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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손놀림을 타고 노는 맛, 캘리그라피

2002-10-30

불과 10년전 워드프로세스 서체 목록에 ‘필기체’가 등장했을 때, 곳곳에서 그 서체로 쓰여진 글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필기체’가 진짜 필기체는 아니었다. 다만, 다른 서체에 비해 전체적으로 둥글둥글 흘려쓰기가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필기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 후 엽서체, 볼펜체 등처럼 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타이틀로 서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였으나, 이는 다양해지기만 했을 뿐 여전히 손글씨적이지는 않았다. 이처럼 자연스러우며 멋드러진 손글씨에 대한 열망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으나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캘리그라피(Calligraphy)’ 가 새롭게 주목 받고있는 요즘, 영화포스터부터 시작하여 책표지, 제품 패키지, 심지어 도시 간판에까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캘리그라피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한 캘리그라피 전문회사인 필묵의 작가들과 각 분야의 디자이너들이 일본의 캘리그라피스트인 히라노소겐상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의 캘리그라피 현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히라노소겐상은 2002한일월드컵 포스터를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캘리그라피를 주도하고 있는 일본 최고의 캘리그라피스트이다.




☞ 이정현 기자 / tstbi@yoondesign.co.kr



l 레터링기법 중 한 방식으로 환필, 평필, 모필, G-pen, Magic-pen 등의 필기구 특성과 이에 적절한 각종 용지류와의 성질을 조화시켜 손으로 직접 제작하는 작품을 말한다.
l 특별한 도구없이 필기구만으로 용지류에 직접 다양한 기법의 형태로 표현한 것을, 그대로 직접 사용하거나 경우에 따라 약간 수정 보완하여 사용한다.
l 캘리그라피의 뜻을 흔히 우리식으로 해석해서 서예 또는 붓글씨체라고 하지만 일반 서예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l 서예는 문방사우, 즉 붓, 종이, 먹, 벼루의 기본도구를 이용하여 서예 본래의 순수한 필법을 바탕으로 작가 개개인의 주관적인 독창성에 그 주안을 둔다
l 캘리그라피는 객관적이고 상업성이 다분히 내포된 시각적인 요소와 시대적 감각 등 결과에 대한 적응성과 이미지 효과를 요구하는 큰 차이점이 있다.
l 그러므로 서예에 약간 경륜이 있다해서 기대하는 수준의 작품을 쉽게 처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익히는데 유리한 조건 하나를 갖추고 있을 뿐이다.

l 여러 종류의 특별한 도구와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l 필기구 종류와 손놀림, 각도에 따라 작품형태가 달라진다.
l 부분 수정이 필요할 때 변형 또는 손질이 용이하다
l 일반 레터링에서 연출이 불가능한 붓결, 용지 특유의 맛, 그리고 명도의 강약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l 고전적인 의미의 낱말이나 제품을 전통적인 분위기를 살릴 때 더없이 효과적이다.
l 부드럽고 자연스런 운치, 그리고 힘찬 획을 구사할 수 있다.
l 밑그림 및 칼라링을 별도로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l 주어진 바탕색이나 그림 윗면에 직접 제작할 수 있어 편리하고 깨끗하다.
l 가독성의 해독효과로 빠른 전달과 친밀감을 더해준다.
l 독자적인 형태에 소비자로 하여금 시각적 광고효과가 높다.
l 어느 정도 요령이 가해지고 숙달되면 제작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l 주어진 낱말을 머리 속에서 순간적으로 아이디어 스케치한 것을 지면에 갖가지 형태로 단시간에 즉흥, 묘사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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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吳秉雲, 캘리그라피, 정한, 1992

인터뷰어:
김종건(필묵 대표)
박철원(필묵 캘리그라피스트)
원은혜(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시각정보디자인 전공, 디자인정글아카데미 캘리그라피과정 1기)
손희수(Arthur D. Little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인정글아카데미 캘리그라피과정 1기)
유현성(경원대학교 대학원 시각디자인 전공, 필묵커뮤니티 회원)
안복환(일본 문화의장학원 의복전문과정 의장과 학생, 필묵커뮤니티 회원)



