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 서울 | 2015-06-04
지난해 여름 윤디자인연구소 갤러리에서 열린 '101 스위스 모던 포스터 콜렉션 & 장 베누아 레비 개인전'을 통해 <드리머스(Dreamers)>라는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헤이데이 디자인 스튜디오(Heyday Design Studio)라는 소규모 스튜디오의 작업이었다. 인상이 강렬했다. 당시 작품 설명에는 '특이한 타이포그래피와 개념적인 사진 이미지의 초현실주의적 조화'라고 적혀 있기도 했다. 정통적인 스위스 모더니즘이라기보다는 볼프강 바인가르트 스타일의 포스트 모더니즘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감상과 함께, 헤이데이라는 곳은 파격의 스튜디오일지도 모르겠다고 넘겨짚어보기도 했다.
스위스의 젊은 그래픽디자이너 네 명이 수도 베른(Berne)에 아지트를 마련한 건 2009년. 남자 둘 여자 둘, 사이 좋은 넷은 헤이데이 디자인 스튜디오(홈페이지)라는 작업 공간을 열었다. 스튜디오지기로서, 디자이너로서 팀워크를 맞춘 지 어느덧 6년째다. 꽤 야심가들일 줄 알았는데, 이들이 이메일로 보낸 인터뷰 답변은 한결같이 소박했다. 네 명이 정의하는 헤이데이(전성기, 한창때)란 어쩌면 '헤이, 데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매일매일의 나날들에 인사를 건네는 성실한 디자이너들이랄까.(안녕, 오늘! Hey, day!) 클라이언트의 미소가 최고의 보상이라고 말하는 꽤나 순수한(혹은 순박한) 스위스 젊은이들. 인생을 사랑하고 사람이 좋다는 착한(혹은 착실한) 디자이너들. 그런 성실함과 순수성과 착한 성정이라면 기본이든 파격이든 무엇이든 능히 해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은근한 호감이 어느새 생겼다. 네 명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어떤 꿈과 철학을 가지고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을까.
기사제공 ㅣ 타이포그래피 서울 (글·번역: 임재훈)
헤이데이 디자인 스튜디오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저희 스튜디오는 비주얼 콘셉트 및 커뮤니케이션을 전문으로 활동하는 소규모 에이전시입니다. 스위스의 작지만 밝게 빛나는 수도 베른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09년에 설립되었습니다. 필립 루디(Philipp Luthi), 안드레아 노티(Andrea Noti), 샘 다이버스(Sam Divers), 아리안 포스터(Ariane Forster) 등 네 명의 그래픽디자이너가 함께 일하고 있지요. 그래픽 디자인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방면에 걸친 다채로운 작업들을 진행하기 위해 사진가와 건축가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전방위적으로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는 것이 저희 스튜디오의 특징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디자이너가 되도록 이끌었나요?
필립 루디: 솔직히 말해서, 저는 디자이너가 될 생각은 없었거든요. 순전히 우연이었죠. 어쩌면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고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 더 이상은 교육 과정을 밟고 싶지 않았어요.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결단이었죠.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나 자신만의 철학을 깨닫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디자이너가 되기로 한 거예요. 굳이 디자이너 말고도 조경사(a landscape architect)나 작가 같은 다른 크리에이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디자이너가 된 건 우연인 것 같아요.
안드레아 노티: 그런 느낌 아세요? 뭔가에 집중할 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되고, 지금 이 순간과 무관한 일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느낌 말이에요. 제 경우에는 뭔가를 창작할 때, 드로잉 작업을 할 때 자주 그렇거든요. 특히, 각자 원하는 것이 전혀 다른 다양한 고객들, 그리고 그들이 제게 던져주는 토픽들은 고맙기까지 하다니까요.
샘 다이버스: 다른 업종에 비해 특정한 경계나 틀을 벗어난 상태로도 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
아리안 포스터: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기 전에 여러 분야에서 일했었어요. 그렇게 경험이 축적되다 보니 자연스레 저만의 전문성이라는 것이 갖춰졌고, 마침내 이것저것에 관심 많은 제 성향과 열정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찾은 거죠. 지속적으로 새로운 콘텐츠와 형태를 다룰 수 있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볼 수도 있다는 점이 저를 디자이너가 되도록 만들었어요.
최근에는 어떤 작업을 했나요?
최근에 작업한 많은 아트워크들에는 유머나 스토리텔링이 포함돼 있어요. 이런 요소들은 저희 작업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맥락 같은 것이죠. 하지만 모든 작업들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저마다 차별성을 가져요. 저희는 항상 '새로운 창작 기법'에 관해 실험하고 탐구하는데, 그 결과물이 작업에 녹아 들어서 어떤 차이, 즉 '개성'을 획득하는 거죠. 디자이너 각자가 도출해낸 독자적인 표현 방식이 시각 언어의 형태로 작업에 스며드는 거예요.
헤이데이 스튜디오만의 디자인 프로세스가 있나요?
모든 디자인 작업은 퍼스널 미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디어나 제반 요소가 일단 문서로 정리되기만 하면 그 즉시 디자인을 시작해요.
