즘이라면?

2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새로운 빈곤’(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 2004)에 따르면, 현대는 상품을 선택하듯 자신의 삶도 선택할 수 있고, 상품을 교체하듯 스스로도 변신하는 것을 즐기는 소비와 유희의 시대다. 소비 자체가 최상의 유희가 되었고, 이 유희 능력이 다시 새로운 생산을 위한 자본이 된다. 쉽게 말해, 잘 써야 잘 놀고, 잘 놀아야 잘 벌기도 한다. 개인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는 요즘 시대정신에 따르면, 그런 능력이 없는 개인이 있을 리 없다! 모두가 잘 쓰고 잘 놀고 잘 벌 수 있다. 다만 각자의 선택과 노력이 문제일 뿐이다. 물론 때론 실패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실패마저도 즐기고 실패에서도 배우는 것이다. 평생 계속되는 이 게임에서 모든 개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re-creation)하는 진정한 학습자이자 예술가다. 진정성? 평생학습과 일상예술이라는 명분으로 강요되는 끊임없는 변화의 목적은, 다름 아닌 변화 자체이고,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신식 진정성이다. 디오게네스처럼 구식 진정성을 고집한다면 희망이 없다. 결국 게임에 진 루저(loser)는 위너(winner)에게 박수를 쳐주며 깔끔하게 물러나야 한다. GG(Good Game)를 날리면서.

그동안 재미는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앞으로 재기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과거 생산과 감시의 사회는 이들 낙오자들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고 길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차라리 포용의 사회였다. 하지만 소비와 유희의 사회는 이들을 재활용하는 대신 영원히 추방해 버린다는 점에서 배제의 사회이기도 하다. 이들은 연민과 박애라는 유희의 소비에도 재활용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는 예전처럼 이들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그 풍부한 잠재력과 자원을 활용하지 못한 저렴하고 재미없고 게으른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또한 이들은 재미와 상상이라는 유희의 생산에 재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경제적인 투자를 할 가치도 없다. 미학적으로는 추하기만 한 이 인간쓰레기들은 소독에 들어가는 약값은 물론이고 청소에 들어가는 물값까지 축내는 비용의 대상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이런 쓸모없는 삶을 스스로 선택했고 그곳에 안주하려 했다는 점에서 범죄자이기도 하다. 고로, 이들은 행여나 새어 나와 별난 악취라도 풍기는 일이 없도록 잘 밀봉한 후, 아주 먼 곳에 내다 버리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라도 묻어 버려야 한다.

이런 쓰레기 신세를 면하려면, 기꺼이 감시와 유희의 세계에 참여해서 별종을 찾고 별종이 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자유롭고 별난 세계가 늘 새롭고 별난 것을 강요한다고 해서 아무 별종이나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별종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특종과 말종 그리고 독종이 그것이다. 물론, 이 사회가 원하는 것은 소비에서나 생산에서나 탁월한 특종이다. 한편, 말종이 무능한 소비자이자 생산자라면 독종은 반(反)소비자이자 반(反)생산자다. 고로 말종이 단순한 범죄자라면 독종은 위험한 반란자다. 그런데 하찮은 존재감이 아니라면 ‘미친 존재감’이라도 얻겠다며 감히 ‘자발적 가난’과 ‘자발적 배제’를 실천하는 디오게네스와 같은 독종을 선택한다? 애초에 반란 자체가 목적이라면 모를까, 그저 별나 보이기 위해서라면 꿈도 꿔선 안될 일이다. 예전에야 반란 수괴랍시고 광장에서 목을 쳐서 스펙터클의 주인공으로라도 만들었겠지만, 요즘에는 추방 명령도 없이 조용히 밀봉해서 묻어 버린다. 그래서 디오게네스가 추방될 때처럼, “니들이 나에게 추방을 명령해? 그렇다면 나는 니들에게 체류를 명령하마”라고 너스레를 떨 기회도 주지 않는다.

3 한편, 특종의 생산 능력과 소비 능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종이나 독종이 될 수는 없는 현대인은 이 난관을 뚫기 위해서 디오게네스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또 다른 견유주의(犬儒主義)에 의지한다. 이를테면, 사소한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같은 평범한 것에 주목을 하기도 하는데, 여기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소한 일상 소소한 행복의 주인공이 이미 사소함이나 소소함과는 너무 먼 별난 사람이어서 그에게는 사소함과 소소함이 오히려 사치가 된 경우다. 또 하나는, 이미 인간과는 너무 먼 별난 매체가 사소하고 소소한 사람을 다룬다는 자체가 별난 사건이 된 경우다. 일견, 전자는 대상 때문이고 후자는 매체 때문인 듯 보이지만, 전자 역시 매체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어느 경우건 매체를 통해 별나지 않은 것이 별난 것이 된다. 별나지 않은 사람이 별나지 않은 짓을 하거나, 별난 매체가 별난 사람을 다루면 그다지 별나지 않다. 하지만 별난 사람이 별나지 않은 짓을 하거나, 별난 매체가 별나지 않은 사람을 다루면 별나다. 사실 이는 간단한 기호의 유희가 낳는 단순한 효과일 뿐이다.

하지만 이 유희가 반복되고 그 규칙 자체가 대중화되면서 새로운 변종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개를 물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고, 운 좋게도 이 사진이 뉴스거리가 된다면, 곧 표절시비가 일어난다. 심지어 애초 표절시비까지 계산한 것은 아니냐며 진정성 논란까지 일어난다. 진정으로 물고 싶었던 것이 개였냐, 기자였냐, 아니면 네티즌이었냐 따위일 텐데, 사실 관건은 표절도, 진정성도 아니다. 그런 것은 핑계일 뿐, 실제 관건은 시비와 논란 자체다. 특종을 무는 동시에 특종에 물리기 위한, 소비적 유희의 반복이 목적인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Hiroki Azuma)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Dobutsuka Suru Posutomodan, 2001)에 따르면, 이는 오타쿠의 전형적인 행동양식의 하나로서 또 다른 견유주의라 할 수 있다. 해당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절실하기는 하다. 하지만 마치 종소리에 조건반사적으로 침을 흘리는 개처럼 차이의 체계라는 자극에 즉물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동물적이다. 소비하고 유희하고 다시 생산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놀이감은 현실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내용과도 무관한 기호들 간의 차이와 조합 자체다.

현실로부터 고립된 채 기호들의 수집과 분류와 조합의 유희에 빠진다는 것, 지시대상과 무관하게 기호들의 차이에서 도착적으로 성욕을 자극하고 충족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외견상 지적인 활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극에 대한 즉물적인 반응이라는 것 등 흥미로운 지적들이 많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채우고자 하는 것이 먹이가 아니라 놀이, 그것도 별난 놀이에 대한 굶주림이라는 점이다. 골방에서나마 평생학습과 일상예술까지 실천하지만, 정작 그들의 학습과 예술은 유감스럽게도 재창조가 아니라 자극에 대한 반응, 심지어 중독에 가깝다. 이런 점에서, 태양이 아니라 모니터에서 발산하는 빛에서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 소수의 변종은, 잘 쓰고 잘 놀고 잘 벌라는 시대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소중한 표본이다. 만약 알렉산더 대왕이 그들의 모니터를 가린 채 어떤 소원이건 들어줄 테니 말만 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비록 견유주의자이지만, 디오게네스처럼 독종이 아니라 변종일 뿐인 그들의 대답은 아무래도 “비켜!”가 아니라 “사줘!”쯤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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