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그래픽 | 리뷰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2008-10-21


6종의 아름다운 편지지를 골랐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아름다울 6통의 사연을 담았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To 갓 태어난 나의 딸 은수

처음 너를 가졌을 때 너를 낳을 하기만 하면 끝나는 줄 알았다.
씩씩 잠도 잘 자고, 꿀꺽 꿀꺽 잘 먹고, 저절로 쑥쑥 자라는 줄 알았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엄청난 모성이 샘솟아나 너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나의 엄마가 내게 해주셨던 그것처럼….
하지만, 무엇이 필요한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울음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넌 한 마리 동물,
너도 울고 나도 울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가 간다.

잠투정엔 밤낮이 없고, 이유모를 울음에 애가 닳고,
몸을 살짝 뒤틀기만 해도 덜컹, 가슴부터 내려앉는다

별거 아닌 일들이 매일 전쟁처럼 벌어지는 일상이 내 인생이 될 줄 몰랐다.
너를 안고, 너를 달래며, 너를 먹이고, 너를 씻기며
내 마음은 뉴욕 아침의 베이글 냄새를 맡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오후 햇볕을 쬐고, 시카고의 밤거리를 헤맨다.

모든 것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이 당황스러운 폭풍 앞에서
누군가의 딸이기만 했던 내가 너의 엄마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야 하는지 이 엄마는 언제쯤 알게 될까.
그 작고 보드라운 발에 뾰족 구두 신게 될 날 즈음에,
습자지처럼 얇은 손톱에 매니큐어 바르는 아가씨가 될 즈음에….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능일 뿐이라는 배냇짓 한 번에 날아오를 듯 기쁘고
목구멍으로 젖 넘어가는 소리에도 깊은 행복감이 찾아온다.

딸아, 미안하고 고맙다.
어설퍼서 미안하고, 내 딸이 되어줘서 고맙다.
네가 자라서 누군가의 엄마가 될 때까지 꼭 살아있어 줘야겠다고 가만히 다짐해본다.

From 여경환 (경기도미술관 교육팀)

To 친구 은지

보지 못한 날들이 만난 날들을 앞지른 시간…
고등학생, 그때 새로운 천년 이라고 떠들썩했던 그때쯤
우리는 마치 미아리라는 동네에 유배라도 온 청렴한 그 누군가 라도 되는 듯.
이 침침한 유배지에서 곧 벗어나리라 조용히 둘이서 속닥였던 것 같다.

너의 깨끗하게 낡은 물건들과 차분함을 존경했던 것 같다.
너는 나의 조용한 반항의 마음과 실없는 농담을 응원해주었다.

너는 역 주변에 행상을 벌인 할머니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 모습이 꼭 어쩌면 자기의 미래 같다고, 세상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공포인지 슬픔인지 가끔 밀려 온다 하였다. 쇼팽을 연주할 줄 알던 17세의 네가 말했다.

아마 너를 마지막쯤 본 그때에 우리는 막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던 것 같고
너는 YMCA 수영장에 다니고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패스트푸드점의 귀퉁이에 앉아 끝이 보이지 않던 유배생활이 끝에 새로 맞닥뜨린 곳도 별반 다르지 않음에 차분히 불만을 토로했다.

다소 어색하고 어리석은 생활들이 이어지면서,
나는 왠지 너에게 연락하기가 부끄러워 졌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나에게
불만은 때로 백반 집의 반찬처럼 오물거리다 웃을 수 있는 정도의 것으로 변했고,
불안은 조금 낮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가끔 내가 앉을 자릴 위협하는 정도이다.

너는 어떻게 지낼까, 네가 원하던 안정적인 직장.
서로가 그리 미워하던 선생님이 되었을까.
어쩌면 너는 좋은 선생님이 되었으리라.

아직도 가끔 나는 지하철역에 앉아 면봉을 파는 할머니를 볼 때 마다.
네 생각이 난다.

