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23
고작 운전면허 따는 것도 남들처럼 쉽진 않았다. 그런데 ‘창작’ 면허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다 아프다. 무언가 만들거나 그리는 걸 해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런데 여기 그림 그리는 것을 통해 인생이 달라지는 경험을 몸소 겪은 한 남자, 대니 그레고리가 말한다. ‘이미 예술가인 당신에게 드립니다’ 라고. 그림 에세이 『창작면허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가 내면에 이미 가지고 있는 창조력을 일깨우고 일상 속에서 습관화 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그의 그림일기를 즐겁게 훔쳐보다 보면, 어느새 빈 노트와 펜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에디터 │ 이지영 (jylee@jungle.co.kr)
『창작면허 프로젝트』는 창조력을 계발하는 과정을 운전을 배우는 것에 비유한다. 운전하는 법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기술이 아니라 의지를 갖고 익힌 과정인 것처럼 창조력도 누구나 관심을 갖고 차근차근 연습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면허, 측 ‘창작면허’를 얻게 될 것이란 재치 있는 글로 이 책은 시작한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런 내용과 함께 차, 오토바이 등 탈 것의 드로잉을 곁들인 구성 방식이다. ‘이제 펜이 필요해!’라는 내용에는 볼펜, 마카, 색연필 등의 도구 그림과 함께 저마다 다른 질감으로 글씨를 써두었다. 몇 장을 더 넘기면 머그컵, 베이글, 의자 등의 사물을 통해 기본 드로잉을 연습하는 세부적인 방법과 순서를 설명하고 이에 따라 직접 그려본 것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 드로잉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연습 과정을 마치 곁에서 직접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 같은 형식으로 흥미를 유발하고 집중력을 높였다.
두 번째 장에서는 그림일기 만드는 과정을 각자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는 것에 비유했다.
<달빛 연대기>
라는 잡지를 만드는 친구 댄 프라이스, 아내와 아들, 그림일기에 동참하는 주변 사람 등 다른 이들의 그림일기까지 골고루 실어 예를 들어준다. 일기에선 완벽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으니 전화번호도 적고, 회의 때도 가져가고, 장 볼거리도 적고, 형편없는 그림도 그려보라고 자꾸 권유한다. 특징적인 것은 재료를 바꾸어보고, 색다른 배경에도 그려보고, 주요 등장인물이나 배경도 생각해보고, 지도도 만들어 보자고 이것저것 제안하는 페이지마다 디자인이 모두 다르다는 점이다. 이렇게 내용을 따라 시선이 리드미컬하게 흘러가도록 각 요소를 배치하여 지루할 틈이 없다. 또한 내용 별로 한 두 페이지마다 각각 소제목을 달아놓은 것이 실제 그림일기 같다. 때문에 어느 때고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는다고 해도 크게 불편함이 없고 빨리 읽히는 장점이 있다. 손글씨, 즉 캘리그래피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한 페이지도 있는데, 책 전체에도 이러한 캘리그래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돋보인다.
달빛>
그림에 대해 알려주는 다른 책들과 『창작면허 프로젝트』가 가장 크게 차별화되는 부분은, 틀에 박힌 선 긋기 연습 방법을 순서대로 알려주거나 명작의 기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점이다. 반면,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주제로 삼아 가벼운 느낌을 주는 다른 그림 에세이들과도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드로잉의 기초부터 지속적으로 그림일기를 써나가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과 예술에 대한 태도까지를 중점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글도 그렇지만 쪽지나 편지처럼 말을 건네는 것 같이 꾸민 편집 디자인 덕택이기도 하다. 한 면 전체에 그림일기의 예를 제시하거나 빼곡하게 설명을 채워 넣지 않고 스크랩 북처럼 자유롭게 교차적으로 편집했다. 다양한 내용과 이미지가 서로 소통하고 있어 이야기가 훨씬 효율적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창조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대다수는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서 예술적인 충동을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반복해서 얘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적인 능력을 상실한 것은 아니므로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고 해도 괜찮으니 어서 시도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그런 점에서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같은 책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책 말미에 작가가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 마지막 장은 아예 ‘우리 주변의 창조적인 사람들’에 관한 것으로 본보기가 될 만한 사연과 작업을 소개하여 누구나 창조력을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했다.
한편, 본문에 실린 그림일기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숨어있어 ‘책 속의 책’을 보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한글판에서는 원작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본문 편집 과정에서는 그대로 두고 맨 뒤에 따로 번역을 해두어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53쪽의 그림일기 풀이를 살펴보면 “패티가 아침식사 남긴 걸로 차를 식지 않게 했다.”라고 되어있는데, 드로잉을 하던 순간의 느낌이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책 중간중간에 내용과 잘 들어맞는 명언을 삽입해 시선을 끈다. 그림일기라는 매개를 통해 순수하고 열정적인 아마추어 정신을 보여주는 『창작면허 프로젝트』는 예술에 대한 열등감과 좌절로 지친 우리를 격려하고 보듬어준다. 작가의 또 다른 책 제목처럼 ‘로마는 하루 아침에 그려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못 그려도, 자꾸 실패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일단 창작 본능에 시동을 걸어보라고 말을 건네는 그림일기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