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8
그건 일종의 사고였다. 피에르 아술린(Pierre Assouline)이 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l’œil du siecle, 1999) 한국어판의 커버를 벗겨 냈더니, 벌거벗겨진 검은 책등에 본래 책의 제목과 함께 엉뚱한 제목이 하나 더 찍혀 있었다.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1.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책 뒤에는 제목과 함께 출판사 이름까지 찍혀 있는데, 그나마 위아래가 뒤바뀐 채로다. 그러고 보니 책등의 제목도 거꾸로 찍혀 있었다. 한마디로 불량서적인 셈. 하지만, 이 우연한 사고가 반가웠다. 생산과정이 자동화된 만큼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는 것이 불량품이지만, 일단 그 정체가 발각되고 나면 대량으로 폐기처분되는 것이 또한 불량품이다. 때문에 오탈자 없는 완벽한 책을 만나기 힘든 만큼이나, 이렇듯 완벽한 흠이 있는 책을 만나기도 힘들다. 그런데 이런 흠을 갖고도 용케 폐기처분되지 않고 정상적인 루트를 따라 이렇듯 내 손에까지 들어오는 불량서적들이 가끔 있다. 상품으로서는 부적격한 이런 불량한 녀석들과의 만남을 나는 즐기는 편인데,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척척 잘 돌아가는 것처럼만 보이는 자동화된 생산과정이 결코 완전하지 않음을 몸으로 증언한다는 점에서, 녀석들은 단지 불량서적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불온서적이기도 해서다. 또한 녀석들의 불량스러움은 마치 의도된 것인 양 대단히 극적일 때도 있어서, 그 자체가 의미심장한 한편의 이야기가 되기도 해서다.
글, 사진 | 현린
기사제공 | 월간사진
이를테면, 헨리 페트로스키(Henry Petroski)의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Pushing the Limit, 2004)의 경우, 기발한 다리 건설에 관한 글에서 144쪽 다음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145쪽이 아니라 느닷없이 160쪽이 찍혀 있다. 그나마 그것도 위아래가 거꾸로 찍혀 있다. 그렇다고 중간의 여덟 장이 다리 아래로 추락이라도 한 것은 아니다. 비록 계속 위아래 거꾸로 찍혀 있긴 하지만 역순으로나마 145쪽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이 부분은 뒤로부터 앞으로, 아래로부터 위로, 이래저래 거꾸로 읽어야 한다. 기술의 한계를 넘어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발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마르크스의 유령들’(Spectres de Marx, 1993)은 기괴하다. 첫 페이지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유령들’이라는 단어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여덟 장을 차지하는 머리말에서는 글들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온전히 백지만 남아 있기도 한다. 마치 유령이 출몰하듯. 그것도 머리를 알아 볼 수 없는 유령이 출몰하듯이. 이언 와트(Ian Pierre Watt)의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Myths of Modern Individualism, 1996)의 경우는 더 극적이어서, 로빈슨 크루소를 다루는 209쪽에서 224쪽까지의 여덟 장이 아예 사라지고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덟 장이 실종되는 지점이, 배가 난파되어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 갇히는 시점과 일치한다. 난파와 함께 발생한 파본. 불량치고는 대단히 극적인 것이다. 정말 필요한 경우 새 책을 한 권 더 구입할지언정, 이런 책들을 폐기처분하도록 내주진 않는다.
