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29
시루 안 콩나물들의 마음이 이러할까?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아직은 더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 늦은 여름의 지하철은 서민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의 존재. 하지만 서민의 주머니를 열어야 하는 광고주들에게는 보물단지 같이 존재다. 어찌 보면 하루에 두 번씩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습관적으로 지나야 하는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힘없는 광고의 수해자 일 수 있다. 하지만 지하철 광고가 변하고 있다. 복도를 가득 메우던 의미 없는 광고가 사라지고 있다. 단순히 매체가 가지는 광고효과를 넘어서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이 더해진 이 광고들은 소비자와 눈을 맞추고 웃음과 활력을 더하며 광고 그 이상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조금만 둘러보면 사람 말고도 볼거리가 넘쳐 나는 서울의 지하철. 지금, 지하철 곳곳 바쁜 일상의 작은 선물 같은 광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에디터 심민영 | 사진 스튜디오 salt
1호선 경상북도 홍보열차
자연을 한아름 담은 지하철 한대가 들어온다. 문이 열리자 내부에는 참외가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푸른 잎사귀며, 노란 해바라기가 지하철을 기다리느라 지친 사람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번잡한 서울을 상징하는 지하철을 시골의 한적한 마을로 옮겨놓은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이 정겨운 열차는 여름 휴가철 대비 경북 홍보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7월 8일부터 지하철 1호선 열차에 시행한 ‘경상북도 홍보열차’이다. 지루한 이동시간 동안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경북 홍보열차의 모습은 전동차의 내• 외부에 경상북도의 관광 상품, 특산물 등을 랩핑하고, 그에 따른 조형물을 곳곳에 설치하여 열차의 각 량마다 각기 다른 군의 관광명소와, 특산물을 홍보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하철 랩핑광고는 이미 나이키나, 코카콜라 등 외국기업에서 실시한바 있으나 이처럼 지하철 내부와 외부 동일한 컨셉트로 진행한 광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4호선 명동역 바바라
언제나 많은 사람이 붐비는 거리. 쇼핑할 것도 먹고, 즐길 것도 넘치는 이곳은 다름아닌 명동이다. 하루 종일 발 품 팔며 쇼핑 했다면 손바닥 만한 자리만 있어도 엉덩이를 밀어 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 그렇게 앉은 지하철 4호선 명동역내 벤치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바바라 플렛슈즈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아무리 ‘킬힐’의 인기가 거세다지만 쇼핑에는 뭐니 뭐니 해도 편한 신발이 제격. 주인 잘못 만나 하루 종일 고생한 불쌍한 내 발 앞에 이토록 편하게 생긴 플렛슈즈라니. 어떤 여자가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 저 신발이라면 더 신나게 쇼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마 광고주도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아무튼 여러모로 여자의 눈 높이에 맞춘 광고가 아닐 수 없다. 지하철 내에는 많은 랩핑광고가 있다. 사람의 눈이 닿을 만한 곳이라면 어김없이 다양한 종류의 광고가 붙어있다. 하지만 간단한 랩핑광고에 아이디어를 더하면 그 효과는 배의 배가 된다.
5호선 광화문역~ 종로3가역
어! 어! 어! TAS광고를 처음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게 이렇다. 일명 터널광고라고 불리는 터널 동영상 광고(TAS)가 5호선 광화문역과 종로3가 터널에 설치되었다. 터널 내 구간에 발광다이오드 바(LED Bar)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해 열차의 속도에 따라 파노라마처럼 보이도록 하는 LED기술은 LED Bar에서 표출되는 개별 이미지가 지하철의 운행속도에 연동해 하나의 동영상으로 표현되는 원리다. 이로 인해 1.22km 어두운 터널 안에 숨겨진 300여 개 LED Bar를 통해 승객들은 15초 동안 대형화면의 고화질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TAS광고는 단순히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또 다른 광고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앞으로도 5호선 여의도~여의나루, 7호선 내방~고속터미널, 어린이대공원~군자 구간에도 터널 동영상 광고를 확대 운영할 계획이라고 하니 재미있고 기발한 TAS전용 광고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2, 5호선 왕십리역 ABC MART
화장실이야 신발가게야? 급한 마음에 문을 열었지만 화장실 안에 펼쳐진 의아한 광경에 많은 사람들이 넋을 놓고 만다. 왕십리역과 연계되어있는 CGV의 화장실에는 수십 종의 신발이 진열되어있다. 물론 이 신발들은 진짜 신발은 아니다. 실제 ABC MART의 진열장 모습과 똑같이 디자인되어 랩핑된 이 화장실은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면서 아이쇼핑도 즐길 수 이는 1석 2조의 공간으로 전혀 연관성 없는 공간에서 색다른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이 화장실은 다양한 종류의 광고가 시도되는 장소로 이미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진행된 바 있다. 코카콜라의 ‘조지아 커피’는 일본이 유명한 스키장 화장실에 스키장을 그대로 옮겨놓아 변기에 앉음과 동시에 스키 점프대에 올라선듯한 짜릿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국내에서 홈플러스는 잠실역 기둥에 마트의 진열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듯한 실사광고를 부착했으며, 용산 CGV에는 냉장고 안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의 광고가 진행 중이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 하나은행
아침 지하철의 폭풍 같은 시간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 흔적을 남긴다. 아침 잠 쫓아가며 신경 쓴 머리는 헝클어지고, 정성껏 다려 입은 셔츠 여기저기도 구깃구깃해진다. 이럴 땐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절실하다. 하지만 하나은행의 광고물은 거울의 역할을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벽을 자세히 살펴보자면, 여자친구의 손을 이끌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 혹시나 계단에서 넘어질까 아이를 번쩍 치켜든 엄마, 동료에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 모두들 우리가 지하철을 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을 담아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비춰지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얼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동시에 우리는 여자친구를 이끄는 남자친구가 되고,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가, 누군가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동료가 된다. 거기에 광고의 카피처럼 거울에 비춰진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나니 투덜거리면서도 오늘도 열심히 출근하고 있는 내 자신이 괜스레 기특해 보인다.