From 윤재원 (아티스트, 칠진)


To 친구 나비

안녕. 나비. 분명 미국에는 패리스 힐튼도 있고, 오바마도 있고, 또 몇 만 명의 제시카도 있잖니? 그런데 네가 그곳으로 떠난 뒤론 그 먼 나라는 그저 네가 있는 곳, 그 뿐인 것 같다. 벌써 1년 전인가. 해왔던 공부와 하고 싶은 연극 사이에서 고민하던 네게 “꼴리는 대로 하는 게 제일”이라는 영양가 제로의 충고 밖에 하지 못했지만, 나는 네가 연극을 택할 거라고 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왜냐하면 네가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질문할 때 연극 쪽에 살짝 힘을 주어 말하는 게 보였거든.

한참도 더 오래전의 일이 생각난다. 왜 우리 꼭 한 번 연극을 같이 본 적이 있잖아. 우리가 꼭 봐야 한다며 맞장구 친 배우가 배종옥이었는지 조민수였는지는 가물가물 하지만, 연극이 끝난 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삼겹살에 소주!”라고 ‘찌찌뽕’한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벌건 눈을 해서 돼지를 굽던 우리는 다투고 난 뒤의 연인처럼 보였을까. 미역이 둥둥 떠다니던 오이냉국을 앞에 두고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이 먹고 싶다면서 또 앙 하고 울어버린 우리가…?

비록 “거긴 지금 몇시니?” 꼬박꼬박 확인해야 하는, 우린 서로 다른 시간을 더듬으며 살고 있지만. 너의 예쁜 웃음소리인지 돼지기름을 피해 둥둥 떠다니는 미역인지가 신기하게도 자꾸만 날 만지는 기분이야. 하긴. 신기할 일도 없지. 내게 저 너른 바다는 그저 네가 있는 곳, 그 길가에 핀 아름다움일 뿐인 걸.

From 김신형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코리아 기자)


To 어머니

아마 모르셨겠지요. 가끔 당신이 벗어놓은 신발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가 있었어요. 마치 신발 속에 검고 깊은 바다가 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내가 모르는 당신의 인생을 신발은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하지요. 칡뿌리처럼 곱고 딱딱해진 당신의 발에도 어여쁜 꽃신이 신겨졌을 때가 있었을 테지요. 꽃신을 신고 말랑말랑한 흙길을 사뿐히 걸었을 당신은, 언제부터 이 전함과도 같은 신발로 무장한 채 숨이 목까지 차오르는 언덕길을 오르게 됐나요. 앞 코가 까지고, 뒷굽이 닳디 닳았나요. 그리고 그 꽃신은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나요, 당신의 꿈은….

혹시 아셨을 까요. 가끔 당신이 벗어놓은 신발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가 있었어요. 마치 신발 속에 검고 깊은 우물이 찰랑찰랑 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내가 모르는 당신의 속을 신발은 고스란히 말해주는 듯하지요. 지켜보다가 입을 대고 조용히 소리 쳐봅니다. 역시나 대답이 없으시네요. 이번엔 가만히 손을 집어 넣어봅니다. 장갑이라도 낀 듯 따뜻해지지요. 작은 모래알들도 만져지지요. 그 모래알이 내내 입 속을 서걱거려서 차마 말을 하지 못했네요. 어머니.

From 이상현 (월간 정글 기자)


To 키 크고 잘생긴 남자에게 떠나간 여자

나는 네가 공룡의 멸망을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인류가 얼마나 끈질기게 버티어 여태껏 살아남았니? 공룡처럼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아마 너도 그렇겠지. 너 역시 사람이고, 공룡이 아니니까. 네가 날 떠나도 떠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하나이니까 우리는 끈덕지게 살아남았고, 또 살아남을 거니까.

