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6-05
공간을 환상적으로 만드는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이 속하게 될 상황을 상상하는 건축가의 능력이라고 믿는 르씨지엠의 구만재. 어디서 본 글귀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늘 그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그의 디자인을 조절한다. 너무 지나치지 않도록…
취재 | 호수진 객원에디터 (lake-jin@hanmail.net)
주택가 반지하층에 위치한 르씨지엠은 공간 자체가 감각적이었다. 아니, 단지 감각적이라고 표현하기에 그 공간은 마치 탐험을 해야하는 동굴마냥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요소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잠시 긴장을 풀고 하나 하나에 시선을 두자니 마음이 조급할 정도로 봐야 할 것들이 많다.
인터뷰내내 나의 시선을 끌던 것은 디자이너 구만재 뒤, 이열 횡대로 제자리를 잡고 있는 16개의 정사각형 이미지. 어느 작가의 작품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이 이미지는 그의 추억을 담고 있는 것이란다.
그에게는 그의 삶의, 그의 디자인의 원동력이 되는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이 필요하다. 공연 티켓에서부터 언덕을 뒤덮었던 노란 꽃의 이미지까지 삶의 순간 순간의 감동을 놓치고 싶지 않다.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 새로운 기억이 보태져 완성되는 기억은 무엇보다 완벽하단다. 이럴수가. 그의 첫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여성스러운 세심함이었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러한 세심함뿐이 아니었다. 그의 이력에서부터 디자인 방식까지 놀라지 않을 것이 하나 없었다.
대학시절 그의 전공은 생각지도 못했던 경제학. 파리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있는 삼촌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 졸업 후에 무작정 파리로 떠났다. 막연히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데… 파리에 머물던 차에 ‘공간’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축건물이 없는 파리에서 새로이 레노베이션되어지는 구체적이고 직감적인 공간은 그로 하여금 그의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하기에 충분했단다.
학교를 졸업하고 파리에서 직장을 구했다. 생의 첫 프로젝트는 젊은 독신 파리지앵의 아파트. 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 주어진 작은 공간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싶었기에 머리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탄생한 공간은 그가 담고 싶었던 다양한 스타일을 담고 있는 키치적 공간. 당시 코드에는 어떠했을지 짐작 가지만, 근자에 유행하는 스타일로 생각해보면 멋진 공간이라고. 그때부터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었던 것일까?
말은 쉬웠다. 공간이 어려운 얘기를 담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파티하듯 즐거운 곳이 좋은 공간이다. 순간 임의적이고 자극적인 공간일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았으나, 결코 파티를 잠깐 즐기듯 즉흥적으로 탄생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공간을 떠나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는 일상이 그 열쇠.
일반적인 삶 속에서 만나든, 전시회를 통해 만나든, 책 속에서 만나든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이든 디자인의 소재가 된다. 우리의 민화 ‘책가도’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그. 지난 겨울 서양화가 엄정선씨가 책가도를 현대 미술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설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길로 그는 그녀의 책가도를 공간에 응용했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같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는 디자인의 단서를 발견한다. 얼마전 끝낸 양평 주말 주택의 컨셉트는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읽으며 주말과 평일의 경계에 있는 주말 주택,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의 경계에 있는 주택에‘꽃’의 느낌을 담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뭔가를 잠시 생각하던 그. 책상서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일종의 팬레터(?). 양평에 그가 지어놓은 이 주말 주택을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누군가가 우연히 잡지책에서 그 집의 작가가 ‘구만재’라는 것을 발견하고 메일을 보낸 것이다.
언젠가 아내에게 그렇게 멋진 집을 선물 하겠노라는 약속을 했다는 발신자. 이런 멋진 메일을 받은 디자이너의 기분은 어떠할까? 좋은 디자인이란 여자친구에게 좋은 꽃을 선물하는 것과 같다는 목적성이 없는 기쁨을 얘기하며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가능하게 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막연히 떠난 파리에서 얻게 된 직업이라고 하기엔 인생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주택은 그 어느 공간보다 재미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단다. 물론 디자이너의 의도대로 흐를 수 있는 상공간이나 그 기능에 충실 하는 것이 중요한 의료 공간들 역시 그에게 재미를 선사하지만, 공간을 만들어내는 동안 한 가족의 생활방식에 젖어 사는 재미도 그동안 떠오르는 것들을 새로이 제안해 클라이언트가 그처럼 살아주는 것도 하나의 보람이다. 물론, 가족 나름의 장식을 할 수 있는 빈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하나의 선물.
빠른 독립에 누구나 그러하듯, 디자이너 구만재에게도 어려운 것은 영업이다. 하지만, 좋은 축구팀을 만들어가는 감독처럼 구성원 하나 하나의 장단점을 조율하며 멋진 팀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의 범위가 좁은 직장인 때와 달리 그 폭이 넓어지고 그만큼 아이디어의 폭도 커진다.
유난히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긴다는 디자이너 구만재는 아이디어가 커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꿈. 「 완당평전 」을 읽으며 그린 그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친한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추사 김정희 처럼 매화꽃에 대해 얘기할 그 날을 그린다. 사람들과의 의사소통 속에서 디자인 단서 찾기를 즐기는 그에게 지인들과 둘러 앉아 나누는 시간은 무엇보다 값지리라. 책을 덮자마자 사다 놓았다는 매화꽃이 그의 사무실 문 앞에서 곧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낯설은 명칭 르씨지엠은 파리에서 지역을 나누는 단위로 6구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홍대 앞처럼 젊음과 지성이 넘쳐나는 곳으로 특정한 무엇 없이 하나되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한 분위기를 디자인에 담고 싶어 붙인 이름 르씨지엠은 현재 서울 뿐만 아니라 파리에서도 운영중이라고. 처음에는 후배들을 모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인테리어 전공자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내기에 다른 영역의 사람들과 일을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가끔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대학시절 ‘경제학’에 대한 기본 바탕이 그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인테리어 디자인뿐만 아니라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컨설팅은 클라이언트로 하여금 신용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게 다져진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는 대게는 지속된다. 그러한 믿음 속에 얻는 프로젝트들은 오히려 디자이너 구만재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최상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어쩌면 한번 맺은 인연이 계속해서 그를 향해 손짓하게 하는 힘이 아닐까?
디자이너 구만재는 그랬다. 첫인상과 달리 매우 섬세했으며, 매우 계획적이었고, 매우 정돈되어 있었다. 보여지는 것 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