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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그래서 파멸할 수밖에 없는 젬마 이야기

2003-11-12

필자가 2000년 앙굴렘 만화페스티벌에서 만난 작품 중에서 마치 특별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한 느낌을 준 작품이 있다.
영국의 작가(묘하게도 영국은 그동안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만화 강국인 것과는 달리 주목할 만한 작가가 별로 없었다) 포지 사이몬즈의 <젬마 보베리gemma bovery> 라는 작품이다.

물론 이 작품이 전 세계 만화팬들의 대단한 주목을 받은 작품임을 뒤늦게야 알았다.

이 작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매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젬마라는 캐릭터의 매력이다.
진바지와 농구화, 예쁜 속옷을 즐겨 입는 이 아름다운 주인공은 우리들의 불안한 욕망의 화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피적인 혹은 중산계층의 감수성이 몸에 배어 있는 젬마에게서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의 욕망을 엿보게 된다.



또한 젬마의 행각을 지켜보고 또 일기를 몰래 훔쳐보면서 스토리를 전개시키고 있는 이 작품의 실질적인 화자인 '주베르'의 캐릭터 역시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다.
실패한 지식인이자 빵가게 주인 주베르의 관음적인 관심과 질투어린 시선은 독자에게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불륜에 가까운 젬마의 애정행각이 주가 되는 스토리는 그 파멸의 끝이 금방이라도 드러나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이 손에서 작품을 놓아주지 않는다.

또한 흑백 만화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풍부한 뉘앙스를 갖고 있는 명암의 톤,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선 맛, 글과 그림의 독특한 배열 방식 등 어느 것 하나 보는 이를 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젬마는 음식 잡지사의 일러스트 디자이너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 음식평론가와의 뜨거운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그로부터 버림받고 만다. 그 아픔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듯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해 결혼까지 하게 된 사람이 가구 수선 일을 하는 찰리였다.
하지만 찰리의 전 부인과 아이들은 엠마의 삶 속으로 끊임없이 틈입해오자 마침내 엠마는 찰리와 함께 도망치듯이 런던을 떠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한 작은 농가 마을에 정착한다. 젬마는 그곳에서 런던과는 전혀 다른 프랑스‘식’ 생활을 발견하고 감탄하지만 이내 권태와 혐오에 빠지게 된다. 그녀의 불안한 혹은 변덕스러운 품성 속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

예민한 독자라면 ‘젬마 보베리’라는 제목에서 뭔가 친근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이 작품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emma bovary)> 의 주인공 엠마 보바리의 현대판 여성이며, 이 작품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한 쌍을 이룬다(물론 <젬마 보베리> 를 즐기기 위해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을 반드시 읽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는 독립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플로베르의 작품을 마저 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줄 것임이 틀림없다!). 오히려 필자가 보기에는 이 작품이 동시대인인 우리들에게 훨씬 더 매혹적일뿐더러 플로베르의 작품 못지않은 걸작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만화가!

필자는 지금도 이 작품을 매우 소중하게 아끼는 목록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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