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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패션은 섹스, 광고는 포르노그라피

2006-10-04


캘빈 클라인은 광고를 이용해 대중을 사로잡는 방법을 일찍 깨달은 선각자였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광고에 반응을 하고 그 반응이 매출로 연결되는 지에 대한 과정을 그 누구보다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그의 이런 노하우와 자신감은 드디어 세계적인 톱스타로 막 떠오르고 있는 브록 쉴즈와의 만남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1980년에 집행된 브록 쉴즈의 광고는 당시 사회의 폐쇄성을 생각한다면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15살의 쉴즈가 모델로 기용된 이 광고는 논쟁의 회오리와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나와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 이 광고가 나가자 여론은 분노에 가까운 성토를 해왔고 여성단체들과 교육가들에게 심한 저항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 반응과는 정반대로 광고가 나간 그 다음 주 4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했고 한 달만에 무려 200만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이변을 낳았다. 광고에 대한 질타가 심하고 논쟁에 휘말릴수록 핵심 타깃들인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언론의 질타는 반대로 캘빈 클라인의 광고를 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캘빈 클라인의 꿈과 도전
캘빈 클라인은 1942년 11월 뉴욕의 가난한 동네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캘빈은 헝가리에서 이민온 레오 클라인과 오스트리아 이민자의 딸 플로라 스턴의 세명의 자녀 중 둘째였다. 캘빈의 외할머니는 그 즈음에 알아주는 재봉사였는데, 어린 클라인은 할머니의 양복점에 자주 놀러 가면서 장래의 직업에 대한 꿈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캘빈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부모는 그를 대학에 들여 보내려 했지만 그는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기 위해 패션전문학교(FIT)로 방향을 바꿨다.


휴학과 아르바이트 등을 번갈아 하면서 드디어 그는 1963년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을 하자마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디자이너로서 자질을 키워 가는데 그러던 중 1968년에 아버지로부터 1만 달러를 빌려서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에 뛰어들었다. 공부하는 과정이나 디자이너로써 출발이 만만치 않은거에 비교해 그에게 성공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 왔다. 그는 금전적으로도 성공했지만 73년에 최연소 나이에 미국 패션 비평가들이 수여하는 코티상을 받았고, 83년과 86년에는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 여성복 분야의 상을 수상했고, 93년에는 여성복과 남성복 동시에 상을 받는 최초의 디자이너에 등극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나와 캘빈 클라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는 광고를 이용해 대중을 사로잡는 방법을 일찍 깨달은 선각자였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광고에 반응을 하고 그 반응이 매출로 연결되는 지에 대한 과정을 그 누구보다도 훤히 꿰고 있었다. 그의 이런 노하우와 자신감은 드디어 세계적인 톱스타로 막 떠오르고 있는 브록 쉴즈와의 만남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1980년에 집행된 15살의 브록 쉴즈의 광고는 당시 사회의 폐쇄성을 생각한다면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진 시장이 경쟁이 치열해지자 캘빈은 TV광고를 집행해서 경쟁사들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했다. 15살의 쉴즈가 모델로 기용된 이 광고는 논쟁의 회오리와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독서가 영혼과 맞닿아 있다면 캘빈 진은 내 몸과 맞닿아 있죠. 내 옷장엔 캘빈 진이 일곱 벌이나 있어요, 만약 그들이 말을 할 줄 안다면 난 타락하고 말거예요, 돈이 생기면 캘빈을 사요. 그 나머지 돈으로는 집세를 낸답니다” 그리고 문제의 카피가 이어진다. “나와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What comes between me and my Calvins? Nothing)
이 광고가 나가자 여론은 분노에 가까운 성토를 해왔고 여성단체들과 교육가들에게 심한 저항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사회 반응과는 정반대로 광고가 나간 그 다음 주 40만장의 판매고를 달성했고 한 달만에 무려 200만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이변을 낳았다. 광고에 대한 질타가 심하고 논쟁에 휘말릴수록 핵심 타깃들인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언론의 질타는 반대로 캘빈클라인의 광고를 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광고가 브랜드 성공 이끌어
오늘의 캘빈 클라인 성공을 만든 것은 바로 광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제품의 퀄리티가 좋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브랜딩 차원에서 보면 철저하게 섹스 어필한 광고 기법들이 미국은 물론 세계 시장에 있어서 패션 아이콘이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1995년 새로운 청바지를 런칭할 때도 어린 남녀 모델들을 원색적인 포즈로 광고를 전개 했는 데 이때도 어린이 포르노라는 모욕적인 야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반응은 정반대였다. 청바지는 날개 돋힌 듯이 팔려 나갔기 때문이다. 진 시장에서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캘빈은 1982년부터 언더웨어 시장에 뛰어들었는데 경쟁사보다 가격이 높았음에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도 올림픽 장대높이 선수였던 Tom Hintinaus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람한 근육과 섹시함을 한껏 발휘한 광고를 선보였는데 버스 쉘터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은 붙여 놓기만 하면 사람들이 훔쳐가는 이색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향수 브랜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5년에 출시된 Obsession은 아마도 캘빈 클라인 광고 역사상 가장 외설적인 시비에 휩싸인 작품을 선보여 또 한번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누가 보아도 성행위를 연상할 수 있는 그림이거나 전라의 모델들이 엉겨져 있는 모습들은 일대 충격이었고 사건이었다. 특히 아직 소녀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케이트 모스를 전라의 모습으로 연출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섹스어필 광고로 패션 아이콘 만들어
이처럼 캘빈 클라인의 성공 뒤에는 계산된 포르노그라피 기법의 광고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캘빈이 시도한 이 일련의 광고들은 과연 단순히 시선을 잡기 위한 헤프닝인가 아니면 기억의 장치는 물론 제품의 구매까지 가는 힘을 가지고 있었을까?
1989년에는 미국인 2만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장 좋게 기억되는 인쇄광고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으며, 이후 4년 연속 기억률 1위 광고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미 말했지만 캘빈 클라인은 이렇게 과감하고 도발적인 광고 기법을 통해 전 세계 소비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패션 아이콘을 만들었던 것이다.

섹스어필 광고가 과연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은 광고계에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캘빈 클라인은 고도의 심리전과 계산된 방법으로 브랜드 네임 고지는 물론 소비자의 기억속에 잊혀지지 않는 기호를 만들었다. 이런 전략으로 캘빈 클라인은 광고계에 있어서 그들만이 할 수 있는 광고 문법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글/ 김원규 대표(communications Of 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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