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13
70m 폭 거대한 강남대로 너머의 4m 폭 작은 뒷골목. 줄 지어선 20층 타워 너머의 소규모 상가와 주택들. 이 대조적인 스케일이 아무렇지 않은 곳,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다. 낮지만 빽빽이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수호초로 덮인 건물이라니. 마치 신사동에 깃발을 꽂은 듯, 녹색 식물을 뒤집어쓴 채 커다란 입을 벌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붙드는 건물이 있다.
글 임진영 월간공간 기자 | 사진 스튜디오 salt | 에디터 권순주
이곳은 앤드뮐미스터 숍이다. 아니, 정확히는 플래그십스토어 앤드뮐미스터 숍과 레스토랑 달과 톰그레이하운드의 원더 월드다. 세 가지 프로그램은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진 실내공간으로 또 다양한 방식으로 최대한 외부 공간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게끔, 숍에서 쑥 늘어난 통로는 2층의 출입구도 지하공간의 출입구도 된다. 하나인 듯하면서도 들어서는 입구와 높이가 다르지만 또 이곳저곳의 투명한 창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한 건물 세 공간이다.
벨기에의 패션디자이너 앤 드뮐미스터는 1985년 패트릭 로빈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했다. 1999년 안트워프에 첫 매장을 세웠고, 2006년에는 도쿄와 홍콩에 앤의 플래그십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2007년 서울에서 앤의 숍을 만나기까지 걸린 18년은 아마도 우리 도시에 아방가르드하고 매니악한(더구나 과감하게 비싼!) 앤의 옷을 소화해낼 패션 피플들이 등장하기까지의 시간은 아닐까.
장식적이지 않고 잘 쓰이지 않을, 더구나 서로 어울리지도 않을 소재를 재치 있게 섞어내는 그만의 스타일을 사람들은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영혼의 내면을 반영한다”고 한다. “진지하지만 엄중하지 않고, 세심하지만 실험적이며, 강하지만 항상 감각적”인 스타일 말이다.
“패션은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법”이라는 앤 드뮐미스터의 말대로라면, 한국 사회(의 일부)와 앤의 스타일(혹은 브랜드)이 소통하기 시작한 그 지점에 건축가 조민석의 건축이 있다. 투명하지만 어두컴컴하고 동굴 같은 실내가, 단단한 골격을 감싼 부드러운 지오텍스타일(토목섬유, geotextile) 외벽이, 유기적으로 뻗은 백색 공간에 축축한 이끼가, 서로 다른 높낮이의 스킵플로어가 한데 들어간 ‘이상한’ 공간이다.
1층에 놓인 앤의 숍은 건물 너머 대나무까지 선명할 정도로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였다. 어디가 입구일지 잠시 고민하며 대형 유리 앞에서 주춤하겠지만, 숍으로 과감히 들어가도 좋다. 높이 3m에 달하는 대형 공간을 기둥 없이 만들기 위해 건축가는 유기적 형태의 쉘을 만들고 이 곡선을 가장자리의 원형기둥으로 이어 대공간을 지지했다. 진갈색 노출콘크리트로 된 내부 공간은 동굴과도 같다.
구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나면, 금세 그 공간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는 앤의 옷이 보인다. 혹시 흠집이라도 나면 어쩌나 안절부절 할지도 모를 가격표를 단 채 백스테이지의 가림막처럼 캔버스와 나무 틀 사이로 무덤덤하게 걸려 있는 옷을 보노라면, 버섯을 먹고 한없이 작아졌다가 다시 정신없이 늘어나버리는 앨리스의 키처럼 좋고 나쁜, 높고 낮음에 대한 절대기준은 사라져버린다. 아! 이 소박하고 사치스러운 공간이여.
분명 하나로 이어진 건물이지만 2층 레스토랑과 지하의 또 다른 매장에 가려면 다시 문을 나서야 한다. 2층에서 늘어나 뻗어 내려온 녹색 팔은 2층과 지하로 통하는 하나의 출입구다. ‘달’이라는 매력적인 인도 음식 레스토랑은 온통 하얀 통로 사이사이로 보이는 녹색 융단을 힐끗거리게 하는 발랄한 창문을 지나 이른다. 단조롭지 않도록 내부는 서로 다른 높이를 가진 공간으로 마치 계단처럼 엇갈리게 되어 있다. 스킵플로어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곳은 식당이니, 식사를 즐길 때만 오르기로 하자.
그리고 드디어 이상한 나라의 진짜 토끼굴이라도 되는 듯, 지하로 통하는 길은 백색 공간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퍼져나가 이끼로 덮인 동굴과 만난다. 그곳에 온갖 괴상한 수수께끼와 재기발랄한 말장난이 가득한 톰그레이하운드가 있다. 모네의 파이프와 모자가 떠다니고 벽면을 캔버스 삼아 속삭이는 듯한 상상을 그려낸 인테리어는 뉴욕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베를린에서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상윤이 맡았다.
벽에서 돋아나온 계단, 커튼을 묶어 흘러내린 라푼젤의 머리카락, 새장과 어디로 연결될지 알 수 없는 비상계단, 지팡이 같은 초현실적 이미지는 보기만 해도 명랑해지는 옷들 사이에서 조금 따뜻해진다. 무엇보다 이곳은 수입 멀티숍이 주는 높은 문턱을 낮추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최고의 디자인을 만끽할 수 있고, 구매력이 없다 해도 눈치 받지 않는다. 매장에서 가장 신경 썼다는 바에서 커피 한잔을 청할 수도 있다. 진정, 디자인과 패션을 누리고 갈망할 줄 아는(설령 주머니가 가볍다 해도) 젊은이들에게 열린 곳이다.
건축가는 이 오밀조밀한 강남 이면의 도시조직에서 홀로 오브제로 서 있는 건물보다는 자연과 인공 사이 어느 지점에 놓인 ‘혼성적 유기물(synthetic organism)’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좁은 대지에 녹색 외피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연과 인공이, 외부와 내부가 대치가 아닌 융화(amalgamation)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가꾸고 가끔은 솎아주기도 해야 하는―겨울이면 흙이 보였다가 다시 자라 뒤덮이기도 하는―이 외피는 디자이너 앤 드뮐미스터의 적극적인 지지와 건축주 한섬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렇다. 이 건물은 살아 움직이는 이끼와 식물을 두르고 있다. 더구나 수호초로 만든 이 지오텍스타일은 벽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한없이 증식하는 담쟁이덩굴처럼 강한 생명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철마다 창호지를 새로 바르고 흙벽을 손질하듯, 가꾸어야 하는 이 덩치 큰 화분을 덥석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았으리라. 모든 게 손익논리로 평가되는 이 절대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비싸고 아방가르드한 브랜드를 가장 부담 없는 공간으로 만들어 내놓은 한섬의 마인드만큼 이상한 나라의 일이다. 아니면 충만한 상상력으로 가득했던 엉뚱하지만 낭만적인 어린 시절의 잊고 있던 꿈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