1. 서예가 그리고 캘리그라피스트가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처음으로 붓을 든 것은 10살쯤 초등학교 붓글씨 시간. 담임 선생님이 유명한 서예가로, 예술가 기질이 있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붓글씨가 종이에서 튀어나가거나 종이가 찢어지거나 해도, “튼튼하고 씩씩해서 참 좋다!!”라고 칭찬을 하시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예가 좋아지고 중학교 때부터 서예학원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돈되고 아름다운 글씨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여 그러한 글씨 연습을 열심히 했는데, 중국의 고전을 배우면서 정돈된 글씨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는 영어를 전공하였는데, 전공쪽에는 별로 힘을 기울이지 않고 매일매일 서예의 임서, 창작만을 하였습니다. 그때쯤 중국의 유명한 고서라는 고서는 다 임서하고(원본을 보고 그대로 씀), 그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당시 최고의 서예가라 불리우던 저명대학 교수로부터도 “이미 독자적인 서풍을 이루었다”라고 평을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어, 22세부터 29세까지 중학교에서 영어와 서예를 가르쳤습니다. 그때에 여러군데 서예전에도 출품을 하여, 일본 서단의 최고봉 중 하나인 서단원전에서는, 최고상인 ‘서단원상’등도 수상하였습니다.
당시 학교 교사로서 현실과 이상과의 거리감에 괴로워하며, 힘들게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 서점에서 ‘상업서도’라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서예가나 디자이너가 쓰지 못하는 신선한 글자. 캘리그라피가 한눈에 들어와, 몸에 전류가 흐를 정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천직이다라고 그때 깨달았던 것입니다. 논어에 ‘서른 살 때 입신했다. (三十而立)’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제가 서른이 되었을 때 교직을 그만두고, 당시 소속되어 있던 서예단체의 사범이나 임원직을 모두 그만두고서 글씨에 내 생애를 걸 것을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2. 캘리그라피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에게 흔히 캘리그라피 제작을 할 때 ‘서로 다르게 쓰는 것이 힘들지는 않은지요?’ 라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만 저는 조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컨셉에 맞게끔 변형 시키는 것은 남의 흉내가 아닌 자기자신의 작품이고, 또한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이미지로’라고 주문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상대방의 감성과 아이디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힘들기는커녕 좋은 공부를 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경우, 나는 최소 3개의 안건에서 많을 때는 50개의 안건을 냅니다. 요구받으면 같은 문자를 100개든 1000개든 다르게 쓰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건 자랑을 하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도로 글씨체는 무한하고 속 깊은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 선택되지않고 반대로 버릴려다가 일단 보류했던 것이 선택되어질 때도 있습니다. ‘도대체 왜?’라고 그때는 생각합니다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맞을 때도 있어 ‘바둑은 대국자보다 구경꾼이 여덟 수 더 앞을 내다본다’라는 일본어 속담이 있는데, 제3자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이 더 잘 보이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3. 일본에서의 캘리그라피 디자인의 현황은 어떠한가요?
옛날에는 전문 캘리그라피스트는 것이 거의 없어서 상품의 문자나 가게 로고 등은 디자이너 또는 간판가게 사람이 만들거나, 그것 역시 여의치 않으면 일반 서예가에게 의뢰하여 제작하거나 했었습니다. 그러나 약 10년 전, 제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서서히 캘리그라피라는 세계의 전문성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디자인의 중요 요소의 하나로 인식되어지게 되었습니다.
디자인에 사용되는 캘리그라피의 필자는 세 종류로 분류됩니다.
“디자이너, 일반 서예가, 전문 캘리그라피스트”
확실한 수치는 아니지만 현재 50%이상은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제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을 서예가와 전문 캘리그라피스트가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하는 이유는 서예가나 전문 캘리그라피스트에게 의뢰를 하고 싶어도 예산면에서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전과는 틀려진 것이 현재는 디자이너 역시 캘리그라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특히 일본 고유의 디자인을 다루는 디자이너 중에는 제가 주최하고있는 캘리그라피 교실에 참가하여 캘리그라피의 질 향상에 노력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또한 디자이너들이 서예를 못쓸 경우, 일반 서예가에게 캘리그라피를 의뢰하였었는데 일반 서예가의 대부분은 서예 자체는 훌륭하나, 상품이나 디자인의 컨셉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근래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디자인서(書)의 스페셜리스트인 캘리그라피스트인 것입니다. 상품의 디자인 컨셉을 존중하면서 디자인적으로도 서적(書的)으로도 수준 높은, 그리고 강렬하며 독창적인 캘리그라피를 만드는 스페셜리스트, 그것이 전문 캘리그라피스트 입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캘리그라피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문가에게 의뢰할 금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돈을 지급하는 것은 클라이언트인데 그들 중에는 “붓으로 써져 있고 읽을 수 있기만 하면 된다”라는 정도로 밖에 생각을 안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클라이언트들의 의식개혁 또한 앞으로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4. 일본에서의 캘리그라피스트들의 현황은 어떠한가요?
제가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걸로 생계를 꾸리고 있는 전문가는 제가 아는 한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 디자인 서도명감(書道明鑑)’에 수록되어 있는 디자인 서예가는 약 500명. 게재되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書라는 직종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중 전문가로서 디자인書만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몇 십명 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디자이너이면서 서예학원을 운영하거나 등 다른 직업과 같이 겸해서 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수준역시 상당히 훌륭한 작품부터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만한 작품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5. 일본의 캘리그라피의 흐름과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에서의 캘리그라피에 관한 다채로운 양상은 서예가보다는 오히려 디자이너 또는 다른 예술 분야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일반 서예가처럼 중국의 고전서예를 최고로 인식하고 탐구하는 자세로는 현재의 일본 여러 곳에서 눈에 띄는 다채로운 글씨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의 번화가 등을 걷다 보면, 고전 서예적인 간판이 많고 대신 다양성은 별로 많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금도 중국에서는 고전적인 글씨체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비해 일본은, 시메트리(대칭, 좌우의 균형) 보다는 자연스러운 기울림에 정취를 느끼는 문화적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문화를 서예에 처음 구체화 시킨 것은, 서예가보다는 화가나 판화가 그리고 조각가나 시인 또는 승려 등 다른 분야의 문인들이었고, 그리고 감성의 세계에서 승부를 다투는 디자이너들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서예를 일반 대중이 많이 배우고, 매년 커다란 서예전이 여기저기서 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가의 작품은 일반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고 오히려 전문 서예가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작품쪽이 인정을 받곤 합니다. 서예가의 그것은 대부분 단순히 기교적이기만 하고 가슴을 울리는 것이 적다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대중문화에 직결되어 있는 디자이너쪽이 글자를 통해 인간 감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동기나 감각에 있어 필연적으로 서예가보다도 훨씬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디자이너는 뛰어난 감각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서예를 쓰는 기술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등장한, 현재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전문 캘리그라피스트인 것입니다. 디자이너의 감성과 서예가의 테크닉을 모두 갖춘, 디자인쪽과 서예쪽 모두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높은 수준의 캘리그라피를 창작하는 스페셜 리스트, 21세기에 있어 그 존재의의는 점점 더 높아지고 활동의 장 또한 점점 더 넓어질 것입니다.

