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5-14
삼성맨? 현대맨?
디씨인사이드에는 PAIN 게시판( http://board5.dcinside.com/zb40/zboard.php?id=pain)이라고 있습니다. 지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검색엔진 등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통을 토로하는 환자들의 게시판은 아닙니다. 폐인을 영어로 PAIN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폐인은 디씨폐인에서 시작해 다모폐인, 싸이폐인, 블로그폐인 등 다양하게 응용됩니다. 폐인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병이나 못된 버릇 따위로 몸을 망친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은 은어처럼 되어서 폐인이라 함은 무엇인가에 정신없이 열중하여 일상을 그르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는 나쁘게 해석한 것이고, 좋게 말하면 매니아(mania)입니다. 엽기나 얼짱과 더불어 폐인 역시 큰 유행을 타고 폐인을 둘러싼 말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이런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만 우회하겠습니다.
삼성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에서 근무하거나, 근무했던 사람을 통틀어 말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기업에 ‘~맨’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기업 출신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맨’을 붙이는 경우는 그 사람들이 어떤 공통적인 문화를 갖고 있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현대맨, 대우맨, LG맨도 마찬가지입니다.
2003년에 잡코리아가 대학 재학생 및 대졸 구직자 1만8천여 명을 대상으로 국내 6대 그룹 이미지를 조사했습니다. 이 조사에서 ‘삼성맨’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냐‘는 질문에 ’30대 초반으로 큰 키에 지적이고 세련된 전문직 남성‘이 연상된다고 대답했습니다. ’현대맨‘에 대해서는 ’40대 초반의 뚱뚱한 체형으로 투박하고 유행에 둔감한 생산직 남성‘의 이미지를 얘기했습니다. 희한하게도 제 동기 중에 삼성맨과 현대맨이 있어 보고 있으면 무릎을 탁 칩니다. 딱 들어맞더군요.
어느 기업이든 이렇듯 문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기업의 규모의 의해 문화가 알려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그 문화가 독특해서 알려지기도 합니다. 미국 포춘지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톱 10’으로 5년 연속 선전된 UPS의 윤리경영 문화는 자주 외신을 통해 소개됩니다. UPS코리아의 대표는 비서도 없고 운전기사도 없습니다. 전화도 직접 받고 커피도 스스로 탄다고 합니다.
최근 한 조사에서 구직자가 뽑은 1위 기업 웹사이트로 선정된 삼성 홈페이지(www.samsung.co.kr) 초기화면의 절반은 삼성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흔히 기업홈페이지가 그 기업이 보유한 컨텐츠나 제품을 소개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렇듯 기업의 문화를 보여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5위였던 현대자동차 홈페이지는 역시 자동차로 물결칩니다.
자, 이제 그럼 왜 삼성맨, 현대맨 얘기를 꺼냈는지 얘기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차별성을 인식하기 위해 독특한 어휘를 덧붙이곤 합니다. 유머가 아니라 엽기유머, 동영상도 엽기동영상, 미소녀도 얼짱미소녀, 심지어 포르노도 얼짱포르노로 덧붙여 부릅니다. 어떤 것을 그 자체로 보기보단 그것의 속성을 끌어내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냅니다. 삼성출신의 사람들을 삼성맨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디씨폐인 역시 디씨인사이드를 즐겨 이용하는 사람들을 디씨폐인이라고 표현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폐인 신드롬이 문화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아햏햏라는 말이 디지털카메라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두 단어, 아햏햏와 디카는 이렇게 엉뚱하게도 디씨폐인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남들이 커뮤니티 솔루션을 수억, 수십억 들여 개발하고 있을 때 단지 제로보드 게시판 수십 개로 디씨폐인이라는 삼성맨같은 디씨인사이드만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다모폐인이란 말은 다모라는 드라마가 매우 재미있다는 것 외에도 많은 효과를 냅니다. 하나의 드라마가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블로그폐인은 블로그를 밤새 즐기고 늦잠 자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블로그라는 문화를 일컫습니다. 문화는 아시다시피 매우 강력합니다. 국가는 쉽게 망해도 문화는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를 정복한다는 말은 단순히 정치와 군사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문화를 바꾼다는 말입니다.
문화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사대사상이나 서구문물을 동경하는 예가 있습니다. 가까이는 “옆집 똘이 아빠는 어떻다던데...”하는 식입니다. 하물며 기업이 인재를 채용할 때 인재상이라는 기업의 문화를 얘기하는 것을 보면 문화는 비즈니스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저는 폐인이 바로 하나의 문화로 생각합니다. 디씨폐인이 비록 디씨인사이드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었던 문화가 아니다할지라도 지금 수많은 웹사이트는 이런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싸이질, 싸이홀릭, 싸이폐인입니다. 우리가 싸이월드를 세이클럽보다 높이 사는 이유는 그 기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 기획이 정말 우수해도 아닙니다. 바로 싸이질이라는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네이버 블로그를 높이 사는 것도 네이버 블로그가 블로그폐인을 다수 양산(?)했기 때문입니다.
