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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예술의 초상

2011-05-09


삼일로 창고극장의 표상은 연극이라는 한 장르만 비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30년 넘는 세월을 한 자리에서 지켜왔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불안한 미래, 이는 곧 순수 예술이 직면해 있는 공통의 현실을 상징한다.
간판을 내릴 위기에 처했다가 쌓인 먼지를 털고 제 2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 삼일로 창고극장이 지금까지 굳건히 지켜온 순수예술의 자존심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 마음이 쓰인다.

글, 사진 | 팝사인 한정현 기자 hjh@popsign.co.kr


추억 속의 간판 ‘삼일로 창고극장’
1975년 첫 간판을 건 삼일로 창고극장은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순수 연극을 향한 열정 하나로 무대를 지키고 있는 우리 연극계의 보고(寶庫)다. 창고극장은 당시 연극인들이 직접 터를 잡아 마련한 공간으로 명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연극인들의 성지였다. 정대경 대표는 2003년 연극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명맥을 이어온 창고극장의 여섯 번째 주인을 맡으면서 갤러리를 조성하는 등 전통과 현대의 접점을 시도했다.

정대경 대표가 창고극장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창고극장에서 생애 첫 공연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극이라는 것을 본 곳이 바로 이곳 창고극장이었고, 창고극장의 오래된 간판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사물은 누구에게나 고르게 인식의 기회를 주지만 기억은 저마다 다른 색깔로 남게 된다. 정대경 대표에게 있어 창고극장의 기억은 오래된 간판으로 남아 있었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마주한 창고극장의 간판은 창고 깊숙이 담겨져 있는 오래된 기억을 추억으로 되살리는 사이니지였다.


세상은 수많은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로 얽혀져 있다. 주체인 ‘내’가 타자에게는 객체의 자리에 놓이게 되고, 이런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인식이 작용하는 모든 대상에 얽혀 있다. 연극은 그 어느 장르보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촘촘히 얽혀 있는 예술이다. 배우와 관객, 그리고 극장이라는 공간에선 오래되고 낡은 소극장에 떠도는 뽀얀 먼지처럼 주체와 객체가 얽혀 있고, 화합하고 때론 충돌한다.

극단을 운영하겠다는 뜻을 품고 소극장을 찾아다닌 정 대표에게 창고극장은 자신의 꿈을 실현해줄 객체였다. 그러나 옹골차게 세월을 이겨낸 창고극장의 오래된 간판은 정 대표를 객체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갖고 있었다. 변화를 쉽게 허락하지 않은 창고극장은 곧 문화예술의 힘에 다름 아니었다. 정 대표는 간판하나 바꾸지 않고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극장 공간을 그대로 남겨두고 극장 2층에 관객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갤러리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고하지 않는 관객, 무대 뒤로 퇴장하는 예술
창고극장은 순수 예술을 고수하는 연극계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돈이 벌리는 공연을 위해 모두들 명동을 떠나 대학로로 둥지를 옮길 때에도 창고극장은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냈다. 대학로에 산재한 많은 극장들은 시대의 변화를 영민하게 받아들여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공연들을 무대에 올렸다. 유쾌한 터치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희극, 또는 자극적이거나 유명 배우를 섭외한 블록버스터급 연극들이 관객에게 어필하며,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창고극장도 관객들을 끌어 모으고, 공연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명동의 상권을 이용해 외국인 관광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한류 공연을 올린다든가, 유명 배우를 캐스팅해서 티켓 값을 높게 받으면 창고극장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겠죠. 하지만 창고극장이 지켜왔던 순수연극, 그 전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술의 진정성이 창고극장으로 사람들을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터넷, SNS 등 디지털 할인으로 무장한 상업 연극에 관객이 쏠리는 현상을 막기는 역부족이라고 정 대표는 말한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사람들의 취향이 변해버렸다는 것과 연극이 단순한 오락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현실이다.
“인생을 깊이 있게 되돌아본다거나 사회의 거울을 연극에 투영한다거나, 관객들은 심각한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창고극장의 운명을 담담히 말했다.
순수연극을 외면하는 관객들이 야속할 만한데 정 대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화하는 시대에서 관객 취향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연극이 끝날 때까지 막은 내리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는 연극, 사람들이 외면하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빚더미에 오르면서까지 창고극장을 지키고 있는 정 대표에게 주변에서는 이제 그만 손을 놓으라고 안타까워한다.
창고극장이 우리 시대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와 당위성을 힘주어 말하면서 정 대표는 극장의 두 번째 대표였던 이원경 선생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원경 선생은 ‘삼일로 창고극장’이라는 이름을 짓고, 프로듀서 시스템을 우리 연극에 최초로 도입한 연극계 거목이다.
정 대표는 “극단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극단에 구애받지 않고 연출가와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젊은 배우들이 모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창고극장이 그런 무대를 제공한 것입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지난해 작고한 이원경 선생의 유산을 마음의 창고 깊숙이 담아두고 창고극장을 꾸려가고 있다. 창고극장이 문을 닫으면 실험적이고 순수 연극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이 우리 곁에서 아주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다.
배우예술원에서 걸출한 배우들을 제자로 키워냈고 현재 창고극장에서 배우 화술교실을 수년 째 열어 젊은 연극인을 양성하고 있는 강영걸 선생도 정 대표에게 큰 힘이 되는 마음의 기둥이다.
오래된 것, 추억, 문화예술, 순수연극 등의 키워드로 점철된 창고극장은 정대경 대표를 페르소나로 내세워 우리시대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대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장을 다시 찾는 사람들, 저마다 쌓이는 추억 한 조각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적자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창고극장은 최근 후원회를 통한 지원으로 제2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재정난으로 위기에 처한 창고극장의 사연을 들은 박형상 전 중구청장은 중구청공무원노조에 이 사실을 알렸고 700여명의 공무원들이 힘을 모아 후원금을 마련했다. 또한 몇몇 대기업에서도 창고극장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혀와 구체적 협의 과정에 있다고 한다.
후원회를 통해 창고극장의 재정이 개선된다면 극장 운영 차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순수 연극이 주체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동반된다. 또한 일회적인, 혹은 생색내기 식 지원으로는 예술의 자생력을 키울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정대경 대표는 “과거 창고극장에서 연출된 뛰어난 작품들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명작 다시보기’를 무대에 올리는 것이 소원입니다”고 창고극장의 정통성을 지키고자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우리 시대에서 순수 연극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는 질문에 정 대표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없겠죠. 아마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손해죠”라고 답했다.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 위에 걸어 놓은 이유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극단 측에 따르면 그 문구가 마음을 울려 창고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예전 정 대표가 그러했던 것처럼 젊은 사람들이 창고극장에서 기억을 만들고 훗날 추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뿌리 깊은 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오래된 것은 스스로 힘을 가진다는 말의 힘을 믿어본다.

※ <세상을 바꾸는 사인> 연재기사는 행정안전부, 한국옥외광고센터와 월간 (주)팝사인이 간판문화 선진화와 발전을 위해 공동으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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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 Sign, Lighting Design 전문 매거진 월간 <팝사인> 은 국내 최초의 옥외 광고 전문지로, 국내 사인 산업의 발전과 신속한 정보 전달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또한 영문판 잡지인 발간을 통해 국내 주요 소식을 해외에 널리 소개하고 있으며, 해외 매체사와의 업무제휴 들을 통한 국내 업체의 해외전시 사업을 지원하는 등 해외 수출 마케팅 지원 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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