6. 한국에서 캘리그라피스트가 되고자 하는 분들에게
캘리그라피스트가 되기 위한 어프로치에는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디자이너이고 또 하나는 서예가, 그리고 마지막은 다른 분야에서의 어프로치입니다. 디자이너들은 각자 독자적인 훌륭한 디자인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살리면서 서예 기술을 높여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우선 붓에 익숙해 질 것, 붓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 무조건 많이 써보는 연습을 합시다. 그리고 때로는 우수한 캘리그라피 작품을 따라해서 써 보는 것도 좋겠고, 스스로 과제를 만들어서 그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법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창작해 나가는 것도 좋겠지요.
디자인 서예를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고전 서예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고전은 발상과 기법의 보고라고 할 수 있으므로, 접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고, 서적(書的)인 면에서의 고품격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고전은 반드시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예가들은 우선 고전서예의 기존 개념을 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해주십시오.
고전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어차피 과거 유물일 뿐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새로운 서예 세계를 목표로 삼고 있다면, 고전이라는 속박물에서 자신을 해방 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 서예를 공부한 것이 결코 소용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전에서 배운 발상과 기법에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자기 고유의 오리지널리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어프로치로부터 캘리그라피스트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서예의 표현기술을 닦을 것’, ‘감성을 수련할 것’ 이 두 가지가 필요불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예의 표현 기술을 닦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 많이 쓰면서 붓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전 서예를 공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성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캘리그라피 작품을 많이 볼 것과 또한 서예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분야 쪽에도 흥미를 가지고, 人▪物▪自然 등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마음을 끄는 것들에게 많이 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뜻 있는 여러분들, 특히 젊은이가 캘리그라피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캘리그라피스트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에 대해 저는 대단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훌륭한 전통문화에 현대의 신선함을 접목시킬 수 있을 지의 여부는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분들, 특히 시대를 리드하는 아티스트나 디자이너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서울에서 제게 찾아와주신 젊은이들의 열정에 접하였을 때, 저의 꿈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일본 그리고 아시아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지금 예감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지금 함께 새로운 세계의 장을 열어 아시안파워로써 세계에 선풍을 일으킵시다.

