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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광고컨셉에 '당의정' 씌우기

2005-06-14

그냥 입에 넣기에는 너무 쓰니까 단 것으로 겉을 싼 알약을 ‘당의정’이라 하지요. ‘설탕 옷을 입은 알약’쯤 되겠군요. ‘약 모르고 오용 말고, 약 좋다고 남용 말자’ 라는 슬로건도 있었지만, 광고를 만들 때는 이를 남용해도 좋을 듯 합니다. 계몽과 설교는 어린 아이들도 싫어하니까요.

연극으로 말하면 광고는 ‘목적극’ 입니다. 연극은 왜 하느냐고 묻지 않지만, 광고는 왜? 하는지 꼭 묻거든요. 반드시 목적을 갖고 말을 건네므로 종교극처럼 이야기가 딱딱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컨셉이 너무 딱딱하거나, 모호하거나, 뻔한 이야기일 때 설탕 옷 입혀 잘 돌려 쓴 한 줄의 카피가 커다란 힘을 발휘합니다.

월드컵 경기가 한창일 때 우리 선수를 응원 나온 한 여학생이 관중석에서 들고 있던 피켓의 글귀가 생각납니다. “남일아, 네 아이는 내가 낳는다!” 정말 하자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혼하고 싶다는 딱딱한 컨셉에 설탕을 입혀 멋지게 돌려썼더군요. 카피라고는 써 본 적이 없을 중학생이지만 주제 의식이 워낙 강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선수들의 기술을 쓴 셈입니다.

가끔 ‘같이 살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덤벼서 성공에 이르기도 합니다. 돌려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고객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결혼하자는 말을 건네는 일은 목적이 세게 드러나는 일이므로 아무래도 달콤한 당의정을 씌워서 접근해야 성공 확률이 높아집니다.

틸러묵(Tillamook) 치즈
오전에 알고 있던 것이 오후에는 더 이상 정보가 아닐 정도로 세상은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말하다가 가끔씩 ‘변화’라는 말을 잊지 않고 되뇌어야 유능한 자로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입맛은 다릅니다. 담글 줄은 몰라도 김치는 2005년에도 우리의 필수 반찬이고, 눈으로 구분을 할 수 없어 젖소 고기를 비싸게 사먹기도 하지만 한우 역시 한국인의 스테디셀러입니다.

이 두 편의 광고에서는 바로 그런 100년 전통의 치즈 맛을 이야기합니다. 넉넉한 표정의 아저씨 사진을 배경으로 카피가 크게 얹혀져 있습니다.

“저희는 100년 전 방식 그대로 치즈를 만듭니다. 요즘에는 장갑을 끼고 만드는 것만 다르지요.” 카피는 직설적이지만, 장갑 이야기로 슬쩍 당의정을 씌웠습니다. 자꾸 변해야 창조적으로 인정받는 풍토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광고에서는 반어법을 써서 조금 더 재미를 주었습니다. 카피는 “한 입 물 때마다 정말 창조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저희 (치즈)의 맛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슬로건은 “100년간 한 가지 비법”이라고 되어 있네요. 내년에는 101년이라고 고쳐야겠군요.

허쉬즈(Hershey’s) 밀크 초콜릿
세월이 흘러 머리가 벗겨진 모습을 시차를 두고 보여주고서 그야말로 옛날 느낌의 서체로 ‘변화는 나쁜 것’이라는 카피를 얹었습니다. 물론 너무 직설적이니까 “1899년 이래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밀크 초콜릿”이라는 카피로 마무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요.

