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15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행복하고 따뜻한 그곳에서 튀어나온 그들은 뭘 해도 즐거워 보이는걸. 뚱뚱해도 못생겨도 이상하리만치 사랑스러운 사람들. 일러스트레이터&디자이너 아방(홈페이지)의 그림 속 이야기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르면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순식간에 그려내는 능력이 있다며 아이처럼 웃는 사람. 그녀에게서 더 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기사 제공│타이포그래피 서울
ABANG의 뜻
원래 진짜 안 알려드리는데….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에요. '어벙하다'란 뜻이죠.(웃음) 저랑도 잘 어울리고 입에도 착착 붙어서 정말 마음에 들어요. 친구 어머님들도 이 별명으로 불러주시고요, 별명 좋다고 주변에서 부러움도 사고 있어요.(웃음) 제 본명은 신혜원이고요.
내가 소개하는 나
잘 어울리는 사람. 성격상 낯가림도 없고 누구와 있어도 잘 어울린다는 뜻도 있지만, 제 그림도 이런 상황 저런 상황에 맞춰 잘 어울리기를 바라요.
지금까지의 활동
그림 그려서 전시하고, 단행본이나 잡지에 그림도 그리고, 아니면 공연하는 사람들과 공연 전시도 꾸미고, 혼자서 소규모 출판도 하고. 그리고 마이리얼아방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하고 아이폰 케이스, 캘린더 등을 만들었어요.
가장 첫 번째 작업과 기억에 남는 일
첫 번째 작업은 캐리어 커버 디자인. 지금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고 있는 건데, 제 그림이 패턴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일은…. '가면파티'라는 그림책이에요. 어느 날 문득 '가면파티'라는 타이틀이 떠오르더니 스토리와 이미지가 막 떠오르는 거예요. 이틀 만에 책 절반 분량의 그림 스케치를 모두 끝냈어요. 사실 그림 한 장 그리기 어려운 시간인데 그땐 참 이상했죠. 원래 제 그림이 모두 밝은데 그 책은 엄청나게 우울한 내용이었거든요. 그 상황에 빠져서 연기하듯이 몰입해 그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틀이 지난 거죠. 그런데 그 이후로 더는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서 아직도 못 끝내고 있어요. 언젠가 또 그분(?)이 오시길 바라고 있어요.(웃음)
요즘 최고의 관심사
지난 2월 16일 전시를 끝내고 일을 잠시 놓고 있었어요. 아방이라는 브랜드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돼가는데,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계획 없이 하고 있었거든요. 콘셉트와 아이덴티티 없이 무작정 했던 일들에 대해 정리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습득하고 공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올여름쯤 베를린으로 여행을 갈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베를린은 유럽의 출판, 그래픽, 사진, 음악 등 다양한 문화의 중심지래요. 보이는 게 다 공부인 셈이죠. 3년 동안 가고 싶어서 생각만 하다가 드디어 비행기 티켓을 끊었어요.
이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
낙서나 드로잉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해왔어요. 그때부터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야, 나는 화가가 될 거야'라고 했는데, 현실에 부딪히다 보니 저도 어느새 회사에 들어가 3년을 일하게 된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 더는 회사에서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거예요. 1년을 고민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일을 선택할 때의 기준
제 그림이 어울릴 수 있는 데라면 특별히 한정을 두지는 않아요. 내가 재미있고 내 스타일에 맞으면 그만이죠.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
작년에 처음으로 전시했는데요, 여행 가방을 주제로 6명의 작가가 그룹전을 한 것이죠. 그때 전시를 본, 신사동 핸드백 박물관 큐레이터가 한 번 더 전시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지금 전시를 하고 있는데요, 당시 그렸던 그림이 너무 창피해서 다시 그렸어요. 그땐 마냥 신나서 그렸던 거죠.(웃음) 지난 3월 12일부터 6월 2일까지 전시할 예정이에요. 신사동에 오시면 한번 들러주세요.(웃음)
드로잉 수업
회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월급이 끊기니까 불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요새 정말 재미있어요. 30명 정도의 수강생이 있는데 1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나이도 직업도 정말 다양하죠. 수업은 라인 드로잉이고 인물 위주로 그려요. 가끔 회식도 하고 조금 따뜻해지면 모두 모여 한강에 나갈 계획도 있어요.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그림을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정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재미있게 잘할 수 있도록요.