몇 개월 전에 제가 웹딱(www.webddak.co.kr )이라는 쇼핑몰이 참 인상적이어서 “끄~응, 흔적을 남겨주마”라는 글(http://blog.naver.com/wtoday/40000919998)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 올렸더니 몇몇 분이 덧글을 달아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웹딱 폐인이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덧글 내용을 보면 아래 캡쳐한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영화를 보면 ‘좋다’라고 표현합니다. 좋은 글을 보면 역시 “좋은 글입니다”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좋다”라는 말을 무엇인가 다른 용어로 대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저가 스스로 새로운 어휘를 만들든, 아니면 회사가 만들든 그것은 서로의 애매한 요구에 의해 생겨납니다. 마치 디씨폐인이란 말이 디씨인사이드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어느 유저에 의해 일컬어지고, 다른 유저들에게 공감을 얻어내고 활용되어 자연스럽게 퍼져나갑니다. 그 다음에 디씨인사이드는 폐인게시판을 만들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지만 일단 문화가 생성되려고 하면 의도가 들어갑니다.
이 말은 거꾸로 얘기하면 의도적으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애기입니다. 웹딱이 그런 경우입니다. 여러 가지 디자인 소품을 단순히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각각의 문화를 만듭니다. 그 대표적인 그림이 아래와 같이 상품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하나의 에피소드를 만들어 보여줍니다.
그런데 삼성맨이라는 삼성의 기업 문화 얘기도 했습니다. 웹딱 역시 쇼핑몰임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독특하게 보여줍니다. 아래 그림은 도대체 이들이 무슨 문화를 만드는지 궁금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폐인이란 말이 지금은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오지만 그 말이 있기 전에는 애매모호한 문화였습니다. 디씨폐인으로 분명해지는 것은 유저의 선택입니다. 디씨폐인이 아니라 디씨기인일 수도 있고 디씨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디씨폐인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아래 그림이 어떤 이름으로 문화현상을 표현할지는 아직까지는 모릅니다.(저는 ‘웹딱스럽다’를 제의합니다만...)
이제 얘기도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도 이해가 되는지요? 페인 만들기라는 말은 곧 웹사이트의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웹사이트의 문화가 기업의 문화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네이버, 쥬니버, 엔토이, 한게임은 모두 NHN에서 운영하지만 서로 다른 웹사이트의 문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작은 사이트의 경우는 기업, 혹은 운영자(팀)의 문화가 웹사이트에 스며듭니다. 주로 개인홈페이지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강해집니다.
마린블루스는 이제 다들 잘 아는 캐릭터입니다. 2001년 정철연 씨가 개인 홈페이지에서 웹카툰을 올리면서 인기를 끈 경우입니다. 지금도 저는 성게군 캐릭터가 디자인적으로 우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졸라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맨 처음 졸라맨 플래시 무비가 나왔을 때는 황당 그 자체였습니다. 첫 마디는 ‘참... 엽기적이다’였습니다. 그런데 인기를 끕니다. 캐릭터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바로 문화입니다. 디씨폐인은 디지털카메라의 우수한 기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게시판에서 나왔습니다. 다모폐인은 드라마에 대해 사람들이 수많은 얘기를 꺼낸 데서 나왔습니다. 검색폐인은 없어도 블로그폐인이 있는 것은 블로그에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웹딱을 얘기하면서 ‘에피소드’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바로 에피소드가 모여서 그 웹사이트의 문화를 만들고 이 문화가 어느 정도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으면 폐인이 만들어집니다. 폐인이 만들어지면 다시 문화에 영향을 주어 회사와 유저, 그리고 제3자(주로 언론이 됩니다)가 공동으로 협력하여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게 됩니다.
싸이월드의 투데이포커스는 이 에피소드의 좋은 예입니다. 언제 봐도 멋진 기획입니다. 월. 화, 수, 목, 금/토, 일로 나누어 베스트 미니룸, 축하해요, 이럴 땐 이런 음악, 싸이 POLL, 멤버 인터뷰, 투데이 스토리 등 6가지 주제를 선보이는데, 다른 사이트에서는 광고를 넣는 초기화면 상단에 무려 630 * 182 픽셀을 이 주제에 할애합니다.