이어지는 광고에서는 커다란 칠면조 요리를 앞에 놓고 저녁 식사를 하려다가 휴대전화로 각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격세지감. 아무리 가족 간이지만 식사 예절이 필요한데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변화지요.
그래서 ‘변화는 나쁜 것’이라는 카피가 다시 한 번 힘을 받습니다. 광고의 카피와 레이아웃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역시 변화는 나쁜 것이니까. 또 초콜릿을 강하게 연상시키기 위해 아트 디렉터는 초콜릿의 색깔을 바탕색으로 쓰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스크래블(Scrabble) 게임
광고에서 보시다시피 스크래블 게임은 알파벳이 한 글자씩 적힌 타일 조각들을 이용해 단어를 만드는 놀이입니다. 타일 조각을 이어서 만든 카피는 “매독을 얻고도 좋아하는 유일한 순간-스크래블” 다음 광고의 카피는 “사형선고를 받지 않고 헤로인을 한다 - 스크래블”
어차피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니까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즐거움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타일 조각들을 쓰지 않고 그냥 카피로만 레이아웃을 했다면 얼마나 썰렁했을까요? 배경색도 타일과 같은 색을 써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아이디어를 보니 영화에 자주 나오는 범인들의 행동이 생각났습니다. 자기 글씨체를 증거로 남기지 않으려고 전화번호부와 광고 전단지 같은 데서 글자를 하나씩 오려내 경고장을 만드는 친구들 말입니다.
아마 그런 친구들은 어릴 때 이 게임을 대단히 잘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저도 한 번 사서 해봐야겠다는 충동이 생겼습니다. 영어 기반의 게임이라 우리나라에는 들어오지 않은 줄 알았더니 보드 게임 방에 이미 들어와 있군요. 비영어권에 사는 제 마음을 움직였다면 광고목표를 달성한 것 아닌가요?

케이프 토크(Cape Talk) 방송국
앗, 매체 사고인가요? 잡지의 한 페이지가 다 비어 있고, 노란 포스트 잇 한 장이 붙어 있군요.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과 드립니다. 케이프 토크 방송에서 내일 10시 45분에 방송 예정인 <모든 것을 밝힌다> 의 데이비드 카퍼필드 인터뷰가 아쉽게도 잡지에 게재되기 직전에 사라져버렸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오길비 케이프타운에서 머리 참 잘 썼지요? 자기네 방송에 세기의 마술사 카퍼필드가 나온다는 이야기의 예고편인데 재치 있게 만들어 주목도를 높였습니다.
카퍼필드가 잘 하는 마술이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자기 인터뷰에도 마술을 써서 기사를 날려버리다니… 정말 그랬나?





보더스(Borders) 서점
이게 광고 맞나? 맞습니다. 보더스는 원래 미국 2위의 서점 체인인데, 이 광고는 싱가포르에 있는 보더스 서점에서 집행한 프로모션 광고입니다.

소설책처럼 보여서 광고인지 아닌지 의아해 하다가, 마치 각주처럼 맨 아래 살짝 자리 잡고 있는 카피를 보는 순간 광고임을 알게 됩니다.
깨알같이 작게 쓰인 카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페이지에는 여러 작가들의 책, 시, 인용문에 나오는 28개의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일 수도 있고, 유명한 구절이나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그냥 힌트입니다! 보더스 책방은 오처드와 스카스 사이에 있으며, 아침 9시에 문을 엽니다.
다음 주 목요일, 위의 작가들 명단을 제출하신 고객들 중 선착순 10분에 한해 맞추신 답만큼 공짜로 책을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3명의 작가 이름을 맞추시면 책 3권을 공짜로 받으시는 겁니다. 한 분당 최대 25권까지 받으실 수 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어느 책에서 나온 구절인지 몰라서 부끄럽게 만들다가 책을 공짜로 준다고 하여 서점에 오게 하는 고도의 기술입니다. 광고주가 누구인지 힌트가 하나 있긴 하네요. 페이지의 윗부분을 보면 마치 책 제목처럼 적혀 있는 곳에 보더스가 숨어 있군요.
여러 명문들을 수집해 짜깁기한 카피라이터와 아트 디렉터의 실력도 대단하지만, 광고 제작 이전에 아이디어 자체가 참신하지요? 저희 회사에서 제일 높은 닐 프렌치(Neil French) 라는 분이 직접 만들었습니다.
오길비 앤 매더 뿐 아니라 WPP 그룹 내 모든 광고 회사를 관장하는 월드와이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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