'토마토브루스케타' 책 이야기
텀블벅이라는 소셜펀딩 사이트에서 후원 받아서 만든 작은 그림책이에요. 100부가 채 안 되게 소량 출판했는데요, 거의 다 나가고 선물용으로 몇 개 남았네요. 이 책은 원룸으로 이사 와서 느낀 외로움 때문에 생각하게 된 이야기에요. 집들이를 계획하고 집들이에 초대할 사람들을 한 명씩 소개한 거죠. 인터뷰하거나 대화 도중 흥미롭게 들었거나 공감했던 말들로 구성됐어요. 집들이 때문에 토마토브루스케타라는 음식을 처음 만들어 보는 것처럼 저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들이 많잖아요. 그런 거랑 같다고 생각한 거죠. 결국에는 원룸에서 아주 시끌벅적하게 집들이하는 걸로 끝이 나요.
작업 프로세스, 스타일
생각나면 바로바로 스케치하는 것. 그런데 저에게 디자인이랑 그림은 프로세스가 매우 달라요. 디자인은 콘셉트 잡고 서치하고 방향성 잡고. 많은 과정이 있잖아요. 그 과정을 학교와 회사에서 배웠으니 접근 방법에 스스로 부담을 갖게 돼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대신에 그림은 안 배웠거든요.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할 수 있어요. 어떤 재료가 어떤 느낌을 내는지조차 모르니까 막 쓰는 거죠. 그런 점에서 솔직히 전 그림이 더 좋아요. 하지만 디자인을 배웠던 것이 분명 도움이 돼요. 그림에도 레이아웃이 있으면 예쁘니까요.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기분이요. 제 작업은 기분이 좌우하고 기분이 들어간 그림에서 그 기분이 나오죠.
작업할 때 사용하는 도구, 작업 버릇
각종 필기도구와 종이, 컴퓨터, 채색 도구. 그리고 작업할 때 음악을 엄청나게 크게 틀어요. 어떤 때는 서서 춤추며 그릴 때도 있고, 기분이 정말 좋으면 소리도 지르고요. 도구들 막 펼쳐 놓고 노래 따라 부르고 왔다 갔다 하면서 그리다가 마무리를 해야 할 때는 음악을 끄죠. 한마디로 많이 설쳐요.(웃음)
영감을 받는 아티스트 또는 작업들
대학생 때 바스키아 등 여러 아티스트에 빠졌었어요. 그리고 위인들의 전기를 주로 읽었죠. 화가나 건축가 등의 전기를 읽으면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의 내용이 나오고, 또 그 사람을 찾아서 보면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렇게 엮여있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지금은 엘로퀸스(Eloquence)라는 잡지를 즐겨보는데요, 예술, 조명, 건축, 음악 등의 분야에 속한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담아놓은 책이에요.
아방이 추구하는 그림(디자인) 스타일
일단 제 그림엔 사람이 들어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상황과 표정 등이 재미있어요. 제가 그린 사람들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비대칭이고 얼굴도 일그러져 있지만 기괴해 보이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만약 한쪽 팔이 길어도 따뜻해 보인다거나 유쾌해 보이도록 표현되는 게 좋은 거예요. 생각해보면 다들 너무 똑같잖아요. 사회에서도 뭐든 비슷비슷해야 안심하고. 하지만 이렇게 못생겨도 괜찮아, 머리가 한쪽 귀가 한쪽 없어도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우린 즐거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싶어요. 사실 제 그림엔 무표정한 그림도 많은데 색을 따뜻하게 쓰니까 따뜻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최종 목표
브랜드 자체가 어떤 의미로 굳어져 단어가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신혜원이라는 제 이름이나 아방, 마이리얼아방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유쾌하다, 위트 있다, 낭만적이다'예요. 이게 제 그림의 포인트거든요. 제 브랜드나 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만약 어떤 방식으로라도 제 브랜드를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걸 가진 사람의 하루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런 거예요.
글자로 표현하는 아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