평상시에는 어떻게 지내나요?
필립 루디: 산, 숲, 강으로 떠나 스포츠 활동 즐기기
안드레아 노티: 현대무용과 드로잉
아리안 포스터: 작고 노란 공 쫓아다니기(테니스), 숲 속 한가운데로 달리기(조깅), 다른 나라 탐험하기(여행), 소음에 귀 기울이기(콘서트 관람)
샘 다이버스: 유모차 밀기(아이들과 놀아주기), 겨울 스포츠와 조깅, 그리고 독서
디자이너로서 '헤이데이(heyday, 성공)'를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클라이언트, 또는 일반인이 저희 작업을 보고 감동받았을 때라고 말하고 싶네요. 클라이언트가 미소 짓는 모습을 보는 건 최고의 보상이자 영광입니다.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필립 루디: 클라이언트와의 소통, 우리끼리의 인터랙션을 통해 아이디어를 확장해나갑니다. 그리고, 헤이데이 디자인 스튜디오의 모두는 일상의 아주 소소한 디테일에 늘 눈과 귀를 열어두죠. 일상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영감을 얻는 데 아주 가치 있는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샘 다이버스: 이런저런 잡동사니들로부터 영감을 얻는 편이에요. 스위스는 아주 청결한 도시라서 잡동사니들을 찾으려면 아주 열심히 돌아다녀야 해요. :-)
헤이데이 디자인 스튜디오의 작업들을 보니 상당히 섬세하더군요. 특히 타이포그래피가 인상적이었어요.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특별히 고려하는 요소가 있나요?
전통을 알고, 규칙을 익히고, 그리고 언제나 그것들을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것. 대다수 사람들은 책 읽는 법은 알지만 그림을 읽는 법은 잊어버린 것 같아요. 이런 맥락이 저희 작업과 연계되면 새로운 실험의 장을 열어준답니다.
작업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대부분의 작업이 클라이언트들의 개별적 요구사항에 따라 진행돼요. 일종의 맞춤형 프로세스죠. 클라이언트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을 텐데, 저희는 그 메시지를 대중이 '경험하고 싶은' 성질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데 공을 들여요. 그러려면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아주 중요하죠. 뭔가를 경험하고 싶어진다는 것은, 말하자면 감성적인 도화선이에요. 거기 한번 불이 붙으면, 곧바로 '엔터테이닝'으로 이어지는 거죠.
어떤 대상을 보고 “우와, 이건 진짜 끝내주는 디자인이잖아!” 하고 소리쳤다고 칩시다. 이때 '끝내주는 디자인'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시나요?
좋은 질문이에요. 저희에게 '끝내주는 디자인'이란 이런 거죠. 일단 저희를 놀라게 하고, 그 다음엔 '왜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낸 게 우리가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웃음)
잘 알다시피 클라이언트잡이라는 게 전적으로 '크리에이티비티'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보다는 오히려 클라이언트와의 소통이 더 큰 영역을 차지할 때가 많죠.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양쪽이 모두 만족할 만한 답을 도출해내는 나름의 방식이 있나요?
저희 스튜디오의 작업 대부분이 클라이언트잡이에요. 음, 확실히 클라이언트잡은 디자이너의 '자기 만족도' 측면에서는 다소 한계가 있죠. 하지만 어떤 솔루션을 찾아가는 과정에 들이는 '크리에이티비티'의 총량은 클라이언트잡이나 개인 작업이나 똑같다고 봐요. 순수한 디자인보다는 아이디어 그 자체, 또는 스토리 그 자체를 어필할 때 클라이언트를 쉽게 설득시킬 수 있는 것 같아요. 음, 만약 클라이언트가 저희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 좀 더 특이한 디자인에 대해서도 기꺼이 용납해줄 수 있으려나요?
헤이데이 디자인 스튜디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디자이너부터 필름메이커, 포토그래퍼, 프로그래머, 그리고 건축가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더군요. 달리 말하면 '다양한 이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그런 서로 다른 목소리를 어떻게 조율해서 팀워크를 만드나요?
정확하게는 저희 스튜디오 팀원들은 모두 그래픽디자이너입니다. 함께 작업하는 전문가들은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한 팀은 아니에요. 각자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저희와 함께 작업하는 방식이죠. 전문 분야도 다르고 저마다 스튜디오의 색채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요. 이 점이 늘 영감을 주더군요.
창작자로서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모험적인 일이 있나요?
어떤 기업에서 저희에게 농부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맡긴다면 정말 좋겠네요.
일과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갖고 있나요?
가장 흥미로운 인터랙션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더군요. 문서나 화면에서가 아니라요. 디자인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이죠. 그래서 저희는 삶 자체를 사랑하고, 친구들과 가족을 소중히 생각하고 싶어요. 그게 일과 인생에 모두 적용되는 목표죠.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학생들이 많잖아요. 딱 한마디 조언을 해준다면?
호기심을 갖고 무엇이든 유심히 관찰하는 태도를 가져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