2호선 합정역 삼성전자
지하철 인명사고가 끊이지 않자 서울시에서는 지하철 전 역사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기로 하고 추진사업을 금년까지 완료하기 위해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승객의 안전을 보호하고 지하철 환경을 개선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스크린 도어지만 이로 인해 즐거운 지명을 지르는 것은 지하철 이용객뿐만은 아닌 것 같다. 지하철에 스크린 도어가 도입되자 많은 광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데 이미 스크린 도어가 설치된 역사에는 빈 곳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광고들이 부착되어있다. 그 중에도 합정역에 설치된 삼성전자 광고의 경우 열고 닫히는 스크린도어의 특성을 살려 뜬금없는 질문 하나를 건넨다.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법한 화두의 질문을 던져 승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광고라도 매체의 특성과 그에 따른 광고 효과의 이해에 따라서 광고의 성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다
9호선 노량진역 현대카드
모두가 ‘YES’라도 대답할 때 ‘NO’라도 대답하는 사람. 현대카드• 현대캐피탈의 광고가 그러하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조금 더 화려하게’, ‘조금 더 눈에 띄게’를 외치는 디자인을 무시하고 역으로 발상하게 하는 광고를 선보인 것이다. 벽면의 모든 광고판을 비우고, 광고판 구석에 작은 이미지와 기업 CI만을 새긴 이 광고는 ‘비움의 미학 광고 프로젝트’라 이름 지어져 국회의사당역, 여의도역, 노량진역, 샛강역에서 동일한 콘셉트로 진행되고 있다. 이 독특한 광고는 각종 시각적 자극에 노출된 현대인들에게 지나친 광고 역시 일종의 공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 시각적 이미지를 극단적으로 제거하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현대카드의 경우 매 영상• 인쇄 광고마다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광고를 선보이고 있는데 유명모델을 쓰지 않고 강아지 탈을 뒤집어 쓰고 나와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다 던지, 이번처럼 광고판 전면을 비우는 광고 등. 하지만 이 광고들은 모두 눈에 띄는 광고를 만들려는 욕심이 아닌, 광고 목표에 따른 전략적인 사고와 이에 맞는 크리에이트브를 거침없이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 디자인의 산물일 것이다.
2호선 삼성역 SONY DSLR
지하철 2호선에서 코엑스로 들어서자마자 어마어마한 랩핑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바바라의 플렛슈즈가 작은 규모이지만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 크리에이티브로 관심을 끌었다면 소니 DSLR의 랩핑광고는 거대한 스케일로 소비자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과거의 소니가 품질과, 소니라는 브랜드의 로고, 아이덴티티를 활용했다면 지금은 소니는 체험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를 어필하고 있다. 이렇듯 광고에는 좋은 디자인과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브랜드와 제품의 인지도에 상응하는 광고의 형태, 방법, 규모 또한 중요하다. 소니의 경우 세계에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브랜드 인지도, 나아가 고객 충성도가 두터운 글로벌 브랜드 중 하나이다. 때문에 이번 코엑스 랩핑광고는 소니라는 브랜드에 걸맞은 광고 규모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 광고가 소비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광고는 시각의 횡포이며 폭력일 뿐이다. 하지만 소지섭이지 않은가. 분명 보기만 해도 훈훈한 모델의 덕을 톡톡히 봤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