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03
백다흠,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꽤나 소설책을 좋아하는 사람일 것이다. 고은, 김훈, 신경숙, 박완서, 공지영, 박범신, 김영하, 김연수 등 국내의 유명 문인들의 프로필 사진 밑에 ‘백다흠’이라는 카피라이트가 자주 발견된다. 눈썰미가 좋은 독자라면 ‘백다흠’이 찍은 사진에는 특유의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글 | 박지수
기사제공 | 월간사진
왠지 현실과 동떨어져 먼 존재처럼 느껴지는 문인들이 그의 사진 속에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거나 말을 걸고 웃음을 지으며 사람냄새를 물씬 풍긴다. 단순히 얼굴 생김새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소설작품이 지닌 이미지와 소설가의 분위기를 연결해주고, 독자들이 시인의 일상적인 모습과 표정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스튜디오에서 정형화된 포즈로 찍는 프로필 사진과 달리 카페나 공원, 작가의 서재와 자동차안 등 일상공간에서 편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으며 소설가나 시인이 지닌 저마다의 분위기를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 사진 찍히기를 꺼려하는 문인들 사이에서 백다흠은 프로필 사진을 맡기고 싶은 사람으로 통하며, 실제로 문인들은 그에게 자주 사진을 부탁해온다.
하지만 백다흠은 사진가가 아니라 서른 세살의 젊은 편집자다. 그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필름카메라를 접하며 사진을 취미로 해왔다. 그리고 6년 전부터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우연한 계기로 문인들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왔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문학책을 편집하는 일을 하며 쌓아온 문학적 소양은 정서적으로 풍부한 사진을 가능케 했다. 처음에는 문인들의 부탁으로 그리고 좋아했던 문인들을 만나는 재미로 얼떨결에 시작한 사진은 문인들의 내면과 심리를 드러내는 초상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정식으로 사진공부를 하며 예술가의 초상작업으로 확장하는 중이다. 그동안 인물의 내면과 심리를 표현하는 것에 치우쳤다면 이제는 사진의 평면적인 조형성이 주는 심미적인 부분과 균형을 꾀하며 편집자에서 사진가로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12월에는 그동안 작업해온 예술가의 초상사진에 형인 소설가 백가흠의 글을 더한 책이 나올 예정이다.
있는 ‘척’하지 않는 사진, 자연스러움에 초점
문인들의 프로필 사진은 어떻게 찍게 됐나? ▷ 일하는 출판사에서 시 선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책에는 시인들의 상반신 사진이 들어가는데, 사진을 맡은 사진가가 펑크를 냈다.(웃음) 편집장이 나보고 한번 찍어오라고 해서 처음 찍었는데,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진이 책에 실렸다. 그 뒤로 선집 전체의 프로필 사진을 찍게 됐고, 문인들 사이에서 ‘괜찮다’는 반응이 나오면서 여기저기서 부탁이 들어와 자주 찍게 됐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책으로 먼저 봤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는 것이 신기했고, 내가 찍은 사진이 그들의 책에 붙여진다는 것이 굉장히 영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자연스러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 포즈나 표정을 요구하면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의 작품세계와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일단 특정한 주문이나 요구를 하지 않았다. 또 문인을 만나면 처음부터 사진을 찍기보다는 “어제 뭐했어요?”라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데 애썼다.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이 사진은 안 찍고 수다만 떠니까 신기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문인과 친한 지인을 동석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촬영했다. 포즈를 요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찍으니까 문인들이 더 좋아했다. 개인적으로는 스튜디오에서 딱딱하게 찍는 사진들에 거부감이 있었고, 문인들도 그런 사진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 좀 더 자유로운 느낌을 주고 싶어서 소설가의 눈과 코만 찍은 적도 있고, 어깨에서부터 옆머리 라인만 찍은 적도 있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했는데, 채택되지 않은 사진이 더 많다.(웃음)
문인들은 촬영하기가 쉽지 않은 대상이다. ▷ 감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많고, 사진에는 과시적인 면이 드러난다며 꺼려하는 문인도 있다. 카메라나 조명 등 영상기기 자체를 방해꾼이나 불편한 물건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서 조명을 설치하려고 삼각대만 설치해도 말을 안 하거나, 작은 플래시만 터져도 매우 불편해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예 조명장비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실내에 있는 조명등을 최대한 이용하고 촬영했고, 스트로보를 쓰지 않으니깐 오히려 더 느낌이 좋았다.
