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12
‘삐라’ 아세요?
‘박통’과 ‘김수령’이 ‘너 죽고 나 살자’라고 첨예하게 싸우던 시절 - 동네 야산이나 골목 어귀에 굴러 다니던 불온 선전물을 ‘삐라’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습긴 하지만, 전단(傳單)을 나타내는 BILL(ビラ)을 일본식,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읽은 것이죠. (청구서나 증서, 전단, 법안 등을 굳이 ‘삐라’라고 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삐라’라는 말도 결국은 한국전쟁 때부터 심심찮게 사용되어 온 군대용어?)
이 삐라를 본의 아니게 습득하면 학교, 경찰서, 군부대로 지체 없이 신고(신고하면 연필이나 공책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해야 했는데, ‘신고’라는 말 자체가 살 떨리는 말인데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보니, 어쩌다 삐라 한 장이라도 주웠다가는 무슨 큰 일이나 난 것처럼 콩닥콩닥 안절부절 못했었죠. 당시만 해도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까지 온 국민이 반공, 방첩, 멸공 의지에 불타오를 때라, 국민교육헌장을 줄줄이 외우듯, 둘만 낳아 잘 기르듯, 혼분식 하듯, 삐라 습득 시 행동강령에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삐라의 내용과 그 디자인이었습니다. 김일성 부자의 찬양이나 ‘지상낙원’같은 거창한 표현 말고도, ‘박통’이나 ‘전통’을 마귀(?)로 그려놓는 대범함까지 –;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기 그지 없었고, 타이포와 일러스트 역시 일반 인쇄물과는 전혀 다른, 무척이나 조악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조악한 인쇄상태에 ‘시간’까지 더해지면 잉크와 지질이 변하여 ‘삐라’만이 낼 수 있는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내기 마련이었죠. ^^
어느 날부터인가 인쇄 상태도 좋고, 컬러사진도 들어있는, 삐라치고 꽤 괜찮은 삐라들이 돌기도 했는데, 이런 좋은 삐라(?)들은 안기부(현재의 국정원)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왜 굳이? 라는 의문이 들긴 합니다만…) 일급 국가 기밀이었을 테니, 일개 학생인 우리가 알 길이야 없지만 “안기부에 삐라디자이너로 취직하면 어떨까?” 우스개 소리들을 하던 기억들이 납니다. (정말로 안기부에도 삐라 디자이너가 있었을까요? 어딜 가더라도 디자이너 없는 곳이 없던데… 궁금하군요.)
이야기가 엉뚱하게 길어 졌습니다.
내용이야 전혀 다른 것이지만 오늘 이야기할 주제도, 삐라와 비슷한 ‘편법’‘불법’‘야매” 디자인입니다. 담벼락, 전신주, 실외에어컨, 지하철을 비롯한 공공의 장소 등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나 붙어서 합법적인 것들과 경쟁하는 당당한(?) 시각 표현물들이죠.
이런 시각물들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우회적인 표현이나 세련된 디자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불법적이고 음성적인 내용들도 많아서 누가 볼세라, 밤을 틈타, 사람 없는 틈을 타 침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음악이나 연극 행사의 포스터부터, 나이트클럽 안내 포스터, 구인, 안내 전단에 이르기까지 –; 우리들 생활만큼이나 복잡다단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개가 비공식적인 것들이어서 단속 자체가 불가능하다죠.
세상은 언제나 아름답고 정당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듯…
어쨌든, 많은 음성적인 시각공해물들은 디자인적인 면에 신경을 두지 않았거나 둘 처지도 아닌 조악하고 딱딱한 직설적인 내용을 담은 디자인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디자인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는 ‘디자인’이기 때문에 간과 할 수 없습니다.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오히려 더 큰 호기심 유발이 우려 되는 것들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체제 선전용 삐라는, 이제 약으로 쓸래도 구하기 힘든 한 시절의 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들 필요도 없고, 설사 만든다 하더라도 그런 조악한 내용들에 넘어올 사람도 없어진 지금 –; 그러나, 법과 단속의 눈을 피해 온 세상을 제 집처럼 휘날리며 뛰어 다니는 ‘현실속의 삐라’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삐라’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들이 ‘삐라’를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의 주변환경이 달라지고, 개개인의 의식이 성숙해지면 이런 ‘현실 속의 삐라’들은 자연히 사라지게 될까요…
도대체 이들을 우찌해야 좋을까요? 대략난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