흔히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그곳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버리고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본 캘리그라피에 대해 내가 지녔던 고정관념은 무엇이었을까?
고정관념을 가질 수 조차 없을 만큼 일본의 캘리그라피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이번 여행은 5박 6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막연함에서 시작해서 조금은 구체적인 느낌을 갖게 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일본은 캘리그라피에 관대한 나라다.
약 나흘간 신주쿠, 이케부쿠로, 시부야, 하라주쿠 일대를 밤낮 없이 돌아다니며 실제 보고 느낀 점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캘리그라피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캘리그라피 디자인이라고 따로 규정짓는 것이 어색할 따름이다. 그 곳에서는 생활의 일부이고 디자인의 한 형태일 뿐이다. 다녔던 곳 중에서 가장 번화하고 캘리그라피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단연 신주쿠와 시부야다. 신주쿠는 쇼핑, 유흥의 중심지이며 밤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가득하다. JR 신주쿠역을 중심으로 하가시 신주쿠, 니시 신주쿠, 미나미 신주쿠로 나뉘어 있고 그 일대가 매우 광범위하다. 어느 지역을 얼마만큼 돌아다녔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시선은 항상 간판에 꽂혀있었다. 고급 식당, 레스토랑, 술집 등 캘리그라피를 빼놓고 말할 수 있는 간판이나 인테리어가 없을 정도였다.
간판 뿐만이 아니다. 시부야 한복판의 대형 레코드점에는 캘리그라피와 캘리일러스트가 DVD와 CD자켓, 공연 포스터 등으로 디스플레이 되어있고, 시부야나 이케부쿠로의 쇼핑센타와 백화점 쇼윈도에도 큼지막하게 내걸린 캘리일러스트의 여인들은 나의 눈길을 하염없이 붙잡았다.
이 같은 것들은 거리를 걸으면서 보게 되는 좋은 구경거리다. 일본 거리에서는 이미 캘리그라피 문화가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배경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규격화된 글씨보다 손으로 써 놓은 글씨들을 상용하고 선호하는 문화적 배경이 몹시 궁금했다. 히라가나와 한문을 적절히 혼용하여 쓰는 것이 조형적으로 좀 더 다양한 면이 있고 재미가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혹은 보편화된 생활 문화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는 일본의 서예 문화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판에서 볼 수 있는 캘리그라피는 스타일이 다양하다. 사용된 소재 역시 다양하고 재미있다. 화선지에 직접 그린 것을 그대로 액자에 넣어 사용하는가 하면, 나무판이나 돌 등에 양각, 음각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낙서하듯 벽에 직접 그려 넣기도 한다.
같은 장소라고 해도 밤에 보는 신주쿠의 거리는 또 다른 곳에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신주쿠는 평균 33도를 웃돈다. 해가 제대로 날 때에는 눈을 뜨고 있기가 힘이 들 정도이다. 그 때문일까, 신주쿠의 캘리그라피는 밤에 더욱 다양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내가 특히 관심을 지녔던 것은 캘리그라피를 응용한 인테리어였다. 시내의 한 선술집 실내장식은 그 입구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캘리일러스트를 이용한 갤러리와 같은 공간이 있는가 하면 개성 넘치는 필체로 쓰여진 메뉴가 할로겐 조명으로 밝혀진 복도 벽에 장난스럽게 걸려 있기도 했다. 판매하고 있는 술의 종류가 많았는데 대부분의 술 이름과 패키지가 캘리그라피로 되어 있었다. 술병로고에서 술집 인테리어까지 캘리그라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이 엿보였다. 일본 음식이 미각뿐 아니라 시각을 즐겁게 해준다는 말처럼 술을 마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풍류를 만끽하고자 함일 것이다.

하라주쿠는 다른 대도시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일본의 전통 신사인 메이지 진구가 있는가 하면 만화 속 인물들로 코스프레한 아이들과 독특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들, 즐비하게 늘어선 우리나라의 보세 옷가게와 같은 상점들, 샤넬, 루이뷔통 같은 고급 부틱 등이 있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서구문화, 가상과 현실이 오묘하게 잘 어울린다. 신주쿠, 이케부쿠로, 시부야 같은 도쿄의 대표적인 대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캘리그라피가 (쇼핑, 유흥, 식당, 놀이문화의 중심지인 특성에 알맞게) BI나 CI, 패키지, 인테리어 등으로 적용되었다면 하라주쿠에서는 패션, 액세서리, 일상 생활용품, 팬시용품 등 그 적용 범위가 좀 더 디테일하고 다양하다.