하지만 지금 너의 태도는 그 뜻에 어긋나고 있다. 자꾸 키 크고 잘 생긴 남자만 원한다면, 모든 여자가 그런다면 우리 인류는 공룡처럼 몸집만 자꾸 커지다가 뻥! 멸망하고 말 거다. 요즘 출산율도 떨어지고 있는데 다시 잘 생각해줬으면 한다. 너와 내가 만나는 것을 전 세계가 애타게 바라고 있다. 우리는 모두의 미래이고, 희망이다. 부디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기 바란다.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매번 잊지 않고 찾아오는 봄을 누려야 한다. 그것은 숙명이다. 이번 봄이 아니라면 다음 봄이라도 좋구나. 다음 봄 안되면 다 다음 봄이라도. 그것도 안되면 몇 번을 건넌 봄이라도. 사실 너가 돌아오는 모든 날이 봄이니까. 나는 매일이 봄이니까. 겨울에도 춘곤증에 시달리니까. 언제든 돌아와라. 인류를 위하여!

From 김의석 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부


To 제비꽃 여사

추석 연휴가 끝나는 밤입니다. 아파트는 짧은 연휴를 끝내며 내내 조용하더군요. 어제까진 고기와 생선 굽는 내를 내더니 모두가 각각의 집으로 돌아간 모양입니다. 주차장의 차들도 내일 출근을 준비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쉬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식구들을 만나게 해주느라 사람들만큼 저들도 바빴지요. 저 혼자만 한가했던 모양입니다.

알고 계시나요. 집을 샀어요. 제가 자랐던 인천의 오래된 동네의 오래된 집입니다. 수리를 하느라, 살던 집을 팔고 남의 빈 아파트에서 생활한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어요. 넌 또, 남들처럼 아파트를 사서 살림 늘릴 생각을 않는다고 핀잔을 주실 게 들리네요. 하지만 좋을 거예요. 마당도 있고, 옥상은 전망도 좋거든요. 멋지게 고쳐지면 와서 봐주세요. 얼마나 좋은 지, 잘 살고 있는 지 살펴봐 주세요.

그 핑계로 명절도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네요. 문득 좋아하지도 않던 송편이 먹고 싶어 사왔어요. 지겹던 명절 음식, 이젠 먹고 살만들 한데 왜 늘 똑같은 전을 부치고 나물을 하나 납득이 안 갔었는데, 이젠 아니다 싶은 게… 나이 든 거지요. 명절이 끝나고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의 반찬은 같은 명절음식인데도 얼굴만큼이나 맛이 각각 달랐어요. 우리 집 잡채와 진경이네 잡채는 맛이 달랐거든요. 그 알 수 없는 차이, 그게 우리들 삶을 다르게 만든 걸까요.

당신이 그곳으로 가신 지 오년이나 육년 즈음, 아마 그쯤 되었어요. 날짜나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 버릇이기도 하지만 해수를 헤아린다고 당신이 돌아오지도 않을 것을…. 그냥 무심한 딸이니까, 애교 없고 무뚝뚝한 거 아시잖아요. 가시고 몇 해 동안은 당신이 여기 안 계신다는 그 자체보다, 당신을 그렇게 보내드린 것에 대한 회한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서툴렀고, 경솔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무엇보다, 당신을 가난한 채로 보내드렸다는 생각으로 괴로웠습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당신, 중환자실에 누워서도 돈 걱정을 해야 했던 당신이 가엾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젠 그냥 잊어라 하시겠지만요.

정작 잊고 싶은 것은, 죽어도 잊히지 않는 것은, 병원 로비에서 첫날 당신이 제게 무섭다며 울먹이던, 중환자실에서 언제 입원실로 올라가느냐고 손으로 말하던 눈물 맺힌 눈. 난 어려서부터 당신이 우는 게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당신까지 울면 나는 어떡합니까. 기억은 지속되겠지요. 하지만 잊을 겁니다. 잊어야지요.

거긴 어떠십니까. 소화는 잘 되시구요. 돈 걱정 안 해서 여기보다 좋으신가요. 잘 지내시면 꿈에도 뵈지 않는다는 말을 믿으며 삽니다. 저흰 아프지도 않고 잘 지냅니다. 다만, 마지막까지 당신의 짐이었던 막내만 좀 살펴 주세요. 외로우면 시간이 천천히 흐른답니다. 부디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보고 싶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2008 秋夕 당신의 딸 드림

From 박수진 (국어선생님)

facebook twitter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