멀쩡한 커버로 자신의 불량함을 감춘 덕에 무사할 수 있었던 카르티에 브레송의 전기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1908년에 태어난 이 책의 주인공 역시 소년 시절엔 교사나 부모가 읽지 말라는 불온서적들을 즐겨 읽는 불량학생이었으니, 엉뚱한 제목을 숨긴 이 불량서적은 그 주인공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종군기자로 참전하다 갇혔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할 때 그가 민간인 옷을 훔쳐 입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커버를 벗기고 나서 드러난 실체 때문에 이 책을 폐기한다는 것은 죄책감마저 들게 했다. 무엇보다도, 기발하거나 기괴한 점성술이나 심령술과 함께 사진술이라는 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개인주의자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면, 이런 우연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았으리라 싶었다. 그가 손바닥이나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작은 라이카를 늘 가지고 다녔던 것도, 스스로 결코 예상할 수 없는 우연에 대비함으로써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였지 않은가. 결정적으로는, ‘세기의 눈’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그 엉뚱한 제목이란 것이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1’이다. 시간이 멈춘다? 이 얼마나 사진적인가! 나는 이 우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도박을 하기로 했다. 불량서적을 반품하거나 교환하기는커녕, 오히려 처음 듣는 제목의 그 책까지 구입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엉뚱한 제목에 붙어 있던 1이라는 숫자에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2004년, 그러니깐 카르티에 브레송이 숨을 거둔 해에 출간된 이 소설은 무려 세 권짜리였으니 말이다.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
하지만 도박이 무의미하진 않았다. 승률은 오히려 높은 편이었다. 저 혼자 태어나 저 혼자 잘 자란, 배꼽도 배도 없는 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른 인간으로부터 배우며 자라기 마련이고, 한 인간의 전기 속에는 으레 우리가 스승이라 부르는 인간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적어도 전기의 전반부는 이후 그들의 삶에서 결정적일 될 그들의 수업시대로 채워지기 마련이고, 그것은 제도권 안이건 밖이건 학교라는 공간과 관련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전기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경우 첫 스승은 분석적 입체주의 화가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로트였다. 경쟁심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스포츠도 싫어했던 카르티에 브레송이 삼수를 하고도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대(大)부르주아 가문이었던 그의 집안에서는 마침내 그에 대한 기대를 접고 그저 성실하게만 살아달라며 그를 놓아준다. 이후 화가가 되기로 한 그가, 학교 대신 찾아간 곳이 로트의 아카데미였다. 한편 학교괴담이기 때문에 등장하기 마련인 소설 속의 스승은 수학교사 사카키다. 왜 자신들이 그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입시경쟁을 치르고 들어간 명문사립 세이난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은 이번엔 명문대학 입학에 다시 목을 매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한쪽 귀엔 피어싱을 해서 불량교사로 낙인찍힌 사카키가 맡은 3학년 2반에 속한 덕에, 그럭저럭 행복한 수험생 생활을 한다.
그런데 로트와 사카키라는 두 인물은 스승이라는 점 말고 수학이라는 공통분모도 갖고 있다. 사카키야 그의 담당과목이 수학이어서 그렇고, 로트는 “세계를 지탱하는 구조를 통해서만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찾아낼 수 있다”며 회화에서 황금비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규율 없이는 자유도 있을 수 없다. 광기는 경계가 엄격하게 그어진 다음에라야 비로소 폭발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골격 없이는 살이 붙을 수 없다. 전반적 구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연극이 만들어질 수 있는 법이다. 예술이란 곧 기하학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제자 카르티에 브레송은 완벽히 받아 들였고, 이제 그의 마음에는 이 세상이 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수의 신비주의가 깊이 자리를 잡았다. 불량소년 카르티에 브레송이 “기하학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다”는 플라톤의 말을 평생의 신조로 삼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스승 로트 때문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설에서는 노랑머리에 짙은 화장을 하고 다니는 불량소녀 리카가 사카키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수학교사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리카와 달리, 그야말로 반사적일 만큼 반항적인 비순응주의자 카르티에 브레송은 스승의 엄격한 체계에도 서서히 반항하기 시작했다. 일단 골격을 만들었으면 다음엔 살을 붙여야 하는 법이고, 게다가 살을 붙이기 위해 스승을 떠나는 것은 그의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으니, 그는 2년 만에 스승을 떠난다. 물론 그동안 그가 만든 회화적 골격은 이후 사진의 골격이 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골격에 붙일 살은 초현실주의에서 얻게 된다.
