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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은 추억의 사이니지다

2012-03-28


지금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헌책방은 과거 학생들과 서민들의 친숙한 공간이었다. 지금도 수십 년을 이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헌책방이 전국 곳곳에 선재해 있지만 대부분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불안한 기반 위에 자리해 있다. 인터넷으로 주문만 하면 당일 배송되는 도서유통 시스템 앞에 빽빽이 쌓인 책꽂이에서 눈을 훑어가며 옥석을 골라야 하는 헌책방은 구매력에서 애초부터 경쟁이 되질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헌책방이 자취를 감추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온 것은 헌책방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추억과 헌책방이 주는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손때 묻은 책에서 종종 발견되는 곱게 접은 쪽지는 누구에게나 추억의 사이니지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 골목인 보수동 책방골목은 저렴한 가격에 구하기 힘든 책을 얻을 수 있고 추억이라는 덤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글, 사진 | 한정현 기자(hjh@popsign.co.kr)

삶의 흔적이 있는 곳 ‘보수동 책방골목’

금세 사라져버릴 것만 같던 헌책방이 최근 들어 활기를 되찾고 있다. 추억이 헌책방의 명맥을 유지해온 힘이 되었다면, 이제는 헌책방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가치인 경제성을 동력으로 책이 순환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헌책방 골목으로 손꼽히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은 우리나라 헌책방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현재 보수동 책방골목에는 50여 곳의 서점이 운영되고 있다. 몇십 년 째 책방골목을 지켜낸 초로의 주인에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위해 골목에 접어든 청년에 이르기까지 좁고 긴 골목에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묻어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유일하게 북카페를 겸하고 있는 ‘우리글방’ 문옥희 씨는 보수동에서 젊은 날을 보낸 남편 노상길 사장과 삶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책방골목에 삶의 한 자락을 내어놓은 경우다. ‘우리글방’을 만든 노상길 사장은 책을 좋아해 10대 때부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일하면서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자신의 책방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1988년 드디어 보수동 책방골목에 자신의 가게를 만들어 ‘우리글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글방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온 것은 4년 쯤 전인데 현재의 우리글방은 방대한 책 때문에 지하와 1층, 그리고 2층까지 사용하고 있다.

평생을 책과 함께 치열한 삶을 살아온 노상길 사장은 자신이 이름 붙인 가게와 수많은 책을 얻었지만 건강이 나빠져 아내인 문옥희 씨에게 가게를 맡기고 시골에서 요양중이다. 문옥희 씨는 “남편은 자신의 꿈을 이뤘을지는 몰라도 나의 삶은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던 문옥희 씨는 남편이 벌려놓은 책방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생활을 접었다. 작은 공간을 좋아하는 문 씨가 남편의 삶으로 인해 보수동에게 제일 큰 책방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자신의 뜻과 맞지 않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삶인 것 같다.

쉼과 문화가 있는 작은 카페 ‘우리글방’ 북카페

우리글방 1층에는 책방 한 켠을 떼어 만든 작은 북카페가 있다. 손님들이 편하게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문옥희 씨의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북카페는 여러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모여져 만들어진 공간이다. 차와 책이 있는 휴식의 공간이지만 다양한 문화 행사가 만들어지는 역동적인 문화 생산 공간이기도하다. 주로 사진전시회와, 음악공연을 열어 지역에서 작은 문화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문옥희 씨는 “공연을 일부러 홍보하지는 않고 공연 시간이 맞는 사람이면 누구나 관객이 된다”면서 “그래도 우리글방이 작은 문화공간으로서 부산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문화가 있는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 체질이 더 맞는다는 문 씨는 “카페는 종합예술을 담을 수 있는 곳”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여행을 좋아하는 문 씨는 “여행지에서 느끼는 기분 좋은 느낌을 내가 사는 가까이에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각자의 다른 색깔들의 공간이 곳곳에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사 생활 당시 13년간 이어온 독서모임을 헌책방에서 재개하고 싶은 이상을 갖고 있지만 덩치가 커져버린 책방을 운영한다는 것은 문 씨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현실이다. 문 씨는 “헌책방의 경제적인 부분을 맡아서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독서토론과 공연 등 문화적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문화, 사회 현상에 따라 수시로 그 모습이 변해왔다. 헌책방이 침체기에 있던 시절에는 학습지와 새책 판매로 돌파구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형 온라인 매장이 활개를 치게 되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은 최근 들어 다시 예전의 모습을 점차 되찾고 있다. 복고문화의 바람이 보수동 골목을 휩쓸고, 메스컴의 조명을 받으면서 보수동 책방골목을 찾는 사람들도 늘었다. 하지만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보다 관광지처럼 발길 하나를 남기려는 사람들이 많아 상처받을 때도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십 년간 자리를 지키며 책을 팔아 자식을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킨 분들을 존경한다고 문옥희 씨는 말했다. 문 씨는 “노동의 흔적은 보지 못하고, 마치 관광지처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실망할 때가 많다”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폭력을 경험할 때도 많다고 한다. 문 씨는 책방골목을 찾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 문화적 인식을 갖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지역의 문화적 특성 반영한 도시디자인에 관심

우리글방 북카페는 책장이며 테이블이 대부분 목재로 만들어져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북카페 입구에 놓인 간판 역시 목재 파사드에 ‘우리글방’을 도려내 붙인 간결한 간판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북카페로 작은 쉼터를 마련한 문옥희 씨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데 관심이 많다.

타샤 튜더의 책 ‘나의 정원’에 담긴 한 장의 사진에 영감을 얻어 만든 북카페 앞 벤치도 행인에게 쉼터를 제공하기 위한 문 씨의 배려다. 가로수에 임의로 벤치를 만들어 놓은 터라 구청에서 문제 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책방골목을 찾은 구청장이 벤치에 앉아보곤 편안하다고 칭찬해 마음이 놓였다고 한다. 문 씨는 “부산은 거리에서 벤치를 찾아보기 힘든데 나무에 이렇게 벤치를 만들면 가로수 조명을 다는 것보다 나무에게나 사람에게 훨씬 유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문화거리로 지정돼 시비를 들여 거리개선 사업이 진행됐다. 바닥이며 거리가 한결 깨끗해졌지만 책방골목만의 문화를 담았으면 하는 게 문 씨의 바람이다. “눈으로 보기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편하고 거리에 문화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예산을 많이 쓰는 것보다는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거리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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