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3-22
잊을 만 하면 너도 나도 훌러덩 훌러덩 벗어 던집니다.
인터넷, 모바일, 또는 화보 집을 통한 누드는 사람들의 호기심에 상업성이 곁들여져 스포츠신문 지면을 차지하는 흔한 뉴스 거리가 되었죠.
한 몸매 한다는 고소영, 함소원, 김완선, 이지현, 루루, 사강, 하리수, 이주현, 홍진경, 성현아, 권민중, 황혜영, 정양, 이사비, 이승연 등 알만한 여자(아직도 벗을 준비중인 이들이 줄서 있답니다. 그런데, 왜 남자는 없을까?) 연예인들은 - 자의인지 타의인지 - 스스럼없이 젊은 몸을 과시하고 이슈와 파문을 일으키며 만만찮은 경제적 이득을 챙겨갑니다.
한 물간 연예인의 재도전(?) 개념도 넘어 버렸고, 성의 상품화란 말도 무색해져 버렸습니다.
시대의 주요 화두 인양 음지에서 양지로, 더 넓어지고 더 노골적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90%, 결혼 후에는 70%정도를 남자건 여자건 직간접으로 이성과 관련된 생각과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스타의 아름다운 누드나 남녀의 몸은 영원한 인간의 화두이고, 그것을 다루는 일은 늘 ‘예술’과 ‘외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기 마련이죠.
주위를 잠시만 둘러봐도 시각적으로, 심리적으로, 오감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몸은 우리들을 휘감고 있습니다.
주제와 별다른 관련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포스터나 옥외 간판들엔 누드와 얼굴들이 넘쳐나고, TV나 영상 매체를 통한 은근한 상술 역시 강력한 힘을 발휘 하고 있습니다.
대중가요 가사나 뮤직 비디오, 드라마나 영화는 물론이고, 광고 속의 이중적인 카피나 라디오를 통한 묘한 소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적 상상을 유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가히 성의 르네상스 시대(?)라 할 만 합니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란 이름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몸의 변주’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가 도덕적이고, 어느 선까지 실정법에 맞아 들어가는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지언정 –
시선을 끌고 싶어 하고, 관심을 얻고 싶어하는 크리에이티브 활동이 계속 되는 한, 이런 ‘몸의 변주’는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얼마만큼의 주목과 의도한 효과를 누릴 수 있는지, 그것이 외설인지 예술인지는 늘 ‘보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질테구요.
또 누가 벗을까?
누드를 보고 싶은 최고의 인물은 한채영이 1위이고, 2위는 전지현, 다음으로 이효리, 김혜수, 고소영, 김희선 순인데 잘 나간다는 권상우, 배용준, 장동건, 등 한 몸하는 남자는 어떨 런지…?
좋아 하는 스타가 웃통만 살짝 벗어도 괴성을 지르는 판국에 그들의 몸을 전면적으로(?) 이용한 이벤트라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막강한 효과를 가질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이용한 디자인은 시대를 막론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 되어 왔고,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지겠죠.
똑같은 물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몸을 이용한 많은 제작물들이 천박한 저 차원이 되던지 한 차원 높은 작품으로 태어 날지는 많은 부분이 디자이너의 머리와 손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사회와 문화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표현의 자유와 거침없는 개성표출에 성역은 하나 둘 사라지고 금기시하던 많은 현상들이 거부감 없이 우리들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난무하는 ‘성’과 ‘몸’을 이용하여 디자인 된 표현물 속에서 비주얼 한 컷이라도 아름답고 멋지게, 그러면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보여 줄 수 있다면 – 그것 만으로도 큰 보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 어떻습니까?
한몫 기여보비(其與補裨) 하심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