주로 흑백사진을 찍은 이유는? ▷ 처음에는 흑백사진이 색깔로 전달할 수 있는 이미지의 힘을 누락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이라이트와 새도우의 콘트라스트로 표현되는 흑백사진은 인물의 검은 눈동자와 표정만 부각된다. 이를 최대한 활용하면 사진이 거칠어지기 마련인데, 오히려 거친 느낌으로 표현된 모습을 좋아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 그 효과를 많이 주려고 한 적도 있다.
기록작업으로 나가는 예술가의 초상작업
촬영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나? ▷ 일단 그 사람이 쓴 작품을 읽는다. 그리고 작품이 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저자의 이미지를 그려본다. 예를 들어 신경숙 작가는 작품을 읽으면서 내면적으로 굉장히 절제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에는 강렬한 감정이 있지만 그것을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꾹 참고 있는 시골 소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하나의 이미지만 고집하지 않고, 대부분 3~4가지의 이미지를 준비하는 편이다. 보통 한 사람당 200컷 정도를 찍는데 그중에서 15장 정도를 분위기별로 4개의 카테고리로 나눠서 넘겨준다. 나름대로는 1~3등까지 순위를 매겨서 넘겨주는데 4, 5등에서 선택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웃음)
작고한 박완서 소설가의 사진은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 돌아가시기 3개월 전에 찍은 사진이다. 그때 고인에게 평온한 할머니가 아니라 젊은 처녀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마음이 젊은 분이었다. 내게 정원 관리하기 힘들다면서 가끔씩 와서 잔디를 깎아달라고 농담까지 하셨다.(웃음) 또 집에 오랜만에 남자가 왔다며 형광등을 갈아달라고 해서 갈아드린 기억이 난다. 재밌게 사진을 찍고 왔는데 그렇게 병세가 깊은 줄은 전혀 몰랐다. 예전에는 사진의 기록적인 면은 별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사진에서 기록적인 측면이나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부분이라는 의미가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내 사진 속의 사람이 생을 마치면 사진은 온라인을 떠돌며 기록으로 남겨진다. 아마도 이런 생각 때문에 마치 수집을 하듯 계속 작업을 해온 것 같다.
인물 사진을 찍을 때 신경 쓰는 점이 있다면 ▷ 사람들은 누구나 아름답기를 원한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를 ‘보통이하’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예뻐 보이기를 원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인 것 같다.(웃음) 하지만 내게 예쁘게 찍어달라고 말하면 그때마다 “나는 포토샵을 못한다”고 대답한다.(웃음) 그저 예쁜 사진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또 문인들은 사진에서 본인들이 하나의 관념이나 감정으로 표현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오형근 사진가의 ‘소녀’ 시리즈를 보면 사진이 모호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 관객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인들은 모호한 것을 원하지 않아서 턱을 괴거나 고개를 숙여 사색하는 포즈를 취해 문학가다운 느낌을 전달하려 한다. 그것을 피하려고 턱을 괴면 카메라를 아예 내려버린다.(웃음)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있다.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 ▷ 언젠가는 편집 일을 관두고 사진작업만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문인들의 초상을 확장해 예술가의 초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대학원에 사진공부를 하니 오히려 사진이 더 어렵고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어린애들이 신나게 축구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었지만, 지금은 일도 아니고 취미도 아닌 매우 어려운 덩어리를 스스로 안고 있는 기분이 든다. 굉장히 쉽게 들어갔다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갇힌 것 같은 형국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자유롭고 매력적인 것 같다. 만약 출구가 보인다면 그쪽으로 걸어가야 하겠지만, 그것조차 보이지 않으니깐 내 마음대로 방향을 정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