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18
이태원 골목길 한 귀퉁이에 자리잡은 스테인리스로 외관을 장식한 독특한 주택. 무언가 할 말이 있어 살짝 비튼 몸이 눈에 밟혀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누가 금속이 차갑다고 했던가. 차갑기는커녕 ‘핫’하기까지 한 이런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에디터 | 이영진(yjlee@jungle.co.kr)
자료제공 | 최-페레이라 건축(www.chaepereira.com)
단단하고 네모난 철재 상자형태의 멋드러진 집, ‘스틸 레이디(Steel Lady)’를 설계한 이들은 2005년 서울공연예술센터 국제아이디어공모전에 당선되면서 서울에서 함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건축가 최성희와 로랑 페레이라(Laurent Pereira)다. 스틸 레이디는 지하 1층, 지상 3층의 개인 주택으로 반듯한 박스 형태지만 금속 표피 때문에 주변의 다른 건물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띈다. 최성희는 스틸 레이디에 대해 높은 콘크리트 담장 안에 반듯하게 갇힌 이웃집과 달리 지나가는 이들에게 ‘이 건물이 뭔가를 말하려 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단다. “스틸 패널 위로 살짝 간격을 두고 그물처럼 엇갈려 둘러친 가느다란 스틸 바(bar)도 외벽 표면의 그림자와 반사각을 다채롭게 만드는 요소예요.”
“금속도 하나의 건축 재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최성희와 페레이라 로랑은(이하 최-페레이라) 단순 명쾌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2년 여에 걸쳐 부식스테인리스스틸의 성격, 반사성, 색, 조합의 방법 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금속은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재료예요. 무엇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반사의 정도가 달라지죠. 그리고 매우 강한 재료이기도 합니다. 마술 같은 재료는 없어요. 단지 좋은 건축이냐 아니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예요.” 그래도 금속을 주거 건축의 재료로 쓸 생각을 누가 해봤을까? 금속은 차갑다. 하지만 그것은 금속의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는 성질이 우리에게 심어준 이미지일 뿐이다. 주거 건축에 금속이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무릇 집이란 따뜻함과 은근함을 주는 공간이라는 편견 때문일 터. 하지만 금속에도 ‘따뜻한 사연’은 있다. 하늘빛이 푸르면 저도 푸르고, 주변 나무에 잎이 무성하면 어느샌가 초록빛이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빛깔은 집의 이름 ‘레이디’에 걸맞다. 소재의 사용에 편견을 갖지 않은 최-페레이라의 건축관은 ‘Silver shack’과 ‘Godzila’에서도 드러난다. 빛이나 소리, 비례, 씨퀀스에 집중한 디테일을 고스란히 담았기 때문이다. 재료는 그들을 도와주는 친구나 다름없다. 그래서 최-페레이라는 설계 또는 공사 도중에도 재료의 좋은 성격을 발견하면 전체 프로젝트를 수정하기도 한다고.
최-페레이라는 스틸 레이디를 작업하며 만난 클라이언트도 한국의 여느 건축주들과 다름없이 ‘빨리빨리’와 ‘최대한 넓게(방도 많이, 욕실도 많이, 수납장도 많이)’를 요구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아무리 감수성이 풍부한 클라이언트라 할지라도 건축, 예술적으로 의미 있는 요구사항들을 정리하여 제시하기에는 아직 무리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최-페레이라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거의 100% 충족시켰다고 한다. 그 요구를 만족시키면서도 최-페레이라만의 건축관을 내포하는 작품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도 잊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런 작업 과정을 통하여 2009젊은 건축가 상, 2009 서울시 건축상, 2009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둔 셈이다.
“르 꼬르뷔지에 옷을 벗고 자신이 만든 건축물을 거닐곤 했어요. 마치 공간이 사람을 안아주는 생명체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처럼 좋은 건축은 관계의 가능성, 좋은 지각의 경험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페레이라 로랑의 말에 따르면 공간은 지각되기 위해 조직되고, 유용하기도 한다. 건축을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본다는 그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실험적 건축과 그에 대한 새로운 프로세스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각의 경험을 중요시 여기는 그답게 여행을 하고, 책을 읽고 의미 있는 공간들을 경험하는 것에 시간을 할애한다. 미친 듯이 일하는 것 또한 즐기고 있다고. 그 과정에서 배움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이 모든 것이 건축가에게는 경험의 축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작은 규모의 건축물을 조물조물 예쁘게 잘 만드는 건축가가 있는가 하면 상당한 규모의 프로젝트에서 대담함을 보이는 건축가들이 있다. 주거건축을 많이 작업해왔다고 해서 최-페레이라가 전자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페라하우스, 미술관, 공원 등 꽤 큰 규모의 건축물도 알게 모르게 틈틈이 작업해왔기 때문. 그렇다면 그들이 다음에 떡 하니 선보일 프로젝트는 과연 무엇일까? “지금은 여러 종류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도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싶어요. 매번 새로운 문제들이 나타나고 정신적 폭발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고, 꿈을 꾸고, 일의 방법을 재정립합니다.” 그래서일까. 지금 최-페레이라는 모든 프로젝트를 해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어서 그 자신감으로 세상에 없는 또 하나의 공간을 선물해주길 바래본다. 메탈은 차갑다는 편견을 부순 그들의 스틸 레이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