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09
현대도시 뺨칠 만큼 계획적으로 조성된 고대 도시들이 있습니다. 특히 화산폭발로 매몰되어 있었던 이탈리아 남부의 폼페이는 고대의 도시가 얼마만큼 계획적인 도시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고유한 특성을 가진 9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술집 같은 위락 시설을 비롯해 목욕탕, 시장, 극장, 경기장 등의 공공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자갈로 포장된 도로와 상하수도가 정비 되어 있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볼 때는 상상을 초월하는 리조트 도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모습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시가 보여주는 것은 빌딩, 자동차, 사람은 물론이고 가로수, 간판, 상점, 인도, 차도, 건널목, 지하철, 신호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시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정작 우리가 보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건축가는 건물을 유심히 살펴볼 테고 패션 디자이너에겐 거리의 옷이 자연스런 관심사가 되겠죠. 굳이 직업적인 특성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가야 할 도로’, ‘내가 갈 건물’, ‘내가 탈 버스’, ‘내가 좋아하는 얼굴형’,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만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 도시 거주자는 해방 당시 10%에서 이제는 90%를 웃돌고 있다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에 거주한다고 하더라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복잡하고 좁은 도시라고 불평을 하지만 시끄럽고 지저분한 도시라고 싫어하지만 이미 우리의 삶에서 도시를 떼어내고 생각하기엔 늦어버린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도시를 불평하지만, 몸은 도시에 길들여져 있으니까요. 건축가 김진애 씨는 말합니다. 도시를 즐겨라. 도시의 익명성과 자유를 즐겨라. 도시의 무질서를 견딜 줄 알고, 도시의 무질서 속에서 자신의 질서를 찾아 즐겨야 한다고.
무질서한 도시일지라도 이것저것 챙기고 살피다 보면 재미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시간과 세월이 배어 있는 도시의 일상 속에는 다른 어떤 도시와는 다른 독특함이 있습니다. 푸르른 산과 강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높고 웅장한 현대식 건축물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지만 도시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친근한 것들이 참 많이 있으니까요.
자, 그럼 뚜껑을 열어봅시다. 아니 뚜껑을 쳐다봅시다. 매일매일 무심코 밟지만 마시고....
일부 지역의 한정된 맛보기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뚜껑이 많습니다. 그것이 전기를 위한 것이든 상하수도를 위한 것이든, 미우나 고우나, 누가 보든 말든, 정확히 도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통신, 가스, 상하수도 등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찰용’ 맨홀 뚜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한국전력이나 SK통신, 서울시 맨홀 뚜껑에선 생각지도 못한 CI 변천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는 뚜껑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도시는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뒤엉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모르죠. 우리가 모르는 거대한 ‘지하 세계’가 영화처럼 소설처럼 존재하고 있는지도…
누군가 말했습니다. 미국의 도시는 차를 위한 도시이고, 유럽은 과거를 위한 도시라구요. 우리의 도시는 어떨까요? 혼란스럽지만 자유로운, 일종의 ‘잡종’도시라는 표현을 본 적도 있습니다만…언뜻 보면 무질서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의 이야기 거리나 아름다움이 스며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아닐런지요.
무조건 만들어 덮어 버리면 그만인 뚜껑이 아닙니다. 뚜껑도 도시의 얼굴이고 아름다움을 이야기 해야 할 대상이기에 - 맨홀 뚜껑을 비롯한 공공 시설물들은, 사용 편리성과 더불어 디자인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정말 ‘그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이만. 저는 조용히 뚜껑을 닫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