모든 ‘감각의 착란’과 심령술, 심지어 ‘인공낙원’이라 불렸던 마약에 탐닉하기도 했던, 한마디로 영원한 반항아였던 르네 크르벨과의 우연한 만남이 발단이었다. 아웃사이더나 기인에게 무턱대고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는 카르티에 브레송으로서는,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과 ‘시적 감흥’을 불러오는 최면술을 전파한 크르벨에게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를 통해 초현실주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리고 이 공간 속에서 우연의 일치를 추구하기 시작하고, 사진이야말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최적의 매체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라이카를 구입하던 1932년, 마침내 그는 사진가가 되었다. 라이카를 손에 넣자마자 뉴욕에서의 개인전이라는 행운까지 찾아왔다. 뉴욕의 엄청난 부동산 거부의 아들로서 미술품 수집에 투자를 아끼지 않던 줄리안 레비는 뉴욕에 사진 전문 화랑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초현실주의자들을 통해 앗제의 사진을 대량으로 구입하기도 했던 레비가, 자기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져보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전시는 마르셀 뒤샹과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주관해서 맡아주기로 했지만,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은 깔끔하고 정교하면서도 연출이 가미된 사진을 선호하던 당시 유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레비는 바로 그러한 ‘반(反)도형적 사진’에 주목했던 것이니, 당시 카르티에 브레송은 크르벨이나 앙드레 브르통의 가르침대로 그의 사진에 초현실주의적 살을 붙여서, 로트의 가르침대로 기하학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이미 성공했던 것이다. 요컨대, 카르티에 브레송은 입체주의자 로트를 통해 수의 신비라는 골격을 만들고, 초현실주의자 크르벨을 통해 무의식과 생의 신비라는 살을 붙임으로써, 이른바 ‘결정적 순간’을 완성했다.
그런데 브르통의 정의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란 “모든 미학적ㆍ도덕적 경계를 넘어, 이성의 통제가 전혀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발현되는 사유”를 뜻하고, 초현실주의자들은 삶을 바꾸기 위해 꿈과 신비현상, 암흑소설을 찬양한다. 놀랍게도 사카키와 리카가 등장하는 학교괴담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췄다는 점에서 과연 초현실주의적인 소설이다. 친구의 자살에 대한 죄책감으로 고통 받던 한 학생의 무의식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카키를 비롯한 여덟 명의 인물들을 폭설로 사방이 막히고 한파로 얼어붙은 암흑의 학교에 가둬 버린다. 그리고는 시계가 5시 53분을 가리킬 때마다 어김없이 그들 중 하나 둘씩을 죽여 나간다. 대개 몸이 굳어서 마네킹이 되어 산산이 부서지는 형태를 취하는 이 공간에서의 죽음은, 그러나 현실에서는 죽음의 당사자가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는 형태를 취하는 이 공간 밖에서의 삶이다. 결정적이게도, 얼마 전 이 인물들 모두를 함께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이 인물들의 내적ㆍ외적 갈등의 단초가 되는 문제를 제기한다. 문제란, 이 사진 속 인물들이 과연 여덟 명인가 또는 아홉 명인가라는, 다름 아닌 수의 문제다. 그러나 이 무의식적 공간의 주인이 누구이고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주인이 자신들의 기억마저 지배하는 까닭에, 사진은 기억을 보충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억을 방해하며 수학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데, 문제의 이 사진, 다름 아닌 리카의 카메라에 찍혔다. “라이카는 이를테면 뜨거운 키스와도 같다. 아니면 리볼버로부터 발사된 총탄이나 정신분석가의 장의자 같다고나 할까.” 라이카를 이렇듯 찬양했던 기하학적 초현실주의자였던 카르티에 브레송,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뼈와 살이 굳고 부서지도록 하는 이 문제를 그는 풀 수 있을까? 리카의 카메라가 라이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소설 속의 누군가는 이 문제를 푼다. 너무 높아서 또는 너무 깊어서 제 자리를 맴돌다 멈춰진 시간을 흐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