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09
서울의 북서쪽, 조선시대에 도읍지로 천거되기도 했던 연희동. 고즈넉한 가옥과 상점, 아기자기한 카페 등이 사이 좋게 어울린 이곳에, 겉으로 봐선 그 정체를 쉬이 헤아리기 어려운 희한한 건물이 들어섰다. ‘백색가전’을 연상시키는 미끈한 외모의
<연희동 프로젝트>
는, 한국 현대미술의 현재를 목격하는 전시와 국내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매니지먼트가 동시에 일어나는 특별한 곳이다.
에디터 | 이상현(
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연희동>
인적이 드문 연희동 궁뜰길에 지난 3월 오픈한
<연희동 프로젝트>
는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궁금증을 자아내는 특별한 외관으로 단박에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패션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연상시키는 세련되 건축미를 자랑하는 이 건축물은 먼저 입구와 창문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물의 전면 때문에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치 비밀통로처럼 입구는 건물 배후 면의 꼭짓점에 터져있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모서리를 칼로 베어낸 듯한 삼각형의 입구 모양.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건물의 모든 모서리가 같은 모양으로 ‘절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0평 남짓한 주택 건물을 갤러리로 다시 세우는 작업에 착수한 건축팀 ‘시스템 랩’은 환기와 채광, 그리고 최대한 많은 전시 벽면의 확보라는 상충되는 요구를 충족시키 위해 흥미로운 해법을 고안했다. 그러니까 환기와 채광 기능을 하는 입구와 창문을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요되는 벽량을 최대한 줄이고자 벽을 대신하여 모서리 부분, 즉 건물의 꼭짓점을 절개한 것이다. 또한 이 절개면은 일반적인 유리가 아닌 FRP, 즉 강화 플라스틱으로 덮음으로써 또 다른 기능을 발휘한다. 자동차의 범퍼에 사용되는 강화 플라스틱은 도색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빛을 은은히 투과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작품 훼손을 야기하는 자연광을 한번 더 걸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끌어들인 빛은 마치 공간을 품고 있는 듯한 효과를 내며 정서적인 무드를 마련하기도 한다. 게다가 야간에는 마치 반딧불이처럼 강화 플라스틱을 씌운 절개면을 통해 실내의 빛이 밖으로 스며나오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장치로 전용된다.
연희동>
이렇듯 어렵게 확보된 전시 공간은 다시 1, 2층과 지층, 옥상에 구별된 기능을 부여한다. 1층은 입구, 로비, 전시장 등을 동시에 책임지고, 보다 넓은 전시 공간이 마련된 지층은 본격적인 전시장으로서 기능하며, 가장 협소한 2층은 오피스 공간과 상설 전시장, 화장실로 배분되어 있다. 특히 2층의 화장실 공간이 재미있는데, 이는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삼각형의 계단 사이공간에 화장실 타워를 넣음으로써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한 계단과 화장실 벽면의 사이공간에도 규모가 큰 작품의 운반을 위한 슬릿(slit) 기능이 가능하게 했다. 한편 2층에 오피스 공간을 충분히 마련한 이유는,
<연희동 프로젝트>
가 국내 현대 미술의 현재를 보여주는 갤러리이자 국내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돕는 매니지먼트 사업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배준성 작가의 형으로 알려진 배운영 대표가 “한국 작가들을 보다 조직적으로 그루핑(Grouping)하여 국외에 프로모션함으로써 경쟁력 있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세계 현대미술의 문맥과 연결하는 작업을 진행하고자 개관하였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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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갤러리의 정체성은 다시 건물 외형과 절묘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전체적인 용모를 마치 휴대폰이나 에어컨, 냉장고와 같은 산업 생산품의 이미지로 재현한 이유는, 바로 예술품 역시 소비되고 유통되는 ‘상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의 모서리를 곡면 처리한 이유는 제품 특성과 유사한 형태 언어를 구현하는 것”이며 “일반 도장이 아닌 광택 코팅을 시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시스템 랩의 설명이다. 이는 “현대 예술품의 유통을 제품의 유통과 유사한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소위 미술품을 쇼핑하는 소비 계층의 감성적 반응을 역설적으로 유추한 것”이라는 총평이다.
건물 외형과 내적 정체성이 절묘한 합의점을 이루는
<연희동 프로젝트>
는 외적으로 특별한 건축미로 연희동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며, 내적으로 국내 작가들의 세계 진출 활로를 열어 한국 미술의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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