겉보기엔 우리의 압구정동이나 청담동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하라주쿠에서는 젊은 아이들의 외색문화와 더불어 다른 도시에서 유별나다고 느꼈던 일본 특유의 별난 맛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유난스러울 정도로 유럽이나 미국의 유행을 쫓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덩굴에 싸인 허름한 아파트 등의 주거 공간이 갤러리나 상점들과 공존하고 있는 모습으로 재창조 된 것을 보고 있노라니 단순히 외색 취향의 소비가 전부인 곳은 아닌 것 같았다.
하라주쿠역을 조금 지나 오모테산도 거리를 중심으로 블록을 따라 내려가면 일본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거리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거리의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려주고 자신이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엽서로 만들어 파는 그런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특이하게도 이들은 글씨를 파는 사람들이다. 거리의 캘리그라피스트 인줄만 알았는데 시도 직접 쓴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하지만 시라고 하기엔 내용이 좀 유머러스 하다. ‘직감승부’ , 마치 좌우명 같다. 사는 사람이 있으니 파는 사람도 있는 것은 당연 지사고, 사람에 따라 작품집을 출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라주쿠에서는 오모테산도 거리를 중심으로 보물찾기하듯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골목골목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골목 여기저기에는 영어인지 일어인지 한눈에 파악이 어려운 낙서들이 많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역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간판이다. 다른 곳에서 보았던 일본 전통적인 느낌의 캘리그라피 간판 보다는 좀더 젊은 취향에 가깝고 쉽게 다가온다. 패션에 관련된 상점이 많다는 특성이 상점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의 개성으로 표출되는 것 같다.
캘리그라피를 패션의 모티브로 이용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떤 의류 매장에서는 직접 염료를 갖다 놓고 글씨와 일러스트 등을 즉석에서 프린트해서 내다 팔고 있었다. 또 다른 한 상점에서는 ‘風’, ‘氣’ 와 같은 한자(漢子)를 이용해서 만든 티셔츠가 진열 되어있다.
골목골목을 다 돌고 다시 오모테산도 큰길로 나오는 모퉁이에서 캘리그라피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인상적이었던 어느 매장을 보았다. 상점 이름인 듯한 글자 두개를 모티브로 해서 옷, 수건, 우산, 향초, 간판, 인테리어, 명함까지 하나의 디자인적 요소로 구성한 사례였다. 캘리그라피가 특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black & white의 일관된 색상에도 불구하고 무엇하나 어색한 것이 없었다. 별다른 디자인적 요소 없이 캘리그라피를 이용한 문자 하나로 강한 이미지를 연출해내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지만 색다른 개념의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라주쿠는 비단 캘리그라피에 관련된 것뿐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자극 받을 수 있는 매체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보는 것과 동시에 바로 머릿속에서 창조적인 의욕이 꿈틀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에 가면 참고 자료와 서예용품에 관련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참고자료가 많지는 않았다. 오차노미즈 역의 칸다 고서적 일대를 돌고 sanseido서점, 신주쿠의 키노쿠니 서점을 다녀도 만족할 만한 참고 서적을 얻기가 힘이 들었다. 시간을 절약 하고자 한다면 이케부쿠로의 seibu 백화점내 디자인 서적 코너를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앞서 언급했던 서점에서 보았던 웬만한 책들은 거의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디자인 관련 서적코너뿐 아니라 ‘서도(書道)' 코너도 둘러봐야 한다. 일본의 캘리그라피에 관련된 작가의 작품집이나 거리시인의 작품집이 간혹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일본의 서예 용품점이 한국과 다른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이 고객의 입장에서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갔던 이케부쿠로의 한 서예용품 점에서는 종이조차 고객이 직접 테스트해 보고 살 수 있게끔 되어 있었고 먹의 발묵 상태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캘리그라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궁금증이 있었다. 과연 디자이너가 캘리그라피를 얼마만큼 이해하고 표현해 낼 수 있는지, 또 현실적으로 경쟁력은 갖출 수 있는지… 조금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생각하자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나라에서 캘리그라피가 활용되고 있는 분야는 극히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고 연구해 본다면, 그리고 조금만 발상을 달리 해본다면 지금 보다는 훨씬 다양한 분야에서 다채롭게 표현되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서예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다. 일본 캘리그라피의 상당수는 디자이너의 작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포스터를 공동 제작한 일본의 캘리그라피스트 소겐 히라노씨는, 디자이너에겐 디자이너 고유의 감성이 있다고 말했다. 서예가가 표현하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을 디자이너가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주 잊어버리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내공을 쌓는 일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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