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6
강풀의 만화는 따뜻하고 정겹다. 때론 어리숙하고 서툴게 보이는 그의 그림체는 순수하고 친근하게 느껴져 만화에 정감을 더한다. <바보>의 바보 승룡이가 그렇고,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우유 배달 할아버지 만석이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만화 속 세상이 마냥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승룡과 만석은 모두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고, 상수와 군봉같은 주변 인물에게도 자기만의 사정이 존재한다. 이때, 중요한 건 어려움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자세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각자의 결핍을 서로 채워주며 마음을 나눈다. 함께 돕고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기조차 쉽지 않은 지금, 만화가 강풀의 웹툰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강풀의 만화는 서툴지만 순수하다. 부족하지만 정이 넘친다. 사소하지만 소박하고 따뜻하다. 치열하고 갑갑한 일상 속에 치일 때 사람들은 강풀의 만화를 찾는다. 열심히 탐독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따듯함이 그리워 인터넷에서 강풀의 웹툰을 찾을 수 있다면, 현실 속에선 무엇을 찾아야 할까. 턱을 한껏 치켜들어야만 그 꼭대기가 보이는 빌딩 숲 속에서 우리는 ‘승룡이의 토스트 가게’를 발견할 수 있을까?
기사제공 | 팝사인
성안마을, 강풀의 만화를 입다
서울의 동쪽 외곽, 한강 아래 부근. 비죽하고 고개를 내밀면 담 넘어 현관이 보일 것만 같은 아담한 높이의 주택과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지만 소박한 골목으로 곳곳이 채워진 마을이 있다. 기다란 전봇대, 손때 묻은 담벼락.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난 화단. 친근하지만 최근 급격히 변화한 도시에선 찾아볼 수 없는 정겨운 것들로 가득한 곳. 강동구 성안마을이다. ‘성안’은 행정상 사용되는 성내(成內)동의 한글 표현으로 풍납토성의 안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수수하고 편안한 거리로 줄줄이 엮여있는 이곳은 최근 서울의 나들이 명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
성안마을이 나들이 명소로 부상한 이유는 ‘강풀만화거리’ 때문이다. 지난해 ‘따뜻한 마을 만들기’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 거리는 올해 2구간 추가 조성과 준공식을 개최하며 두 돌을 자축했다. 실제로 강동구에 거주하며 강동구의 곳곳을 배경으로 삼아온 강풀 작가는 만화거리 조성 제안 당시, 저작권 사용을 재능기부 형식으로 흔쾌히 제공하였다. 사업의 주최인 강동구와 작품을 기획한 ‘핑퐁아트’ 는 웹툰을 원작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강동구의 정체성을 살리고 마을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구상했다. 이렇게 기획된 강풀만화거리는 순정만화 시리즈 네 편의 원작(순정만화, 바보, 그대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모든 순간)을 주제로 해, 강동구의 정체성을 입은 총 52점의 공공미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다양한 분야의 미술작가와 도슨트(벽화 해설사), 대학생 등 많은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이루어져 의미가 뜻 깊은 이번 거리 조성에 대해 강동구청 도시디자인과 장병조 팀장은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여 주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다”라고 말하며 “공공 미술을 통해 마을의 정체성을 알릴뿐만 아니라, 단독주택밀집지역과 상점들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목표”라 덧붙였다.
공간의 특수성을 고려한 원작의 재탄생
강풀만화거리는 단순히 만화를 거리에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어떻게’ 그리느냐 라는 공간과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는 결과물이다.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구석구석에 배인 노력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공공장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단독주택과 중소상점 즉, ‘개인의 사적인 공간’에 입혀진 벽화들은 강풀의 만화가 얼마나 일상에 잘 스며들어 조화를 이루었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강풀 주택·상점은 제한된 지역에 밀집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강풀만화거리의 입구, 찾기 힘든 골목길, 성내재래시장 입구 등 주요 포인트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자연스럽게 마을을 일주하도록 유도한다. 친절하게 방향까지 지시되어 있는 이 길을 따라 다니다 보면 그 상황에 딱 맞는 그림과 말풍선으로 방문객을 벽화에 몰입시키고 유쾌함을 더한다. 강풀만화거리 입구 쪽에 위치한 <그림 6>의 벽화는 연락도 없이 오랜만에 집을 찾아온 지호를 반갑게 맞이하는 <바보>의 한 장면을 차용한 것으로, 입구라는 공간이 가진 특성에 원작의 환영하는 장면을 적절히 융화시켰다. 공간의 특수성을 고려해 원작을 재탄생시킨 강풀만화거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추가 조성된 2차 구간에는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익숙한 물건에 ‘자원 재활용’이라는 콘셉트를 입혀 공공미술로 재탄생시켰다. 폐타이어, 키보드 버튼, 문고리 등이 도슨트와 자원봉사자들의 창의성을 만나 기존의 벽화에서는 볼 수 없던 입체감 있는 공공미술을 만들어 냈다. 한편 각종 불법광고물로 어수선했던 전봇대도 형형색색 페인트로 칠해져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사람들의 생기로 가득한 성안마을
친근하고 수수한 성안마을에 정겨운 강풀의 만화까지 더해지니 이곳은 사람들의 생기로 가득하다. 실제로 취재를 나갔던 당일엔 대학교 동아리에서 강풀만화거리를 배경 삼아 작은 영화를 찍고 있었고, 이를 본 동네 주민들은 익숙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스쳐갔다. 또한 나들이 장소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사람들의 방문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장병조 팀장은 “강풀만화거리 조성으로 낡은 담벼락과 건물들이 화사하게 꾸며지니 거리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마을 공동체도 활성화되었다”라며 “앞으로도 꾸준한 유지·보수를 통해 지금의 관심이 끊이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많은 방문객을 통해 침체된 골목상권에도 다시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고 보면 강풀의 <순정만화 시리즈>는 모두 겨울을 배경으로 한다. <바보>에서 승룡이는 눈 내리는 겨울밤 지호의 ‘작은 별’연주를 기다렸고, <순정만화>에서 연우는 크리스마스날 스프레이 눈을 뿌리며 수영에게 이벤트를 선사했으며,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만석은 눈길에 이뿐이가 미끄러질까 손수레를 몰래 잡아주었다. 이렇게도 추운 계절 강동구 성안마을을 방문한다면, 어쩌면 <바보>의 지호처럼 이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하네.. 모든 것이.. 낡고 오래되었지만 너무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