미디어다음은 뉴스를 이용해 문화를 만듭니다. 뉴스는 듣고 끝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이야깃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기사 페이지 아래에 있는 100자 의견이 그것입니다. 물론 대다수는 의견을 올리지 않고 엉뚱한 말을 올립니다. 읽을 만한 100자 의견이란 사실상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금 있는 다른 사이트의 뉴스 페이지에도 의견을 올리는 공간이 있고, 또 앞으로 생기는 수많은 뉴스페이지에도 이런 공간은 꼭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의견을 올리는 공간이 아니라 유저들이 스스로 문화를 만드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마이엠의 블로그에선 블로그폐인보다는 블로그신문폐인이란 말이 빨리 퍼뜨려지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블로그에 볼 수 없던 블로그신문이란 서비스를 선보였는데 검색ON이 오른쪽 프레임에 기사 리스트를 두고 왼쪽에 기사내용을 바로볼 수 있게 한 형태의 변형과 함께 이 블로그신문 역시 기존의 블로그 형태를 변형한 것입니다. 어쨌든 신문이라는 형태를 가져와서 어찌 보면 유일한 차별성인 마이엠 블로그의 블로그신문은 유저로 하여금 스스로 에피소드의 묶음을 만들도록 합니다. 그간의 블로그가 에피소드를 쏟아내는 것이라면 블로그신문은 쏟아낸 에피소드를 편성할 수 있도록 합니다.
폐인 만들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제목에 있던 eCI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eBI는 잘 알다시피 e 비즈니스 통합입니다. eCI는 e 컬쳐 통합입니다(Business, Culture). 문화를 통합한다는 말인데 제법 그럴싸하지만 요지는 간단합니다. 웹사이트는 단순히 비즈니스 영역만은 아닙니다. 웹사이트는 또 하나의 문화를 담는 그릇입니다. 심지어 ‘정직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쇼핑몰에서도 감성과 우연이 대세입니다. 이른바 감성마케팅은 그래서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스타벅스 감성마케팅은 하나의 스타벅스 문화를 만든 데서 기인합니다. 웹사이트도 이렇듯 비즈니스와 문화가 결합해야 합니다.
주로 성공한 기업은 상품 광고만 하지 않습니다. 브랜드를 알리는 브랜드광고도 있지만 큰 기업일수록 기업의 문화를 알립니다. ‘KTF적인 생각’이 좋은 예입니다. 사실상 'KTF적인 생각‘과 KTF의 서비스는 별로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TF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을 보면 이제 웹사이트에서도 문화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의 여러 가지 예가 이렇듯 eCI를 보여줍니다.
세스코(www.cesco.co.kr)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엽기적인 질문에 엽기적인 대답으로 유명했던 사이트입니다. 작은 기업 웹사이트에서 게시판은 계륵입니다. 있어도 별로 소용없고, 없애자니 무엇인가 허전한 존재입니다. 이 게시판으로 정말 기업의 사업분야만큼이나 엽기적인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온라인 비즈니스와 통합한다는 말은 기업하는 사람을 빼고 순수하게 유저라면 왠지 정떨어지는 말 같습니다. 비즈니스는 기업이 만든 용어입니다. 기업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이기도 합니다. eBI란 말은 비즈니스적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저와 접점을 이루는 웹사이트는 좀더 유저에게 친근해야 됩니다. 친근한 것은 서로가 같은 비즈니스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가 공통점이 있다는 말이고 이것은 하나의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테면 처음 보는 이성에게 말을 걸기 위해 “우리 전에 만나지 않았나요?”라고 하는 것처럼 어떤 공통된 문화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화를 키워나가는 것이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온라인 비즈니스와 통합하는 과정입니다. 온라인에서 물건을 팔든 팔지 않든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eCI는 오프라인의 문화를 온라인으로 옮기면서 온라인적인 문화를 덧붙이는 작업입니다.
지난 5월 10일 코스모타워에서 열린 [웹사이트 기획 컨퍼런스 2004 May]에서 한국 eBI협회 회장인 문준호 아이파트너즈 대표는 1세대 웹에이전시가 2세대 eBI로 성장했고, 이제 미래에는 3세대인 디지털자산 관리업체(Digital Asset Management)가 될 것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자산이란 무엇인가요? 컨텐츠? 커뮤니티? 유저? html파일? 디지털 자산이란 디지털 문화입니다. 다음(www.daum.net)의 컨텐츠가 조잡하거나, 뉴스가 정확하지 않거나, 다음까페 속도가 느리거나 해도 우린 당분간은 다음을 이용합니다. 다음을 이용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브랜드를 포함합니다. 크리에이티브를 포함합니다. 물론 기술도 포함합니다.
물론 저 역시 아직 eCI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폐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웹사이트의 문화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웹사이트의 문화라는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없다고 생각하니 허전합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 정말 좋은 아이템, 정말 괜찮은 매출, 정말 괜찮은 디자인... 그런데 무엇인가 허전합니다. 마치 멋진 배우, 멋진 액션, 멋진 장면이 가득한 영화에서 ‘감동’이 빠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웹사이트의 문화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