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29
파주출판문화산업단지에 거대한 책의 숲이 생겼다. 서가 면적 1,244㎡, 최대 높이 8m, 길이 총 3.1km이고, 수장 도서만 50만 권인,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책으로 둘러싸인, 말 그대로 책의 숲이 생겼다. 서가에 꽂혀있는 책 제목만 읽어 내려가도 며칠이 걸릴지 모를 정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수장 도서가 기증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지혜의 숲’은 가치가 있음에도 오래되고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책들을 보존하고 자원화하기 위해 ‘공유서재’, ‘공동서가’ 개념으로 조성, 시도 된 첫 번째 도서관이다.
글, 사진│구선아 객원기자(dewriting@naver.com)
지혜의 숲은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와 게스트하우스 호텔 지지향의 1층 로비와 복도를 확장시킨 공간에 890㎡(270여 평)의 규모로 자리잡았다. 빼곡히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정형화된 책장에 ㄱ, ㄴ, ㄷ, ㄹ, ㅁ 등 한글 자음을 형상화한 모듈 서가와 함께 디자인해 완성했다. 이 모듈 디자인이 책을 이루는, 텍스트의 근간이 되는 한글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재미있다. 이 자음 서가 디자인의 컬러도 빨강, 파랑, 녹색 등 다채롭게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스런 나무 서가와 따뜻한 느낌의 황색 조명 빛이 대조돼 중간중간 공간을 잡아 정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가와 서가 사이, 그리고 서가와 복도 사이에는 강익중 작가 등 국내 예술가들의 조형물도 함께 설치돼 있어,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킨다.
도서관은 크게 세 개의 서가 형태로 지혜의 숲 1, 2, 3 으로 나눠져 있다. 지혜의 숲 1은 국내 학자, 지식인, 전문가들이 기증한 도서가 소장돼 있는 곳이고, 지혜의 숲 2와 3에는 출판사의 기증 도서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다.
앞서 말했듯 기증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이다 보니 도서 분류는 여타 도서관과는 다르다. 문학, 예술, 기술, 취미, 인문 등으로 분류한 것이 아닌 석경징(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유진태(재일 역사학자), 유초하(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한경구(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등 학자 30여명의 기증자와 140여 곳의 박물관 및 연구소, 40여 개의 출판사와 유통사에 의해 도서가 분류돼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도서관이라기 보다는 누군가의 거대한 서가 같기도 하고 서재 같기도 하다. 기증자와 출판사별로 꽂혀있는 책들을 보면 기증자의 특성과 출판사의 특성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 출판과 출판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운영방식도 특별하다. 타 도서관과 달리 24시간 운영되며 컴퓨터나 인덱스를 통한 도서 검색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용할 때 기증자, 출판사명 등을 보고 서가를 둘러보며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보고 그 자리에 다시 꽂아두어야 한다. 도서관 내에는 사서나 운영요원이 아닌 '권독사(勸讀司)'라는 이름의, 책을 사랑하는 독자 자원봉사자 30여명이 운영 지원을 하고 있다. 20대에서 60대 사이의 주부, 직장인, 취업 준비생은 물론, 은퇴한 이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권독사들은 사용자들의 안내는 물론 사용자에게 책 정보를 제공하고 사용자의 니즈에 맞게 책을 추천하거나, 찾아주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지혜의 숲은 책과 관련된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책 발간과 함께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개최하고 있으며, 7월부터 12월까지 매주 토요일에는 ‘출판도시 인문학당’이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인문학당은 강연과 공연을 곁들인 프로그램으로, 매주 다른 주제를 가지고 저자와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다. 지난 7월부터 10월까지, 15번의 강연이 이루어졌으며 앞으로 12월까지 ‘근대 한국의 성과 사랑(전봉관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과 교수)’, ‘사진 속 작가의 삶(민병헌 사진작가)’, ‘옛 서가들이 그린 우리 땅의 아름다운(이태호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등 9회의 강연이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지혜의 숲 내 전시공간에는 책과 관련된 기획 전시들이 열린다. 파주 북소리 축제가 열렸던 지난 10월 12일까지는 광개토대왕비문 미공개 탁본이 공개되어 많은 관람객들을 놀라게 했던 ‘7인 7색의 고서들’ 전시와 7321디자인과 16인의 작가가 함께하는 여행의 추억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Souvenir De voyage’ 일러스트 전시가 진행되었다.
‘근대 출판 여명기의 어린이책과 잡지(김병준 지경사 대표)’, ‘책, 시대를 비추는 거울(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고서는 책 만드는 나의 교과서입니다(김언호 한길사 대표)’, ‘조선시대의 알피니스트와 우리 산하(변기태 대학산악연맹 부회장)’, ‘고서는 우리 민족의 혼이다(여승구 화봉문고 대표)’, ‘광개토대왕비문 미공개 탁본(윤형두 범우사 회장)’, ‘책에 관한 새로운 시각, 보편성의 특수성(이기웅 열화당 대표)’이 참여한 7인 7색 고서전에서는 19세기 서양에서 발간된 고서들부터 국내 문학 초판본 등이 전시돼 국내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희귀하고 가치 있는 책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개관 때부터 많은 이슈를 만들어 낸 지혜의 숲. 아니 아직도 만들어 내고 있는 이곳은 색다른 도서관과 서가 디자인, 24시간운영방법 그리고 예산 논쟁까지. 논란을 딛고 새로운 개념을 도입한 도서관으로서 파주출판도시에서 오래도록 자리매김하려면 사용자와 지혜의 숲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50만 권의 책이 관상용, 전시용이 아닌, 실제 사용자들이 찾고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책이 되어야 하고, 그러한 공간이 되려면 사용자들 먼저 ‘도서관은 이래야 한다’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인식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검색이 되지 않고, 대여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불만의 목소리만 높일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책을 찾고 읽는 도서관이 아닌 온전히 책을 위해, 책을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인식해야 한다. 또한, ‘공유서재’, ‘공동서재’라는 개념을 조금만 이해한다면 지혜의 숲은 우리나라 도서관의 새로운 문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높은 서가 때문에 혹자는 책들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라 칭하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 지혜의 숲이 가진 차별화된 디자인을 살려 취약점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령 서가와 어울리는 디자인에, 이용이 쉬운 사다리를 구비한다거나 권독사의 역할 개선 등을 통해 그 방법을 고민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혜의 숲은 아직 개관한지 채 5개월도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살피면 지혜의 숲은 분명 파주출판도시의 랜드마크로서, 대한민국 도서관의 새로운 지평으로서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